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님 밀지 말고 당기세요 (35)화 (36/112)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 아렌느 아카데미 축제의 백미, 검술 대회 결승전의 두 주인공을 모시겠습니다!”

“와아아!”

잠시 뒤, 기다리던 메인이벤트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무대 위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카일의 얼굴이 보였다. 그동안 잘 먹고 잘 살았는지 때깔이 곱다.

에휴. 그래도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고.

나는 무대에 선 카일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카일! 화이팅!”

내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카일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카일에게 나는 활짝 웃어 주었다.

그런데 카일이 입가를 꿈틀대더니 그대로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

나는 당황스러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방금 카일이 보인 행동은 명백한 무시였기 때문이다.

설마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거야?

“자, 그럼 시작합니다!”

황당함에 정신이 아득해진 사이 결투가 시작되었다.

카일이 고개를 까딱였다.

“먼저 와.”

카일이 검술제 5연속 우승자로서 상대를 배려했다.

하지만 카일의 태도에 오히려 열이 받은 상대가 이마에 힘줄이 돋은 채로 으르렁거렸다.

“거드름 피우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카일러스.”

그러고는 검날을 매섭게 치켜들며 카일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챙-!

상대가 휘두른 검이 카일이 들어 올린 검날에 막혀 쇳소리를 내었다.

과연 결승전답게 상대의 검술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흐릿하기는 해도 오러의 형태가 칼날에 맺혀 있었다.

하지만-.

카앙-! 캉!

그것이 카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카일이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드러난 상대의 왼편을 향해 물 흐르듯 칼날을 베어 내었다.

사각-.

상대가 아슬아슬하게 카일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그의 옷자락은 카일의 검격에 이미 잘려 나간 후였다. 카일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이… 카일러스!”

흥분한 상대가 카일에게 달려들었다.

상대의 칼날이 매서운 기운을 흘리며 깊숙이 쇄도했다.

카일의 움직임은 물과 같았다. 그는 최소한의 발걸음으로 춤추듯이 상대의 공격을 피했다.

상대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지 않고 칼날을 이용해 흘리듯 쓸려 보냈다. 매우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이건 뭐 거의 압도적이네.”

“에르킨을 갖고 노는 것 같아 보이는데?”

“아무튼 대단하다, 카일러스.”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수련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 검술학부 학생들인 것 같았다.

카일은 가르침을 내려 주는 스승처럼 한동안 상대의 움직임을 받아 주었다.

“헉, 허억.”

지쳐 버린 상대가 숨을 몰아쉴 때까지 말이다.

오러를 운용하는 것은 엄청난 집중력을 필요로 했다.

그러니 아직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이가 무리해서 오러를 운용하려 하면 쉽게 지치는 것도 당연했다.

반면 카일은 지금까지 오러를 꺼내지조차 않고 있었다.

“후.”

카일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곧 그가 자세를 잡고 검을 들어 올렸다.

“잘 봐.”

그의 검신을 짙은 푸른색의 기운이 단단히 감싸기 시작했다. 어설프게 흉내 낸 오러가 아닌 진짜 오러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경외감이 들게 하는 기운이었다.

푸른색의 오러는 거대한 해일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달려온 상대에 의해 두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챙강-.

보잘것없는 검은 거대한 해일을 견뎌 내지 못하고 두 동강이 나 부러졌다.

상대가 카일의 발치에 무너졌다. 카일이 상대의 목에 닿았던 검을 갈무리하며 읊조렸다.

“수고했어.”

부정할 바 없는 카일의 완벽한 승리였다.

“우, 우와아아!”

열광한 사람들의 환호성이 무대를 둘러싸고 쏟아졌다.

“역시! 올해에도 이변은 없었습니다! 승자는 카일러스 이그리트입니다!”

“카일러스! 카일러스!”

“우와아아! 최고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카일이 멋있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행동에 따라 주변의 환호성이 더 짙어졌다.

“대단합니다! 이로써 우리의 5관왕이 6관왕을 차지하며 우승하였습니다! 최선을 다한 에르킨에게도 모두 박수 부탁드립니다!”

“역시 대단해!”

“하. 나도 카일처럼 오러를 이끌어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즐겁게 카일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 속에는 축하와 부러움, 동경의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반면에 나는 조금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올해도 카일이 챔피언의 자리를 가져간 것은 누구보다도 기뻤다.

하지만 동시에 시합이 시작되기 전 카일이 날 무시했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카일을 빤히 바라보았다. 거의 노려본 것에 가까웠다.

결 좋은 얼굴이 노을을 조명으로 삼기라도 한 것인지 반짝였다.

분명 내 시선이 따가울 텐데 카일은 끝까지 내 쪽은 바라보지 않았다.

