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에서 내 허벅지의 열기를 식혀 주던 카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 손등에 입을 맞추던 카일도….
나는 조용히 부채로 열을 식혔다.
그날만 떠올리면 자꾸만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옷도 전부 갖춰 입은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홀딱 젖은 상태로 카일과 단둘이 욕실에 있었다니.
누군가 봤으면 빼도 박도 못 하는 스캔들이었다.
그렇잖아.
안 그래도 아카데미에 나란히 입학했다 졸업해 친분을 과시하는 사이인데.
아무도 없는 방에서 둘이 함께 욕실에 있었다니.
과연 은밀한 공간에서 무엇을 했을지에 대한 소문이 돌아도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무도 못 봤으니 망정이지!
나는 치마로 가려진 내 다리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물이 쏟아지긴 했지만 심각한 화상은 아니었기에 상처는 옅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사라졌다.
전부 카일이 제때 응급 처치를 해 주고 연고를 전해 준 덕분이었다.
그거로도 모자라 카일은 내게 시종을 시켜 계속 연고를 보내왔지.
혹시 모르니 제대로 치료를 해야 한다는 걱정 섞인 편지와 함께 말이다.
“후.”
내 부채질이 더 빨라졌다.
나를 아끼는 카일의 마음이 느껴져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헬리오스의 탑 사건 이후 카일과는 연인인 듯, 아닌 듯 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게 벌써 햇수로 2년째다.
처음에는 카일이 내게 고백하는 날까지 기다리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기다릴 수 없게 되었다.
‘카일과 가장 친한 친구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어.’
사춘기 시절 잠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사그라진 연심의 감정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황궁에서 열리는 제국의 건국제는 5일의 긴 일정으로 진행된다.
나와 가족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귀족들이 연회장을 채운 후였다.
제1 황자인 로건 황자와 황비, 그리고 그들의 외척인 그래스린 공작과 공작 부인도 보였다.
그 옆에는 로잘린 황녀도 함께 서 있었는데 뻔뻔스럽게도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픽 하니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작게 이를 갈았다.
모든 일의 원흉은 로잘린 황녀이지만 그녀만큼은 풍파에서 멀어져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모든 것을 참고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넌 내가 꼭 따로 그 빚을 갚아 줄 거야.’
나는 로잘린을 내 마음속 블랙리스트에 당당히 올려 두었다.
1위는 티타니아고 로잘린은 2위다.
마침 내 눈에 티타니아도 들어왔다.
“오호호, 안녕하셨나요. 드메린 백작 부인.”
티타니아는 사람들의 관심이 몰리는 홀의 가장 중앙에서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사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카일은 왜 없지?’
먼저 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회장 안을 둘러봐도 카일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조금 걱정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카일이 이런 장소에 늦을 만한 인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회장의 입구를 흘긋거리며 나는 같은 파벌의 무리에 섞여 들었다.
“오랜만이에요, 로시에르 양. 그간 안녕하셨나요?”
“네. 안녕하세요.”
“어머. 오랜만에 보니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아요.”
모여 있던 영애들이 인사를 해 왔다. 나는 예쁘게 웃으며 적당히 답을 해 주었다.
“그러는 영애도 얼굴에서 빛이 나시는걸요. 이번에 약혼식을 하셨다죠?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아, 저번에 로잘린 황녀 저하의 티 파티에 참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도 결혼식 전에 티 파티를 열 계획이 있는데 참석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물론이죠.”
로잘린 황녀가 여는 파티만 아니라면 내가 열 번도 가 준다.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현재 회장을 둘러싼 분위기를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오늘, 건국제의 시작을 알리며 황제가 오랜만에 귀족들 앞에 모습을 선보인다.
황제는 지금까지 자신의 침실에서 모든 정무를 보아 왔다.
그의 통치력은 변함없이 훌륭했으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니 혹자는 황제의 지병이 전보다 악화된 것은 아니냐는 추측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 맞았다.
원작에서 황제는 카일이 성인이 되고 몇 년 못 가 갑작스레 붕어하게 된다.
그리고 비어 있는 황제의 자리를 두고 정세는 더 혼란스러워진다.
미래를 모르는 귀족들도 불길한 낌새는 느낀 것일까.
“황제 폐하께서는 언제 나오실까요.”
“오늘 폐하께서 하실 말씀이 특별히 더 기대가 됩니다.”
귀족들은 오늘 건국제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맞아 황제가 무언가 중대한 발표를 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아직 비어 있는 황태자 자리를 누가 차지하게 될 것이냐에 관한 것일 것이다.
