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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님 밀지 말고 당기세요 (50)화 (51/112)

점점 도떼기시장처럼 변해 가는 회장 분위기에 황제가 분노하려던 찰나였다.

“황후 폐하.”

소란의 중심에서 카일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카일에게 쏠렸다.

그 엄청난 시선 속에서 카일이 당당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제국을 위한 선택을 하셨을 뿐입니다.”

“하! 제국을 위한 선택? 그리 포장하면 된다고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까?”

“황후! 말을 조심하시오!”

“제가 못 할 말을 하였습니까? 저와의 신의를 먼저 저버린 것은 폐하이십니다!”

또다시 황제와 황후 사이에 언쟁이 시작되려 했다. 그때, 카일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저를 황태자로 책봉하신 건 모두 제가 소드 마스터로 각성하였기 때문입니다.”

순간 회장이 조용해졌다.

“…방금 뭐라고 하였습니까.”

“소드 익스퍼트가 아닌 소드 마스터로 각성하였다 말씀드렸습니다.”

카일이 황제를 흘긋 보았다. 무언가 허락을 구하는 얼굴이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일의 손에 오러로 만든 검의 형상이 생겨났다.

일전에 황제의 침실에서 카일이 보인 능력이었다.

“헉!”

“진, 진짜다! 진짜 오러야!”

검에 일가견이 있다는 이들이 곧장 카일의 경지를 눈치채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기함했다. 카일러스 전하가 소드 마스터라고?

제국의 건국 이후 소드 마스터라는 경지에 오른 사람은 단 네 명뿐이었다.

그리고 넷 중 둘은 황족이었는데 한 명은 건국 황제요, 다른 한 명은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13대 황제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황제의 피를 이은 카일이 소드 마스터로 각성하였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사실상 황제의 황태자 발표보다도 더 놀라운 소식이었다.

역사적으로 소드 마스터가 나타난 시기에 제국은 전에 없는 부흥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비비안, 너는 알고 있었어?”

오빠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놀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카일이 소드 마스터라고?’

물론 원작에서 카일은 소드 마스터의 경지까지 올라간다. 언젠가 도달할 경지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일이 소드 마스터가 된 건 그가 마물과의 전쟁에 참여했을 때 발생한 일이었다.

게다가 걸리는 건 또 하나 있었다.

‘왜 나한테는 비밀로 한 거지?’

카일이 자신이 소드 마스터로 각성하였다는 사실을 내게 비밀로 하고 숨겼다.

다른 사람도 아닌 무려 나한테 말이다!

‘나한테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걸까.’

순간 섭섭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그간 나는 카일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라는 데 은근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사실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니….

모두가 혼란에 빠진 그때였다.

짝짝.

“경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그리고 카일러스 황태자 전하.”

작지만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느릿한 박수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가. 사람들이 시선을 돌렸고 곧 다시 한번 기함했다.

“신전의 대주교잖아!”

“대주교가 왔다고?”

“같이 있는 저 사람은 누구지?”

긴 은발을 뒤로 느슨하게 묶고 단정한 사제복을 입은 대주교의 옆에 키가 작은 한 사람이 로브로 얼굴을 가린 채 서 있었다.

어찌나 꼼꼼히 가렸는지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상대가 누군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저 사람은 분명…!

두 사람이 뚜벅뚜벅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황제의 앞에 도달했을 때, 상대가 모습을 가리던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성녀 시에나,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마침내 원작의 시계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건국제를 기념하기 위해 화려하게 꾸민 연회장의 조명이 시에나를 밝혔다.

시에나가 걸친 것은 수수하기만 한 하얀 로브가 전부였다.

귀족 아가씨들처럼 값비싼 드레스를 입은 것도, 휘황찬란한 보석을 몸에 걸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회장 내의 모든 이들이 지금 이 순간 시에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존재감에 압도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시에나다.

시에나를 마주하는 건 어릴 적 우연히 마주친 이후로 8년 만이었다.

내 기억 속의 시에나는 귀여웠지만 명백한 거리의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좋은 교육을 받고 귀하게 자란 아가씨처럼 우아하며 아름다웠다.

나는 고개를 돌려 카일을 확인했다.

카일 역시 시선 하나 흘리지 않고 집중한 채 시에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이 세상에 시에나와 카일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잡았다. 갑자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해졌다.

