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잘생겨서요.”
“뭐?”
“헤헤. 어? 전하, 여기 나뭇잎 붙었어요.”
카일의 어깨에 웬 나뭇잎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한 나는 이를 털어 줄 요량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읏.”
내 손이 그의 어깨에 닿는 순간 카일이 인상을 쓰며 어깨를 움츠렸다.
당황해서 퍼뜩 손을 다시 가져왔다.
뭐지? 내가 너무 세게 털었나?
하지만 나는 곧 헐렁한 셔츠 안쪽으로 붉게 남아 있는 한 흔적을 발견하고 말았다.
순간 좋지 못한 생각이 스쳤다.
그래. 그 원작의 카일의 유년 시절이….
덥석 카일의 손목을 붙잡았다. 당황하는 카일을 꽉 붙잡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의 칼라를 옆으로 잡아당겼다. 카일이 소리쳤다.
“비비안!”
세상에.
이게 다 뭐야.
언뜻 보이는 카일의 하얀 어깨에 붉은 자국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선은 등 뒤로 이어져 있었다. 어떤 것은 약간 어두운 빛으로, 그리고 어떤 것은 이제 막 새겨진 듯 붉은빛으로.
이… 이….
“비비안, 당장 이거 놓지 못-.”
“누가 우리 똥강아지 때렸어?!”
“어?”
“네?”
“너 뭐라고…….”
카일이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어라…?
내가 방금 속마음을 이야기했나?
아이코야! 당황한 카일의 얼굴을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핫.
실수해 버렸다.
잠시 당황하던 카일은 제 옷자락을 잡고 있는 내 손을 툭 쳐 떨쳐 냈다.
그러고는 급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하는데… 난 이미 다 봤다고.
그거 티타니아가 만든 상처지?
티타니아는 카일의 생모로 본디 황궁 소속 하녀였다. 아름다운 외모로 황제의 눈에 들어 밤을 보내게 되고 이를 계기로 아들인 카일을 출산한다.
카일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황제의 소생은 황후가 낳은 로건 황자와 로잘린 황녀뿐이었다.
황제가 건드린 여자가 적지 않았음에도 자식은 그 둘뿐이라 모두들 첫째인 로건 황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하녀 한 명이 황제의 옆자리를 차지하더니 떡하니 아들을 생산한 것이다.
황후와 그녀의 본가인 그래스린 공작가에서 티타니아와 카일을 경계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황후는 티타니아를 아주 철전하게 고립시켰다. 개국공신인 그래스린 공작가의 힘을 이용하면 이는 매우 쉬운 일이었다.
애초에 콧대 높은 귀족들이 하녀 소생인 티타니아를 인정할 리 없기도 했고.
그 와중에 황제까지 관심이 식었다는 이유로 티타니아를 외면하니 황궁 내에서 그녀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들을 낳아 후궁이 되면서 얻은 작은 궁 하나와 시녀 몇 명. 그것이 티타니아가 얻게 된 전부였다.
그래서일까. 티타니아는 카일이 황태자가, 나아가 황제가 되는 것에 집착했다.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이 비참한 생활이 카일이 황제가 되고 나면 모두 해결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사실 티타니아가 황후의 견제에 속절없이 당하게 된 데에는 그녀의 출신도 한몫했으니 자격지심을 가질 만도 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황제에게도 버림받은 후궁의 아들이 황제가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구름 위까지 올라갔다 추락한 티타니아에게는 냉철한 판단이 불가능했다.
어릴 적부터 남다른 영민함을 보인 카일의 모습 역시 그녀의 욕망에 불을 지폈으리라.
카일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면 그때는 그 누구도 자신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다.
집념에 가까운 그녀의 생각은 티타니아로 하여금 카일에게 손을 들게 만들었다.
그녀는 카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된 행동을 하거나 학습에 있어 미진한 모습을 보이면 곧바로 매를 들었다.
교육실이라 이름 붙여진 곳에서 사랑이라는 핑계로 체벌을 가하는 것이다.
사실 그걸 교육이라 할 수 있을까 싶다. 내게는 그저 학대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티타니아가 말하는 카일의 잘못이란 결국 그녀의 기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잖아?
맨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셔츠를 꽁꽁 싸맨 카일이 톡 쏘아붙였다.
“무례는 딱 한 번만 눈감아 주겠어. 이만 돌아가.”
“그 상처, 괜찮아요?”
카일의 축객령을 무시하고 물어보았다. 물론 전혀 괜찮지 않겠지만 모른 척할 수는 없는걸.
카일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지는 듯하더니 곧 그가 시치미를 떼었다.
“무슨 상처를 말하는지 모르겠군.”
그러고는 삐딱하게 서서 팔짱을 낀다. 얼른 여기서 안 사라지고 뭐 하냐는 얼굴이다.
화해하려고 왔는데 사이가 더 나빠지게 생겼네.
여기서 물러서면 그다음엔 카일을 또 언제 마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상처를 본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할 수 없다.
나는 카일의 앞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옆으로 맨 조그만 가방에서 주섬주섬 작은 과자 꾸러미를 꺼냈다. 카일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내려다본다.
