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을 괴롭혀도 뒤탈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지.
그러면서도 혹시나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오로지 ‘훈련’에서만 그를 괴롭혔다.
누가 이후에 그를 추궁하더라도 선배로서 후배에게 검술의 가르침을 주었다 변명하기 위해서.
상대의 야비함에 치가 떨렸다.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지금도 내가 미처 지켜보지 못하는 사이 교묘한 방식으로 카일을 괴롭히고 있을지 몰랐다.
주변에서 모든 걸 보고도 그저 재미있는 구경거리 취급하며 침묵하고 있던 다른 검술학부 사람들에게도 화가 난다.
바보 같은 사람들. 몇 년, 아니 1년만 지나도 카일이 진짜 천재라는 걸 깨닫게 될 거라고.
그때 가서 후회하지나 말라지.
“그보다 우선 프란츠 다이어….”
저걸 어떻게 혼내 줘야 버릇을 잘 고쳐 줬다는 소리를 들을까.
가문의 힘을 이용해 눌러 줄 수도 있겠지만 그 방법은 카일이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악의가 가득한 훈련 지시도 그에게 지기 싫다는 이유 하나로 끝까지 해내고야 말았던 카일이니까.
고민하던 내가 힌트를 얻은 것은 의외의 곳에서부터였다.
“담력 훈련?”
“응.”
근육통에 좋다는 약을 전해 주려 잠깐 만난 카일이 내게 말했다.
“검술학부 신입생은 전부 참여하는 거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무엇이든 이겨 낼 용기를 기르기 위해서.”
담력 훈련이 그렇게 거창한 거였나.
내 전생에서는 그저 수련회 단골 메뉴로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놀리는 목적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적당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구나. 언제 하는데?”
“이번 주 금요일에 뒷산에서… 앗, 차가워.”
“가만히 있어, 카일. 여기도 발라야 해.”
프란츠가 카일을 수련이라는 명목으로 괴롭히는 건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카일을 위해 근육통에 효과가 좋다는 약을 구해 왔고.
진정 효과가 있는 차갑고 투명한 젤을 카일의 팔뚝에 발라 주자 액체가 금방 피부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생각보다 시원했는지 카일의 표정이 살짝 편해졌다.
“지금 등까지 바르긴 그렇고…. 일단 팔만 먼저 발라 줄게. 통증이 느껴지는 곳 위주로 매일매일 꼭 발라야 해. 알았지?”
“어디서 구한 거야?”
“아, 다니엘이….”
그 순간 카일의 눈매가 삐뚜름히 치켜 올라갔다.
또, 또 이런다.
나는 카일의 팔을 찰싹 때렸다. 그러자 카일이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내밀었다.
“왜 그래, 비비.”
“카일, 친구들과는 사이좋게 지내자.”
“도대체 누가 친구야?”
“다니엘이랑 너.”
“나는 걔랑 친구 아니야.”
“인사했으면 다 친구지. 그러지 말고 친하게 지내.”
네 곁에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내 마음을 조금은 눈치채 달란 말이다.
나는 카일의 팔에 마저 약을 발라 주었다. 카일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이 약을 구해 온 상대가 다니엘이라는 건 싫은데 또 약의 효과는 굉장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렇겠지.
약물의 효능만큼은 의심할 이유가 없다. 이건 기성 약품이 아닌 카일을 위해 준비한 전용 약이니까!
이 약을 만든 사람은 아렌느 시국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아카데미 졸업생이었다.
내가 카일에게 줄 근육통 약을 찾는다고 하니 다니엘이 자신의 학부 선배에게 물어봐 주었고 그렇게 건너 건너 의뢰를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개인 의뢰? 나는 수주 받아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아닌데.’
약국의 주인은 처음에는 안 된다는 뉘앙스를 풍겼지만
‘십, 십 골드…! 금방 만들어 드리죠, 손님.’
눈앞에서 반짝이는 황금 앞에 장사 없었다.
…결국 내가 주도적으로 약을 구해 온 거나 다름없네.
하지만 다니엘이 구해 온 것이라 말한 데에 후회는 없었다.
두 사람이 친해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기도 하고.
어쨌든 다니엘이 다리를 놔 주기도 한 거니까.
“그보다 담력 훈련이면 선배들도 참가해? 나 때는 그랬는데.”
“나 때?”
말실수했다. 간혹 이렇게 전생의 기억이 섞일 때가 있었다.
