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를 굴리며 당황하더니 곧 자기들끼리 쑥덕였다.
눈앞에 있는, 현재 유령 옷을 뒤집어쓰고 있는 수상한 자가 과연 누구인지 상의하는 것이다.
이에 나는 쐐기를 박았다.
“안 되겠네. 평소에 좋게 좋게 봐주니까 기강이 해이해져서 선배고 뭐고 전부 우습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던 학생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겁먹은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리고 나는 선고했다.
“지금 너희 아래로 다 불러.”
“네…?!”
“너희는 오늘 집합이다. 담력 훈련도 다 취소야. 선배도 못 알아보는 애들 데리고 하긴 뭘 해? 오늘 밤에 너희는 다리 부러질 때까지 연무장을 돌 줄 알….”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절대로 선배님을 우습게 본 것이 아닙니다! 오해십니다!”
기겁한 학생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1년에 딱 한 번 있는 담력 훈련이다.
자신들이 신입생 때 당했던 만큼, 아니 그 배로 골려 주고자 기대하고 있을 선배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런데 그 훈련이 자신들의 실수 때문에 취소가 된다?
‘그날로 선배들한테 찍히는 거지.’
흰 유령 천 아래서 나는 입꼬리를 올리고 히죽였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잔뜩 화난 상급생의 것을 흉내 냈다.
“오해? 지금 내가 잘못했다는 건가?”
“아, 아닙니다! 절대로 아니에요!”
“그리고 너. 누가 몸 그따위로 건들거리래. 제대로 안 서?”
“넵, 선배님!”
두 학생이 양팔을 몸통에 딱 붙이고 차렷 자세를 했다.
이제 여름이 지나가 더운 날씨도 아닌데 땀을 뻘뻘 흘린다.
아마 지금쯤 내 정체가 누군지를 두고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건 너무 오래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
“너희들.”
“네!”
“여기가 너희가 담당한 구역이야?”
“네! 그렇습니다!”
“그래? 그런데 이제부터는 우리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너희가 다른 곳으로 가.”
“알겠습니다!”
대답 한번 시원하고.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하나 더.”
“네! 말씀하십시오!”
“프란츠 다이어 지금 어딨어.”
“프, 프란츠 선배요?”
“그 선배라면 더 위쪽으로 올라간다고 했던 것 같아요. 저기 붉은 나무가 보이는 정상 근처까지요.”
상대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나는 고개를 돌렸다.
과연 산꼭대기와 가까운 곳에 유달리 붉게 물든 곳이 있었다.
저기에 그놈이 있단 말이지.
당장 가야겠다.
“너희는 이만 가 봐.”
볼일이 끝난 나는 휘휘 손을 저어 상대방을 내쫓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머뭇거렸다.
“뭐야, 왜 안 가.”
“저… 근데 선배님.”
“왜.”
“그… 제가 정말로 의심하는 건 아닌데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선배님들 중에 이렇게 키가 작았던 분은 없었던 것 같은데….”
“사실 목소리도 조금….”
그새 나를 의심하고 있었나?
나는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팔짱을 끼었다.
“변장 옵션이 추가된 유령 옷이야. 오늘을 위해서 수도에서 비싼 돈 주고 특별 구매한 거지. 그런데 지금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지려고 하네?”
“죄, 죄송합니다!”
“가 보겠습니다, 선배님!”
나를 떠보려고 했던 두 사람은 본전도 못 찾고 줄행랑을 쳤다.
허겁지겁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결국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아, 너무 웃겨.”
이렇게까지 잘 속을 줄은 몰랐는데.
변장 옵션이 있는 옷이라니, 전부 거짓말이다.
만약 정체가 들통나면 길 잃은 신입생 흉내를 내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네.
게다가 프란츠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까지 알게 되고.
큰 수확이다.
사람들이 사라지니 다니엘이 유령 옷을 살짝 벗었다. 어리벙벙한 표정은 반쯤 경이로움을 띠고 있었다.
나는 다니엘에게 히죽 웃어 보였다.
“그것 봐. 괜찮을 거랬지?”
“비비안은 정말 대단하구나….”
“흠, 그러면 방해꾼도 처리했으니 내 계획을 말해 줄게. 일단 나는 프란츠를 아카데미에서 쫓아낼 거야.”
감히 카일을 괴롭히다니.
나쁜 아이에겐 맴매가 제격이지.
나는 가방에서 원형의 물건을 꺼냈다.
의외로 다니엘이 내가 꺼낸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영상구잖아.”
“응, 맞아. 이걸로 프란츠를 내쫓을 결정적인 증거를 찍으려고.”
그 질 나쁜 녀석이 오늘 같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분명 선을 넘는 장난을 칠 거고 그 과정에서 다치는 이들도 나올 것이다.
그리고 난 그의 악행을 촬영해 아카데미 재학생 전원에게 공개할 생각이었다.
