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카일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말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주 잘게.
잠시 뒤, 카일이 나를 놓아주었다. 마주한 카일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카일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걸 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티타니아에게서 학대를 당할 때도 이런 표정은 아니었는데.
복잡한 마음으로 입을 달싹이던 내가 내뱉은 것은 결국 고맙다는 말이었다.
“고마워, 카일.”
“…비비가 다친 게 아니라서 다행이야.”
“다니엘도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내가 괜히 끌어들여서….”
“아, 아니야. 괜찮아”
나를 원망할 법한데도 다니엘은 괜찮다는 말부터 했다. 정말이지 천사나 다름없었다.
내가 진짜 미안해, 다니엘.
앞으로 너희 가족과 네가 원작보다도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내가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게!
주위를 둘러보던 카일이 말했다.
“남은 두 마리가 어디에 있을지 몰라. 어서 내려가자.”
“응.”
“그러면 다니엘, 내 손 잡아.”
카일이 다니엘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나는 두 눈을 크게 깜빡였다.
카일이 방금 다니엘에게 먼저 손도 내밀고 친근하게 이름으로 부른 것 같은데…?
놀란 건 나만이 아니었는지 다니엘 역시 넋 나간 표정으로 카일을 빤히 바라보았다.
카일이 귓가를 빨갛게 물들이곤 중얼거렸다.
“네가 프란츠한테서 비비를 보호해 줬으니까…. 흥, 아무튼! 내 부축은 필요 없어?”
“아, 아니야. 고마워.”
다니엘이 허겁지겁 카일의 손을 잡았다. 어쩐지 전보다 훨씬 친해진 것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같이 부축하자, 카일.”
다니엘의 왼편에는 내가, 오른편에는 카일이 서며 우리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안전하게 하산하는 일만 남았다.
다른 학생들에게 들켜 버렸으니 혼나는 건 각오해야겠지만… 그 전에 프란츠가 먼저 쫓겨나게 될걸!
각오를 단단히 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때였다.
취이익-. 취익.
이제는 들리지 않아야 할 마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순간 붙잡고 있는 다니엘의 몸이 섬찟 굳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모두 불길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내 얼굴이 창백해졌다.
“카, 카일.”
쓰러졌던 오크가 어느새 다시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고개를 터는 오크의 콧구멍에서 뜨거운 열이 매섭게 뿜어져 나왔다.
“내 목검.”
카일이 황급히 자신의 목검을 찾았다. 하지만 카일의 목검은 아까 오크를 쓰러뜨리면서 반으로 갈라진 후였다.
달아나려고 했으나 오크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비비!”
늦었다는 것을 깨달은 카일이 나를 머리부터 꽉 감싸 안았다. 나는 오크가 카일의 머리를 향해 커다란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안 돼!”
카일이 나를 빈틈없이 꽉 껴안았다.
촤악-.
뜨거운 액체가 손끝에 튀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덜덜 떨었다.
내 손에 묻은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뒤 들려오는 목소리는 카일도, 다니엘의 것도 아니었다.
“어이, 신입생. 괜찮아?”
“…리오넬 선배님?”
“뭐야, 너희는 또 누구야?”
나를 꽉 감싸 보호하던 카일의 몸이 조금씩 떨어졌다. 그제야 나는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의 앞에는 갈색 머리의 키가 큰 남자와 목이 잘린 오크가 있었다.
“하하, 아주 개판이구만.”
카일에게 리오넬이라 불린 남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가 들고 있는 검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리오넬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는 검집에 넣었다.
우리를 공격하려던 오크는 목이 잘린 채로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
리오넬이 오크의 몸통을 발로 찼다. 그러자 육중한 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산비탈을 타고 굴러갔다.
거추장스럽게 흘러내린 갈색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그가 피로하다는 듯 말했다.
“다친 곳 있는 사람.”
“….”
“없어? 그러면 다행이고. 일단 너희는 내가 본 적 없는 애들인데 어디 소속이야.”
“고대어 학과입니다.”
“마, 마법학부예요.”
“역시 우리 애들이 아니었구만. 오늘 여기서 검술학부 일정이 있다는 거 알았어, 몰랐어.”
“…알고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내 잘못을 시인했다.
다행히 내 선택이 정답이었는지 리오넬의 표정도 조금 누그러졌다.
그렇다고 해서 못 본 척 넘어가 준 것도 아니지만.
“너희는 타과생이니 내가 직접 벌을 주진 않을 거야. 하지만 너희 학부 교수님들에게는 말씀드릴 거다.”
나는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사고가 일어난 시점부터 각오했던 일이기도 했고.