나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아니, 예전에 그랬다고 들었다고. 선배들이나 선생님들이 몰래 숨어 있다가 참가자들을 깜짝 놀래는 거야. 물론 참가자들한테는 비밀로 하고.”
“그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하지만 그날 상급생들이 다른 훈련은 없다고 들었던 것 같아.”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입생들을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프란츠 놈도 이 담력 훈련에 참여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나는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고 카일에게 물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줘. 담력 훈련은 몇 시에 시작돼? 밤에 하는 거야?”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고 8시에 모두 모인댔어.”
“그렇구나. 총 몇 명이 참가해? 대충 몇 시간이나 걸리려나.”
“검술학부 신입생은 총 27명이야. 시간은 잘 모르겠네. 그런데 비비.”
“응?”
“왜 이렇게 자세하게 물어보는 거야?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응? 갑자기 왜?”
“비비의 표정이 이상해.”
카일이 가느스름하게 눈가를 좁혔다. 그러고는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뭐야, 왜 그래!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데!
“나 평소랑 완전 똑같은데!”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러면 내 표정이 지금 어떤데?”
“무언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표정을 하고 있어.”
“꿍꿍이라니! 나는 정의로운 생각밖에 안 해.”
“정의로운 생각이라고?”
“그럼!”
프란츠를 아주 매섭게 혼쭐을 내 줄 기특한 생각밖에 안 했는데 당연하지.
카일은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얼굴이었지만 더 이상 내게 캐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속으로 후후 웃음을 참았다.
기대해, 카일.
내가 세상에서 제일 착한 복수가 무엇인지 보여 줄게!
***
카일이 굳은 얼굴을 한 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최근 그는 고민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고민의 원인은 다름 아닌 비비안 로시에르였다.
자신의 친구이자 또 유일하게 친애하는 존재.
비비안은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영역에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비비안이 카일을 신경 쓰는 것처럼 카일 역시 비비안을 신경 썼다.
상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지만.
비비안은 계속 제 곁에 누군가를 붙여 주고 싶어 했다.
예전에는 누군지 이름도 모를 거리의 여자애에게 상냥하게 굴라고 하질 않나, 이제는 아카데미에서 만난 한 남학생과 친하게 지내라고 떠밀었다.
나는 비비안만 있으면 상관없는데.
카일은 비비안에게 아주 조금 섭섭함을 느꼈다.
비비안은 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더 친해지기를 바라는 걸까?
만약 그 이유가 비비안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더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라고 생각하면 심장이 콱 조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비비안과 가장 친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은 자신이어야 하는데.
전부 이전에는 몰랐던 감정이었다. 언제나 비비안의 곁에는 자신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비비안의 주변에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카일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비비.”
가볍게 발을 구른 카일이 작게 읊조렸다.
문제는 다니엘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검술학부의 상급생인 프란츠 다이어가 그를 괴롭히는 것을 비비안이 보고 말았다.
비비안의 앞에서는 절대 티 내지 않고자 애쓰던 부분이었다.
비비안은 검술을 싫어했다.
그가 좋아하는 분야를 싫어한다기보다는 그저 뜨거운 태양 볕 아래에서 훈련을 해야 한다는 점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랬기에 카일은 비비안이 검술학부에, 그것도 연무장에 직접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검술학부는 위계질서가 강한 학부였다.
상급생이 말하는 것을 하급생은 따라야 했다.
설령 그것이 부당한 지시라고 해도 말이다.
이를 버티지 못한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바로 검술학부를 스스로 나가는 것. 그것까지는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그건 절대 안 돼.’
카일이 꾹 제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는 이곳에서 성공해야만 했다.
눈에 띌 만한 성과를 보여 주지 못한다면 황제는 그에게서 한 줌과도 같은 관심조차 거둘 것이다.
검술에만 집중할 수 있는 전문적인 환경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
프란츠의 얼간이 같은 요구야 해내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무슨 일이 생기든 버텨 낼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꿍꿍이라니. 나는 정의로운 생각밖에 안 해.’
‘정의로운 생각이라고?’
‘그럼!’
비비안이 알게 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가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까지 짐작하고 말았다.
비비안은 언제나 카일이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그를 도와주었다.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보게 해 어머니의 강압적인 교육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줬으며, 카일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누구보다 먼저 그에게 선물해 주고는 했다.
카일 역시 비비안을 믿었다. 그녀는 또 기상천외한 방법을 써 자신을 도와주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카일이 걱정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혹여나 비비안이 다치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항상 날붙이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학부이다 보니 다른 곳보다 거칠고 드센 사람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