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도 종종 볼 수 있었고.
카일은 비비안이 그런 위험과는 최대한 떨어져 안전하게 지냈으면 했다.
그러는 비비안 역시 제국의 군수업을 담당하는 로시에르 후작가의 딸이었지만 말이다.
“자, 모두 모였나?”
담력 훈련이 진행되는 날 저녁, 상급생들의 리더인 리오넬 블랙필이 크게 외쳤다.
7학년생인 그는 검술학부의 회장이었다.
실력도 출중한 데다 성격까지 좋아 다른 학생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교수들이 그를 신뢰하는 것은 더 이야기할 필요도 없고.
검술학부 신입생들이 리오넬의 앞에 줄을 섰다.
카일은 가장 앞자리에 서 있었다.
현재 이곳에는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들과 리오넬을 포함한 7학년과 6학년들뿐이었다.
8년 차 학생들이 없는 것은 이해가 간다. 다들 졸업 준비로 바빠 평소에 얼굴도 잘 보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 외의 학년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비비안이 말했던 대로 신입생들을 골리기 위해 전부 저 산에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프란츠도 저 산에 있는 걸까?
“휴.”
성가신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카일이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이 전부 모이자 리오넬이 크게 외쳤다.
“빠짐없이 다 온 것 같네. 자, 지금부터 오늘 밤 너희들이 진정한 검술학부 학생이 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알려 줄게. 한 번만 알려 줄 거니 잘 들어.”
“네!”
“오늘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은 간단해. 이 산을 올라 꼭대기에 준비된 표식을 가져오면 된다. 표식을 나눠 주는 사람이 대기하고 있을 거니까 찾는 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카일이 그의 뒤로 보이는 산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해가 진 산은 어두운 정적에 잠겨 있었다.
“2인 1조로 움직일 거다. 조는 이미 배정해 왔어. 이번 신입생 숫자는 홀수이니까 마지막 조는 세 명으로 진행한다.”
카일은 자신의 조를 확인했다.
스펠링 순으로 한 것은 아닌지 그의 조는 맨 마지막이었다.
함께 배정된 이들은 언젠가 지나가다 한번 인사나 해 본 사이들이었다.
그것마저도 프란츠가 그를 타깃으로 잡고 무분별한 훈련을 지시하기 시작하자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튈까 슬그머니 피해 버렸지만.
“아, 안녕….”
아니나 다를까, 카일이 그들에게 다가가자 두 사람은 꺼리는 표정을 지었다.
인사를 하긴 했지만 마지못해 했다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카일은 그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자, 그리고 각 조에서 한 명씩 나와 이거 받아 가.”
리오넬이 다른 학생을 시켜 조마다 풍선 하나씩을 나눠 주었다. 카일이 풍선을 받았다.
각양각색의 풍선이 허공 위에 두둥실 떠올랐다.
손가락으로 풍선을 툭툭 치며 재미있어 하는 신입생들에게 리오넬이 말했다.
“정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너희 선배한테 이 풍선을 주면 그 대가로 표식을 나눠 줄 거야. 그러면 여기서 질문, 정상에 도착할 때까지 이 풍선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안 터뜨리게 조심히 해야 합니다.”
“그래, 그렇지! 풍선을 터뜨리면 자동으로 탈락이니까 잘 보호하고. 물론 잃어버려도 탈락이야. 그러면 1조.”
“네!”
“이제 출발하자.”
1조에 배정된 어린 학생들이 어두운 산을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뜻밖의 모험에 신이 난 표정이고 다른 한 사람은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5분 정도의 시간 차이를 두고 학생들이 줄줄이 산속으로 입장했다.
카일은 담담히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으아아악!”
삼십 분 정도 지났을 때 깊은 산속에서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고요한 산에서 푸드득 새들이 날아갔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 모습을 보며 상급생들이 히죽거렸다.
“무슨 무서운 일이라도 생겼나 보네.”
“으아악! 살려 줘!”
“어라, 또.”
상급생은 신입생들에게 처한 곤경을 완벽하게 만끽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더 많은 신입생들이 산에 입장할수록 비명이 들리는 주기도 점차 짧아졌다.
남은 이들은 이제 그저 덜덜 떨고 있었다.
저 산에 도대체 뭐가 있길래 비명 소리가 들리는 걸까.
특히 카일과 함께 같은 조로 배정된 이들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 마지막 팀. 이제 너희들 차례야.”
리오넬이 어서 들어가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카일을 제외한 두 사람은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도움을 구하듯 눈을 굴려 보지만 상급생들이 봐줄 리가 없다.
결국 카일이 보다 못해 말했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내 뒤로 따라와.”
크게 숨을 들이쉰 카일은 뚜벅뚜벅 망설임 없이 산으로 향했다.
