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휴학을 한다고 하여 그에게 내려진 처벌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언제 복귀하든 남은 11개월의 청소부 생활을 이어 가야만 했다.
이건 내 생각인데 프란츠는 아마 평생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이미 몇 번의 유급으로 또래보다 나이도 많았던 그였다.
그런 와중에 휴학을 하고 도망가기까지 했으니 돌아오게 된다면 함께 수업을 듣는 이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질 터였다.
자기보다 훨씬 어린 애들 사이에서 청소를 해야 하는 굴욕을 과연 프란츠가 견딜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지.’
어쨌든 프란츠가 제 발로 아카데미를 떠나 주었기에 나는 기뻐 춤을 추었다.
의도하지 않은 신고식 후, 이어진 아카데미 생활은 평화롭게 흘러갔다.
스트레스를 주는 상대가 없어진 덕인지 카일의 실력은 위를 향해 무섭게 치고 올라갔다.
그 성취가 얼마나 대단하냐면 저 멀리 수도에서 소문을 들은 티타니아가 매일같이 카일에게 칭찬의 편지를 보내올 정도였다.
듣기로는 티타니아가 사교 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그렇게 아들 자랑을 하고 다닌다고 하지.
‘호호, 전부 제 교육 덕분 아니겠나요? 여러분도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자식을 훌륭하게 키울 수 있는 지 알려 주겠어요.’
공로는 전부 자신의 몫으로 돌리면서 말이다.
정말이지 굉장히 못마땅했다. 티타니아가 카일에게 선사한 것이라곤 폭력뿐이다. 교육은 무슨!
나는 혹시라도 카일이 티타니아가 보낸 편지를 받고 그녀를 용서할까 걱정했다.
어린 나이부터 학대를 받아 온 아이들은 보통 부모를 미워하면서도 동시에 애정을 갈구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티타니아는 원작을 비추어 보았을 때 갱생할 여지가 없는 인물이었다.
물론 카일이 변한 것처럼 그녀 역시 변했을 수도 있지만….
느낌으로는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네.
하지만 내 걱정과 달리 카일은 티타니아가 보낸 편지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카일러스, 네 앞으로 편지가 왔어.”
“그렇구나. 가져다줘서 고마워, 데릭.”
그저 매달 날아오는 공과금 고지서를 보는 사람 같았달까….
오히려 카일은 내가 수고했다고 한마디 할 때 더 기뻐했다.
카일의 마음이 티타니아에게 묶여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우리가 2학년으로 올라갔을 때에는 마침내 래스턴 남작가와 공동으로 개발하기로 한 광산의 채굴이 시작되었다.
항상 전량 국외에서 수입하던 이트넘을 제국 내에서 조달할 수 있게 되면서 마검의 공급 역시 활발해졌다.
다니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가문의 재정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하면서 래스턴 남작 부인도 지병 치료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번에 집에 가니까 엄마가 침대에서 일어나 있었어. 엄마랑 같이 산책한 건 5년 만이야…!”
방학 때마다 집에 다녀온 다니엘이 활짝 웃으며 병의 차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귀엽던지.
보는 사람이 다 뿌듯해지는 광경이었다.
다니엘이 항상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다르게 카일은 주로 나와 함께 방학을 보냈다.
“그래도 황궁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야.”
카일의 의견을 존중해 우리는 대개 로시에르 저택으로 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예 다른 지역에 있는 별장에서 머물렀다.
아무래도 수도로 돌아가면 황궁에 얼굴을 비치긴 해야 해서 말이지.
게다가 카일이 로시에르 저택에만 머물고 있으면 이런저런 소문이 나기도 하고.
별장에는 오로지 우리 가족들과 저택을 관리하는 일부 사용인들만이 있었기에 카일은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피해 방학을 즐길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내 학업 성적에 대해서도 말할 수밖에 없으려나….
내가 선택한 전공인 고대어는 생각보다 많은 분야의 근간이 되는 학문이었다.
마법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신기한 건 검술조차도 고대어와 연관이 있더라.
제국의 건국자이자 소드 마스터였던 초대 황제가 고대어가 적힌 비석을 보고 오러의 근원을 깨달았다고 하니 말이다.
다만 전설과 다름없는 이야기여서 실제 그 비석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내 아카데미 성적은 어땠냐고?
- 비비안! 이번에도 학년 진급에 성공했구나. 정말 잘했어. 수고했다!
아빠가 편지를 통해 보인 반응으로 내 답을 대체하겠다.
나는 고대어를 공부하며 내 신체와 마력이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애썼다.
아직까지 유의미한 발견은 없지만….
첫술에 배부를 순 없겠지.