나는 힐끔 로건 황자 쪽을 훔쳐보았다.
이번 연회는 황후를 필두로 준비되었다고 했다.
황후의 가장 큰 힘은 자신의 친정인 그래스린 공작가이니 사실 공작가가 나서서 준비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래서일까.
로건 황자의 주변에 포진되어 있는 이들의 표정이 아주 의기양양하다.
그들은 벌써부터 자신들의 승리를 점치고 있는 것 같았다.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카일은 어째서 아직도 등장하지 않는 것인지.
내 의문은 시종이 부는 거대한 뿔피리 소리와 함께 해소되었다.
“황제 폐하, 그리고 카일러스 황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카일이 황제의 뒤를 이어 함께 회장에 등장한 것이다.
화려하고 밝은 조명 아래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카일은 누가 뭐래도 남자 주인공 그 자체였다.
검은 머리카락은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겼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같은 푸른 눈동자는 망설임 없이 빛나고 있었다.
장식이 달린 고급스러운 남색 정복은 하얀 피부색과 대비되어 그를 더 돋보이게 했다.
그런데 저건 황태자만 입을 수 있는 정복인데.
‘설마….’
원작에서 건국제 첫날 카일은 미래에 제국을 이끌어 갈 황제의 재목으로서 황태자로 책봉된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는 건 아니었다.
티타니아에게 붙들려 고위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던 와중 갑작스럽게 황제의 선언을 듣게 되는 것이다.
카일조차도 모르는 황제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원작의 카일은 오랜 학대로 자존감이 많이 하락한 상태였다.
그런 그가 황태자의 자리를 받아들인 건, 자라나 꼭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티타니아의 세뇌에 가까운 교육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흘러가는 상황을 보고 있자니 카일이 이미 다가올 미래를 알고 있는 것만 같다.
티타니아에게 휩쓸리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황제가 단상에 올랐다. 그리고 카일이 황제의 바로 아래이자 로건 황자의 반대편에 굳건히 섰다.
여태껏 자신만만하게 굴던 로건 황자와 파벌 귀족들의 얼굴이 묘하게 썩어 갔다.
순간 카일과 눈이 마주쳤다. 작게 눈웃음만 보이고 금세 고개를 돌렸지만.
황제가 근엄하게 축사를 시작했다.
“제국이 건국된 지 387년이 되는 올해, 항상 제국을 위해 분골쇄신하는 그대들이 짐의 곁에 있어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 오늘의 발전된 제국이 있는 것도 모두 그대들의 노력 덕분이겠지.”
귀족들이 황제의 겸양에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병이 들어 오늘 내일 한다 하던데, 황제는 생각보다 정정해 보였다.
한 박자 쉬며 황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짐도 이제는 느낀다. 제국의 발전을 선도하는 이 거대한 흐름을 이끄는 것이 짐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그래, 짐에게도 이제 함께 같은 뜻을 품고 나아갈 사람이 필요하겠구나.”
좌중이 술렁였다. 그들의 예상대로 오늘 마침내 비어 있는 황태자 자리를 차지할 주인공이 밝혀지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당연히 그래스린 공작가를 등에 업고 있는 로건 제1황자가 그 자리에 오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의 한마디가 선언되었다.
“내 뒤를 이어 황제가 될 황태자는 카일러스 아르난 이그리트가 될 것이다.”
순간, 연회장에 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경악스러운 발표에 그 누구도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 못했다.
최근 카일의 위상이 상승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로건 황자의 승리를 점치는 쪽도 많았다.
무능력하다 소문이 난 로건이지만 그래도 그는 황제의 소생 중 첫째이며 황후의 아들이자 그래스린 공작가를 외가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아니나 다를까, 황후의 입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폐하의 장자가 여기에 있습니다. 로건이 여기에 있는데 저 아이를 황태자로 삼으시다뇨!”
“카일러스는 황태자가 되기에 필요한 조건을 모두 만족했소.”
“하, 도대체 무슨 조건 말입니까. 폐하의 마음에 드는 것 말입니까?”
힐난에 가까운 말에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진정하고 위엄을 갖추시오, 황후.”
“지금 제가 진정하길 바라신다면 이런 발표를 하면 안 되셨습니다!”
황제를 향한 황후의 비난을 시작으로 소란이 퍼져 나갔다.
카일러스 전하가 황태자로 책봉되시다니. 아무리 소드 익스퍼트라지만 그래도 혈통의 정통성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황후와 그래스린 공작이 이를 가만히 참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