***
바위 뒤에 숨은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살폈다.
응, 아무도 없네.
털썩 주저앉은 나는 옆으로 멘 가방을 뒤적였다.
간단히 저녁으로 때우려고 식당에서 포장해 온 샌드위치가 나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참치 샌드위치였다.
“우, 우리 여기서 이래도 되는 거야?”
나를 따라온 다니엘이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마치 겁먹은 토끼 같은 모습이었다.
태연하게 샌드위치 포장지를 끄르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응? 뭐가?”
“오늘 검술학부에서 담력 훈련을 진행한다고 했잖아. 타과생인 우리가 있어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그래서 들킬까 봐 저녁도 안 먹고 일찍 왔잖아.”
나는 손을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다니엘의 표정은 밝아질 줄을 몰랐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사실 다니엘은 내 계획에 없던 인물이었다.
‘비, 비비안! 좋은 저녁이야.’
나는 다니엘을 식당 앞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마주쳤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다니엘도 함께 가면 더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에 곧바로 동행을 제안했다.
‘어디에 가는데?’
‘히히, 비밀이야.’
그렇게 다니엘은 영문도 모르고 나를 따라 이 뒷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은 나를 따라온 걸 조금 후회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만 비비안이 조금 있으면 검술학부 선배들도 올 거라고 했잖아.”
“응, 그랬지.”
“들키면 분명 쫓겨날 거야.”
“에이, 아니야.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방법을 다 생각해 왔으니까.”
“하지만… 읍!”
자꾸 쫑알쫑알 떠드는 다니엘의 입에 샌드위치를 물려 주었다.
다니엘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맛있지?”
입 안을 우물거리던 다니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어.
내가 보니까 우리 아카데미는 참치 샌드위치가 가장 맛있더라고.
“일단 다 먹으면 내가 계획을 말해 줄게.”
우리는 나란히 앉아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했던 모양인지 다니엘은 허겁지겁 샌드위치를 먹어 치웠다.
그러고는 얌전히 내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윽, 그렇게 계속 쳐다보면 부담스러운데.
결국 무언의 압박에 못 이겨 나까지 후다닥 샌드위치를 해치워 버리고 말았다.
쓰레기를 치운 나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게 뭐야?”
다니엘이 호기심을 보였다.
“지금부터 우리가 입을 거. 기다려 봐. …짠!”
내가 뒤집어쓴 것은 흰색의 천이었다.
얼굴 부분에 동그란 눈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는 미소 짓는 입이 그려진 하얀색의 천!
그렇다. 오늘 나는 유령 놀이를 할 생각이었다.
내가 빙의한 소설은 한국인이 쓴 로판 소설이었다.
그러니 담력 훈련 같은 사건들도 결국은 한국인의 경험에 기반해 파생된 상상의 산물이라는 거.
담력 훈련을 할 때는 유령 복장을 하거나 귀신처럼 분장해 상대를 놀라게 하는 것이 법칙이었다.
다만 귀신처럼 분장을 하기엔 얼굴을 전부 드러내야 하니 금방 들킬 것 같아 나는 유령을 택했다.
유령 옷을 뒤집어쓴 나는 훌라춤을 추며 흐느적거렸다.
“어때? 유령 같아?”
“아니….”
다니엘은 쓸데없이 냉철했다.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물론 다니엘이 반대한다고 해서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나는 다니엘이 방심한 틈을 타 그의 머리 위로 똑같은 유령 옷을 씌워 주었다.
“으앗, 비비안!”
“자자, 그러지 말고. 어차피 어두우면 제대로 안 보여서 잘 몰라.”
“하, 하지만 선배들이 검술학부 사람들은 엄청 사납다고 했어. 이러다가 걸리면 진짜 큰일 날지도 몰라. 이, 이제 그만 같이 내려가자.”
“에이, 괜찮다니까? 걱정 안 해도….”
“야, 너희 뭐야?”
한참 다니엘과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놀라서 펄쩍 뛴 다니엘의 뒤로 가벼운 수련복을 입은 두 사람이 보였다. 검술학부 학생들이었다.
“너희 누군데 우리 구역에 있는 거야?”
나는 재빨리 상대의 얼굴을 스캔했다.
검술학부 대부분이 그렇듯 키가 훤칠하긴 해도 얼굴에 묘하게 앳된 구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2학년이나 3학년쯤으로 추정되었다.
마침 잘됐다.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내리깔고 굵은 목소리를 흉내 내었다.
“하, 너희? 이제는 새파랗게 어린것들이 선배도 이겨 먹으려고 하네.”
내 도발적인 발언에 다니엘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창백해진 얼굴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탁월한 선택이기도 했다.
싸늘한 반응이 돌아오자 두 사람이 지레 움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