그렇게 7년이란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어느덧 우리 모두 열여덟 살이 되었다.
***
처음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는 졸업까지 남은 시간이 참 막막하게도 느껴졌다.
무려 아카데미를 8년이나 다니며 공부를 해야 하다니…!
당연한 말이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습량 역시 많아졌다.
교수님 공식 인증 고대어 인재인 나조차도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를 해야 할 정도로.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졸업은 해야 하지 않겠어?
다만 지금 나는 도서관 대신 정원 한쪽 구석에 앉아 이곳을 빠져나갈 타이밍만 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 수풀 너머에서 고백의 시간을 갖는 한 쌍의 남녀 때문이다.
“좋아해.”
애교스러운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나는 목소리만으로도 상대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회화과의 플로라 로렌스.
작년 아카데미 퀸이었던 플로라가 틀림없다.
저 비음 섞인 콧소리는 플로라의 전매특허 기술이었으니까.
“좋아해, 카일 이그리트. 나와 사귀자.”
그리고 그 상대가 카일이라는 것도 그리 놀랍지 않았고.
플로라가 카일에게 끈질기게 구애하고 있다는 것은 아카데미 학생들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숱한 남성들의 지지와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아렌느의 퀸이 한 남자에게 목을 매고 있다니.
사랑과 연애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도 한 번쯤은 돌아보게 만드는 주제였다.
“미안.”
그리고 그런 플로라의 고백이 언제나 거절당한다는 사실도 굉장한 관심을 끌었고 말이다.
“고백 다 한 거면 이만 가도 될까?”
“잠깐만. 내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한 건 맞아?”
“맞아. 이미 여러 번이나 말한 거잖아. 미안하다고.”
“그런 것치고 항상 생각도 안 해 보고 바로 대답하잖아! 어째서 싫다는 거야. 내가 예쁘지 않아? 보기도 싫게 생겼어?”
“확대 해석은 하지 마, 로렌스.”
그렇다. 현재 나는 열렬한 사랑 고백을 이어 가는 플로라의 기세에 밀려 얼떨결에 몸을 숨기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저 공부 중에 잠깐 머리도 식힐 겸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을 뿐인데…!
절대로 플로라의 열렬한 사랑 고백을 몰래 훔쳐 들으려 했던 게 아니라고!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두 사람을 힐긋거렸다. 플로라의 정열적인 붉은 머리카락이 시야에 잡혔다.
남자들은 자기들의 여왕에게 사랑을 받는 카일을 질투하며 동시에 부러워했다.
‘감히 여신님의 고백을 거절하다니! 카일러스, 너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플로라는 누가 봐도 예쁘게 생긴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활짝 핀 장미처럼 화려한 외모와 육감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괜히 남학생들이 폴로라를 여신이라 칭하며 열광하는 게 아니었다.
‘카일, 왜 플로라의 고백을 받아 주지 않는 거야?’
언젠가 카일에게 직접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얼굴 예쁘지, 성격은 조금 여왕님 같긴 하지만 그래도 카일에게는 절절매는 편이지.
다른 사람들의 말대로 굳이 플로라의 고백을 거절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내 질문에 카일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걔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혹시 다른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야?’
그리고 이어진 질문에는 당황스럽다는 낯을 했다.
카일은 끝내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여자 주인공인 시에나를 떠올렸을 것이다.
역시 카일의 마음을 처음으로 여는 사람은 여자 주인공인 시에나뿐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하지만 7년간의 아카데미 생활은 내 머릿속에서 원작의 존재를 지워 버렸다.
솔직히 말해 고학년으로 넘어가고 난 후부터는 공부를 따라가기도 벅차서 카일이 미래에 누구랑 결혼할지 같은 걸 생각할 시간이 없었어.
‘그보다 도대체 언제 나갈 수 있는 거람.’
등을 구부리고 한껏 몸을 숙인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카일과 플로라의 대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제대로 된 대답을 듣고 싶어. 어째서 항상 날 거절하는 거야?”
대화라고 하기에는 플로라의 일방적인 질문 폭격이었지만.
“휴,”
어쩐지 오늘은 더 공부하기 그른 것 같은데.
이미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도 전부 사라져 버렸고.
나는 도서관에 돌아가려던 생각을 때려치우고 자리에 편하게 앉았다. 주머니를 뒤지니 며칠 전 다니엘이 준 제비꽃 사탕이 나왔다.
입이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후회할 거야, 카일러스 이그리트!”
설탕 결정을 입에 넣고 굴리기를 한참, 마침내 길고 긴 플로라의 고백이 끝났다.
타다닥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플로라의 것이다.
나는 카일도 떠나면 일어설 요량으로 얌전히 기다렸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