“그런데 마물이 더 있었는데 괜찮은 건가요?”
“다른 애들이 잡으러 갔으니 이제 괜찮을 거야. 그런데 카일러스.”
“네!”
리오넬이 자신을 부르자 카일이 긴장하며 몸을 바로 했다.
리오넬이 쓰러진 오크를 턱짓하며 말했다.
“저 오크, 행동이 조금 이상하던데 어떻게 된 거야? 혹시 네가 공격했어?”
“네.”
“뭐야, 진짜?”
“카일이 한 거 맞아요. 카일이 저 오크를 기절시켰어요.”
리오넬이 놀라워하며 카일을 샅샅이 살폈다. 그 눈빛이 하도 집요해 순간 괜히 나섰나 싶었다.
나는 그저 카일이 나랑 다니엘을 구해 줬으니 벌을 주지 말라고 어필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와, 대단한데?”
하지만 내 걱정과 달리 리오넬은 굉장히 즐거워했다.
“1학년이 오크를 기절시켰단 말이야? 그것도 저 목검 하나로?”
“잠깐이었습니다.”
“다른 애들은 그 잠깐도 못 해. 하긴 애들이 신입생 중에서 네가 제일 잘한다고 말하긴 하더라. 아카데미 입학하기 전에는 누구한테 배웠어?”
“베르도 로시에르입니다.”
“로시에르? 혹시 재작년 황궁 검술 대회 우승자?”
“네.”
순간 리오넬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카일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너 나한테 개인 교습 받을래? 내가 너 연습하는 거 봐줄게.”
상급생이 하급생을 직접 교육을 해 준다는 건 대단한 특혜였다.
리오넬이 프란츠처럼 덜떨어진 놈이 아니라 진짜배기 실력자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런데 너 아직도 로시에르 님이랑 연락하니? 친해?”
진짜 목적은 그 뒤인 것 같지만 말이다.
어쨌든 카일로서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카일은 곧바로 좋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카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친합니다. 그런데요, 선배님.”
“응?”
“제가 선배님께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받는다고 하면 다른 학생들이 불만을 보일 것 같습니다.”
“다른 애들이 무슨 상관이야. 내가 개별적으로 시간을 내서 가르쳐 주겠다는데.”
리오넬이 콧방귀를 뀌었으나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혹시나 불공평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요.”
“오크도 기절시킨 애가 의외로 소심하네. 그러면 뭐, 몰래 가르쳐 줘?”
“그래도 될까요?”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하든지.”
리오넬이 귀찮아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카일의 입가에 떠오른 작은 미소를 보았다.
곧 표정을 갈무리한 카일이 공손하게 물었다.
“그러면 이건 선배님과 저만의 비밀이라고 해도 되는 거죠.”
“그래.”
“저희끼리의 비밀이면 저희 외에는 아무도 듣지 못했어야 하니까 오늘 이곳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던 게 되겠네요.”
“뭐? 그게 무슨….”
세상에.
나는 놀라 입을 벌렸다.
카일은 리오넬에게 오늘 이 산에 나와 다니엘이 있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 달라 요구하고 있었다.
그가 로시에르에 관심이 있는 것을 기회 삼아 말이다.
아니, 그런데 그 로시에르가 바로 나인데…. 물론 리오넬이 관심 있는 건 우리 오빠지만.
리오넬 역시 카일의 본심을 알아차리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나는 살짝 긴장했다. 카일이 괜히 나와 다니엘을 챙기려다 미운털 박히게 되는 건 내가 원치 않았다.
하지만 리오넬은 생각보다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알았다.”
“감사합니다!”
“하여간 요즘 애들은 발랑 까져 가지고는. 너희가 크게 다친 데 없어서 그냥 넘어가 주는 거야.”
리오넬의 허락이 떨어지자 카일이 기쁘게 나를 돌아보았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어서 나도 모르게 작게 웃고 말았다.
***
내가 검술학부의 담력 훈련에 몰래 끼어든 일은 검술학부 학생회장인 리오넬의 아량으로 문제 되는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란츠가 벌인 소동까지 덮고 지나가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리오넬에게 프란츠를 찍은 영상구를 넘겼다.
카일에게 호감이 있는 그라면 분명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 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내가 지금까지 조사했던, 프란츠가 줄곧 신입생들을 괴롭히고 있었다는 증거들까지 모조리 넘겨 버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카일이 통쾌한 소식을 내게 전해 왔다.
“프란츠는 앞으로 1년 동안 검술학부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됐어.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연무장이랑 비품함 청소를 하게 될 거래.”
사실상 등교 정지 처분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