원작에서 카일은 바로 이 순간, 시에나에게 첫눈에 반하게 된다.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발전했고 소설 속 주인공답게 밀려오는 역경을 함께 헤쳐 나갔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서는 로맨스 소설의 마무리답게 결혼식을 치르며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

만약 카일도 원작의 이야기처럼 시에나와 갑자기 사랑에 빠지게 되면 어떡하지?

원작의 힘이라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

‘하지만 카일은 날 좋아하는걸.’

그리고 나도 카일에게 호감이 있다.

비록 카일이 나한테 정식으로 연인 관계가 되자고 말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게다가 카일은 내게 자신이 소드 마스터로 각성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지.

순간 머릿속이 증기로 가득 찬 것처럼 뜨거워졌다. 제대로 된 생각이 굴러가지 않았다.

저 짧은 순간 오고 가는 시선 속에 어떤 생각이 흐르고 있을까.

황제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성녀라고? 대주교, 지금 저 아이가 성녀라고 말한 것이 사실인가?”

“예, 폐하. 시에나는 틀림없는 신의 사제가 맞습니다. 주신 유피테르 님의 성흔을 확인하였습니다. 시에나.”

“예, 대주교님.”

대주교의 부름에 시에나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중지에 낀 반지와 연결된 흰 천을 풀었다.

“헉.”

“저 문양을 보세요.”

어릴 적 기억보다도 더 진하고 복잡해진 손등의 문양이 멀리서도 눈에 들어왔다.

시에나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 주신 유피테르의 은총이 제국의 영광과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동시에 황제와 카일의 주변으로 황금빛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마법사들이 내뿜는 마력과는 다른 봄바람처럼 따스하고 다정한 기운이었다.

성력이었다.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황금빛 빛무리는 곧 불꽃놀이처럼 잘게 터지며 산화했다.

황제가 짐짓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자신의 손을 쥐었다 풀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군. 그대의 힘인가?”

“소녀는 그저 신의 대리인일 뿐, 모든 은총의 기원은 주신 유피테르이십니다.”

시에나가 한 손을 가슴에 올리고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겸손하지만 당당한 모습이었다.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 자신의 수염을 쓸었다.

“성녀라. 성녀가 등장한 건 거의 백 년 만의 일 아닌가.”

“예.”

“경사로운 일이군. 소드 마스터인 내 아들과 그에 맞춰 탄생한 성녀라니! 대주교, 오늘 건국제에 참석한 것도 그 때문인가?”

“맞습니다, 폐하.”

제국의 역사상 마지막 성녀의 기록은 백여 년 전으로 끝나 있다.

과거 제국은 흑마술을 추종하는 이들에 의해 존폐의 위기에 섰던 적이 있었다.

흑마술사들이 인간을 제물로 삼아 마물을 만들고 이를 조종해 제국의 영토를 공격한 것이다.

당대 최고의 검사라 불리던 이들이 전투에 참여하고 마법사들 또한 참전했으나 어둠에 영혼을 판 흑마술사들의 진격 속도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때, 가장 낮은 곳에서 성녀 라르네가 기적처럼 나타났다.

주신 유피테르의 대리인인 성녀는 제게 주어진 힘을 이용해 힘없는 이들을 보호했다.

마물의 몸에 갇혀 있는 희생자들의 영혼을 구제하고 흑마술로 인해 죽어 버린 땅을 정화했다.

그 기세를 잡아 제국의 기사들도 반격을 시도했다.

결국 몰락할 위기에 처했던 제국은 성녀의 가호하에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이미 백 년도 전에 끝난 이야기.

라르네가 주신의 곁으로 돌아간 이후로 신의 힘을 구현할 수 있는 성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신성력이 사라지니 신전의 힘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이들이 속세와 결합하기 시작하면서 신전은 내부적으로 빠르게 부패하였다.

대주교는 속세와 결합한 신관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대주교, 폐하께 알현을 신청하고 싶습니다.”

“좋네. 짐 역시 오랜만에 그대를 보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황제가 카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태자, 이제부터 짐이 부재할 때에는 태자가 짐의 대리인이 되어 행동해야 한다. 내 대주교와 이야기를 하고 오는 동안 연회를 잘 이끌고 있거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황제 폐하. 심려치 마십시오.”

황제가 흡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대주교와 함께 연회장의 뒤쪽에 연결된 통로로 사라져 버렸다.

황권과 신권, 두 권력을 대표하는 이들이 사라진 연회장은 그야말로 혼돈의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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