“뭐 하는 거야?”
“과자 먹으려고요.”
“지금 과자가 입에 들어가?”
안 들어갈 건 또 뭐람? 어깨를 으쓱하며 포장된 주머니의 빨간 리본을 풀었다.
하도 뛰어서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히 깨지지 않고 얌전하게 담겨 있다.
제일 예쁘게 생긴 쿠키 하나를 카일에게 내밀었다.
“전하도 하나 드실래요?”
“싫어. 그리고 아까는 나보고 똥강아지라고 하더니.”
끙. 그 얘기는 왜 또 꺼내고 그래.
못 들은 척하고 쿠키나 가져가라는 듯 팔을 쭉 뻗었다.
그래도 카일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나는 그를 살살 꼬드겨 보았다.
“이거 엄청 맛있는 쿠키인데. 우리 천재 주방장이 오늘 아침 따끈따끈하게 만들어 준 정성이 담긴 쿠키인데.”
“…….”
“이거 다 먹으면 집에 갈지도….”
“휴.”
카일이 나이답지 않은 한숨을 쉬더니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앙칼진 손길이 내 손에 들린 쿠키를 받아 갔다.
씨익 웃으며 주머니에서 내 몫도 하나 꺼냈다.
화이트 청크 초콜릿이 콕콕 박힌 맛있어 보이는 쿠키를 크게 한입 베어 먹었다.
“이것만 먹고 돌아가.”
“넹. 맛있죠?”
“…나쁘지 않네.”
“헤헤. 그럴 줄 알았어요.”
우리는 잠시 나란히 앉아 쿠키를 나눠 먹었다.
어디선가 작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높다란 수풀 위로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간다.
정원의 풍경은 참 평화로운데 내 머릿속은 쿠키를 씹는 와중에도 맹렬히 돌아가고 있었다.
티타니아에게서 카일을 어떻게 빼돌리지?
원작에서는 카일이 성인이 될 때까지 티타니아의 학대가 계속되었다.
어릴 적에는 반항하는 법을 몰랐고 조금 큰 후에는 이미 각인된 공포와 체념, 그리고 반쯤은 제 어미에 대한 애증에 가까운 연민 때문에 그녀의 폭력을 묵묵히 견뎠다.
그러다 한참 뒤 여주를 만나고 나서야 몸도 마음도 진정으로 구원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원작의 줄거리일 뿐이고.
지금 티타니아의 폭력을 견디고 있는 카일은 내게 있어 살아 있는 사람이다.
나랑 카일은 동갑이고 나는 지금 열한 살이다. 카일이 성인이 되어 학대에서 벗어나기까지 무려 8년이나 남았다는 뜻이다.
게다가 원작대로라면 앞으로 학대의 수위가 점차 높아질 텐데.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하지만 어떻게?
카일이 입은 상처를 모두에게 알리고 티타니아의 만행을 폭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카일의 명예를 땅바닥으로 떨어뜨리는 행위이다.
하녀 출신 어머니에게 매 맞으며 자란 황자.
뜯고 씹고 맛보길 좋아하는 귀족들이 환장할 만한 스토리이다.
카일이 기를 쓰고 숨기려고 하는 데에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최선의 수는 카일과 티타니아를 멀리 떼어 놓는 것인데….
인상을 쓰고 고민하는 내게 카일이 불쑥 입을 열었다.
“신경 쓰지 마.”
“네?”
“못 본 척하라고.”
카일이 담담하게 말하곤 남은 쿠키를 한입에 털어 먹어 버렸다. 그 모습이 이미 체념한 사람 같아 보여 내 마음이 더 안타까워졌다.
아무리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는 남자 주인공이라지만 카일은 아직 어린데.
“황자님, 만약 지금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요?”
내 질문에 카일의 눈이 잠시 동그래졌다. 하지만 곧 그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어떻게? 됐어. 그냥 내가 조금 참으면 돼.”
아니, 이 똥강아지가! 등짝을 그리 만들어 놓고선 뭘 또 참아?
괜히 내가 더 울컥해서 소리쳤다.
“할 수 있거든요! 어쨌든! 가능하다면 벗어나는 쪽이 더 좋다는 거죠?”
“괜한 소란이 일어나는 거면 나는 반대야.”
“안 그럴 테니 걱정 마세요.”
나만 믿으라는 듯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카일의 묘한 시선이 내게 닿는다. 그가 약간 풀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
“음……, 그야. 우린 친구잖아요.”
내가 널 도와주면 너도 날 도와주고.
상부상조하는 사이?
“나만 믿어요.”
불안해하는 카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 씩 웃어 보였다.
***
“비비안 로시에르.”
움찔. 평소와 다른 엄한 목소리에 몸이 절로 움츠러진다.
데구르르 눈동자를 굴려 눈치를 보니 굳은 표정의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헤, 헤헤.
우리 아빠 많이 화났네?
카일을 만나고 온 것까진 좋았는데 내가 사라진 사이 궁에서는 난리가 났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