카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날 계속 그렇게 무시하려고?

“카일러스! 카일러스!”

“앗.”

그때 주변에 있던 학생이 자리에서 콩콩 뛰며 열광하다가 내 어깨를 찧었다.

카일에게 치이고 사람들에게 치이니 흐를 듯 말 듯 아슬아슬하던 감정이 갑자기 울컥 넘쳐흘렀다.

“좋아. 네 마음대로 해.”

나도 화해하기 싫다는 사람한테 매달리기 싫다고.

휙, 몸을 돌려 무대에서 멀어졌다. 내 발걸음이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헬리노아가 만들었다는 거울이 있는 <진실의 탑>.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내 운명의 짝이나 찾아서 잘 먹고 잘 살 테다.

***

카일에게는 기이한 믿음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비비안은 언제나 그의 곁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지만 카일러스의 인생에 있어 비비안은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제 곁에 있었고 다퉈도 돌아왔다.

카일의 이런 믿음을 강화시켰던 것은 일전의 조기 졸업 사건이었다.

그가 소드 익스퍼트가 되면서 조기 졸업을 할 수 있음이 확정되었을 때, 비비안은 크게 우울해했었다.

아카데미에 자신 없이 홀로 남게 되는 것이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내가 비비안과 떨어지기 싫은 만큼, 비비안도 나와 떨어지기 싫어하는구나.

그날은 카일이 난생처음으로 날뛰는 심장 때문에 밤을 새우게 된 날이었을 것이다.

비비안은 날이 갈수록 예뻐졌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곁에 들러붙는 날파리 같은 것들 또한 점점 많아졌다. 예를 들면 다니엘 같은 애들 말이다.

하지만 카일이 여전히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자신이 비비안에게 있어 1순위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대답 안 해 줄 거야?’

‘그게….’

그런데 그 믿음이 비비안이 그에게 숨기는 것이 생겨나면서 금이 가고 말았다.

당혹스러웠고 동시에 위기감이 들었다.

만약 이런 일이 반복되다 결국에 비비안과 멀어지게 되면 어떡하지?

상대가 어색함을 느끼고 도망가지 않도록 천천히 다가가면 된다고?

어떻게 그런 오만한 생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그는 현재 여유를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자신이 느긋하게 행동하는 사이 비비안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아 버렸으니까.

부끄러워 얼굴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며칠 비비안을 피했다. 그러자 이제는 비비안이 카일을 피하기 시작했다.

“카일, 이것 좀 도와줘!”

일이 잘못됐음을 깨닫고 비비안을 만나러 가고자 했지만 검술제 준비로 바쁜 선배들에게 붙들려 실패했다.

축제가 시작되고 예선전에 오를 때마다 무대 밖을 흘끔거렸으나 비비안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결승전에는 와 주겠지.’

검술제가 열리면 언제나 자신을 응원하러 와 주었던 비비안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정말로 결승전이 열린 날, 몰려든 인파 속에서 비비안을 발견했을 때.

카일은 기쁨과 환희를 동시에 느꼈다.

역시 비비안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또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결승전 승부는 순식간에 끝났다. 당연하게도 카일의 승리였다.

어쩌면 비비안이 자신을 보러 와 주었다는 사실에 기뻐 평소 이상의 실력이 나온 것일지도 몰랐다.

“역시! 올해에도 이변은 없었습니다! 승자는 카일러스 이그리트입니다!”

저 멀리서 비비안이 자신을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이 붉어진 것을 들킬 것 같아 휙 고개를 돌렸다.

숨을 고르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이 기쁨을 진정시키고자 애썼다.

“대단합니다! 이로써 우리의 5관왕이 6관왕을 차지하며 우승하였습니다! 최선을 다한 에르킨에게도 모두 박수 부탁드립니다!”

“어?”

하지만 카일이 마침내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또다시 비비안의 부재를 마주해야만 했다.

어디로 간 거지?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거야.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아도 상당히 당황한 상태인 카일을 향해 사회자가 다가왔다.

“카일러스 선배님! 올해로 6연승을 차지하셨습니다! 소감 한번 말씀해 주시죠!”

원래는 이 소감 발표에서 비비안에게 데이트를 청할 생각이었다.

이제 더 이상 안이하게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으니까.

그런데 그 대상인 비비안 로시에르가 사라져 버렸다.

“선배님?”

정말로, 비비안은 내가 없어도 되는 건가?

날 두고 혼자 생활하고 혼자 살아가도 괜찮은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선배님? 소감 한마디 좀….”

“미안. 내가 바빠서.”

“네? 어엇, 선배님!”

깨달음은 늦었고 행동은 빨랐다. 카일러스는 그대로 사라진 비비안을 찾아 무대 밖으로 달려 나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