물론 상대방이 담력 훈련은 검술학부의 전통이며 자신이 살짝 흥분한 나머지 과하게 행동했을 뿐이라고 수습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난 이때 두 번째 증거를 퍼뜨릴 것이다.
바로 작년과 재작년 피해자들에게서 받은 진단서와 녹취된 증언이다.
사실 뒤에 나올 것들이 본론인 셈이지.
다만 화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언가 시각적으로 제시할 만한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제일 자극적으로 다가오니까.
마침 검술학부가 연무장이 아닌 학내 공용 공간에서 행사를 진행한다니 평소보다 접근도 더 쉬울 것 같았고.
아렌느 아카데미에서 불명예스럽게 퇴학당한 사실이 퍼지면 프란츠는 두 번 다시 귀족 사교계에는 얼굴도 들이밀지 못하게 되겠지.
“자, 그러면 올라가자.”
“응.”
그에게 딱 맞는 결말을 만들어 주려는 내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
프란츠가 사고를 치고 말 것이라는 비비안의 생각은 대체로 들어맞았다.
유일하게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면 그가 비비안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구제 불능이었다는 점이랄까.
산을 올라가며 프란츠가 툭툭 동그란 구슬들을 던졌다.
바닥에 부딪쳐 퍽 깨진 구슬에서 뭉게뭉게 연기가 피어나더니 곧 초록색의 액체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흘러나온 액체는 하나로 뭉쳐 슬라임이 되었다.
스스슥.
수풀 사이로 슬라임이 사라졌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진짜 슬라임 같네요.”
함께 있던 학생이 중얼거렸다.
프란츠가 흩뿌린 것은 사실 진짜 마물은 아니었다. 그저 일정 시간 동안 실체화되어 움직이는 환상에 불과했다.
더불어 공격 능력도 없어서 주로 저학년들의 교육을 위해 쓰이는 물건이었다.
물론 신입생들은 난생처음 보겠지만 말이다.
“올해는 과연 몇 명이나 성공할까요?”
“글쎄. 아, 걔는 성공할 것 같다. 이그리트 말이야.”
“하긴 확실히 카일러스는 끝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크죠.”
프란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카일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돌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언짢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카일을 괴롭힐수록 카일에 대한 평가는 후해졌다.
-쟤는 끈기도 있고 성실해서 분명 대성할 거야.
-어린 게 독해 가지고는. 쯧, 저러다 최연소 소드 마스터라도 되겠네.
칭찬 반, 비아냥거림 반이었지만 어쨌든 결말은 카일을 될성부른 나무로 평가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절대로 프란츠가 바라던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카일이 고립되길 원했으니까.
‘곱게 자란 황자 주제에.’
카일의 성장 환경이 어땠는지 알았더라면 절대로 쉽게 나올 수 없는 발언이었으나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관심이 없기도 했고.
‘검을 배우고 싶으면 황궁에서 배우면 될 것이지 뭐 하러 아카데미까지 오고 난리야?’
카일은 이미 기초가 완성된 인재였다. 분명 황궁에서 배운 것이 틀림없었다.
남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황궁 검술을 배웠다는 점도 아니꼬운데 심지어 실력도 좋았다.
언제나 중하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는 프란츠로서는 열등감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괜히 심술이 생기며 카일을 괴롭히고 싶어졌다.
특히 황자임에도 별다른 뒷배가 없어 보이는 카일의 모습은 프란츠로 하여금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제 발로 여길 떠나게 만들어 주겠어.’
프란츠가 들고 있는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다른 것들보다 유달리 큰 구슬 두 개가 손에 잡혔다.
지금까지 올라오는 길에 뿌린 환상만 만들어 내는 구슬들과 다르게 이건 실제로 기사들을 훈련시킬 때 쓰는 마물 소환 구슬이었다.
두 개 모두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싶어 일전에 창고에서 몰래 훔쳐서 보관하고 있다가 이번에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어디 한번 고생 좀 해 보라지.’
프란츠의 얼굴에 야비한 미소가 떠올랐다.
***
카일이 묵묵히 산을 올랐다.
해가 진 산은 생각보다 어둡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황궁에서 무시당한다 한들 그래도 황자였던 카일로서는 처음 접하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두려움보다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 앞섰다.
먼저 출발했던 이들이 무엇에 비명을 질렀는지 추측하며 이에 대한 대비법을 상상해 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다.
씩씩하게 걸어가는 카일의 뒤로 나머지 두 사람이 바짝 달라붙었다.
“카, 카일러스. 같이 가.”
“히익, 귀신이다!”
“귀신이 아니야.”
카일이 나무에 매달린 흰 천을 손으로 치우며 말했다.
두 사람은 아마 상급생들이 설치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조잡한 설치물에도 깜짝깜짝 놀랐다.
다만 이렇게 계속 어둠에서 오는 공포만 이겨 내야 하는 거라면 오늘의 훈련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세 사람이 산 중턱까지 올랐을 때였다.
“카일러스, 저길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