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에 빠져 젖어버린 흰색 셔츠 너머로 붉은 자국이 보이고 있었다.
비록 카일이 나를 감싸다 분수대에 빠지긴 했어도 어딘가에 크게 몸을 부딪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이 붉은 자국이 알려주는 바는 명백했다.
“티타니아지?”
나는 이를 아득 갈았다.
어째서 8년이나 지난 지금도 똑같은 상황을 마주해야 하는 것인지!
카일은 이제 황태자다. 티타니아가 그토록 원하던 황태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런데 아직도 이딴 짓을 저지른다고?
나는 방금까지 우리에게 있었던 일도 잊고 화를 냈다.
“티타니아가 그런 거 맞지? 저주받을 티타니아! 도대체 어째서 이러는 건데!”
“내가 전투에 나간다고 했거든.”
“뭐? 어디를 나가?”
“전투.”
순간 나는 할 말을 잊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나와 카일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분수대에서 끊임없이 물이 쏟아지는 소리만이 주변을 채웠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전투에 나간다고.”
“전투라니. 지금 제국은 분쟁을 겪고 있는 국가가 없잖아.”
그런데 무슨 전투를 말하는 거지?
나는 재빨리 내 기억을 더듬었다.
원작에서 카일이 전투라고 칭할 만한 유일한 사건이 있었다면 그건….
“설마 국경 지역에 가려는 거야?”
제국 국경 지방을 중심으로 늘어나는 마물을 소탕하기 위한 싸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원작에서 마물 토벌은 2년이나 후에 벌어지는 일이었는데.
벌써부터 카일이 참여해야 하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설마 이것도 카일이 황제에게 먼저 제안한 걸까?
카일에게 재차 질문하려는 순간이었다.
“비비안? 분명 큰 소리가 들렸는데.”
저벅저벅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겁하며 눈을 굴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니엘이었다.
그리고 그때, 거대한 나무 너머로 다니엘이 시에나와 함께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를 발견한 다니엘이 크게 놀라며 다가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비비안, 카일! 괜찮아?”
나는 우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수대가 계속해서 뿜어내는 물에 입고 있는 드레스가 전부 젖어 있었고 카일이 꺼낸 토벌 이야기가 신경 쓰였지만 지금 당장은 카일의 상처가 보이지 않게 가리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다니엘은 우리의 친구이지만 그래도 황태자의 몸에 난 상처는 아무에게나 밝힐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나는 내 젖은 드레스로 카일의 등을 덮으며 외쳤다.
“괜찮아! 그보다 다니엘, 혹시 시종에게 부탁해서 수건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너무 많이 젖어서 나갈 수가 없어.”
“수건?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내 부탁을 들은 다니엘이 곧장 몸을 돌려 시종들이 있을 곳으로 달려나갔다. 정원을 꽤나 깊게 들어왔으니 돌아오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홀로 남은 시에나는 안절부절 못 하며 나와 카일을 살폈다. 나는 시에나를 불렀다.
“시에나 님!”
“네, 네!”
“황태자 전하를 도와주세요.”
“비비, 너 지금 무슨…!”
카일이 창백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렇다. 나는 지금 시에나에게 카일의 상처를 보여주고 그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시에나의 성력이라면 카일을 치료할 수 있을 테니까.
카일이 시에나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성녀님. 성녀님께서 저를 도와주셔야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에요. 이건 시에나 님 말고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어요.”
“비비, 왜 그래. 이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제가 비밀로 해야 하는 무언가인거죠.”
시에나가 눈치 빠르게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나에게는 밝히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카일이 나를 아주 조금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이것만큼은 나도 물러날 수 없었다.
“주신 유피테르님께 맹세합니다. 오늘 여기서 본 것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어요.”
시에나가 경건하게 맹세를 했다. 성녀로서 절대 거스를 수 없는 법칙과도 같은 맹세였다.
시에나가 신까지 걸며 맹세를 하니 카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녀의 접근을 거부하지 못했다.
시에나가 나와 카일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곧 카일의 등에 난 상처를 본 시에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게 도대체…!”
“시에나 님은 도와주실 수 있죠?”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시에나에게 물었다. 상처에 고정된 시에나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곧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부탁드려요.”
다니엘은 단순히 수건만 들고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와 카일이 모두 분수에 빠졌으니 분명 우리를 도와줄 시종들도 함께 대동하고 오겠지.
하지만 카일의 상처는 시종들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 상처를 전부 낫게 한다면 좋겠지만 적어도 물에 젖은 셔츠 너머로 붉은 기가 보이지만 않게라도 만들어야 했다.
시에나가 중지에 낀 반지와 연결되어 손등을 덮고 있는 천을 풀었다.
그러자 그녀가 성녀라는 증거, 과거에는 저주 받았다고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았던 증거인 성녀의 문양이 나타났다.
시에나가 카일의 등에 제 손을 포개고 눈을 감았다.
작은 입으로 어떤 기도문을 외우자 시에나의 손에서 한 줄기 황금빛이 흘러나왔다.
하늘하늘 날아오른 황금빛 줄기는 상처난 곳을 꿰매는 실처럼 카일의 상처를 봉합하기 시작했다.
“윽.”
카일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카일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또르륵 흘렀다.
하지만 그만큼 시에나의 성력은 확실했다.
그의 등에 난 상처들이 타오르는 종잇조각처럼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에….”
경이로운 광경을 눈앞에서 직접 보게된 나는 그저 감탄했다.
시에나는 마치 카일에게 상처가 있었다는 흔적 자체를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상처에 약을 발라 새 살이 나도록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상처를 입기 전,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단순히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경지라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하아.”
이를 증명하듯이 어느덧 시에나의 얼굴에도 힘겨운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얼굴이 붉어지고 호흡이 가빠진다. 하지만 그만큼 카일의 상처 역시 확실히 사라지고 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치료를 받으면 카일의 상처가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을 텐데.
시에나를 멈춰야 하는지 망설이는 순간이었다.
“아이고, 전하!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저 멀리서 달려오는 시종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에나가 황급히 손을 떼고 카일도 몸을 일으켰다.
나는 다급히 카일의 등을 살폈다. 놀랍게도 물에 젖은 흰 셔츠 너머로 보이던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옅어져 있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시종이 카일에게 커다란 수건을 덮어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괜찮네.”
“잘못하시면 고뿔에 걸리실 수도 있습니다. 어서 의복을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시종이 호들갑을 떨며 카일을 재촉했다. 이야기를 하다 끊겼던 카일은 나를 향해 못내 아쉬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더 대화를 지속할 수는 없었다.
결국 카일이 시종을 따라 먼저 자리를 비웠다.
“휴….”
일단은 무사히 넘어간 것 같지?
카일의 상처를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는데 성공했다는 생각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에나가 알게 되긴 했지만 시에나는 예외에 가까우니까….
나는 내 옆에서 색색거리며 호흡하는 시에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에나 님, 고마워요.”
“처, 천만에요!”
시에나가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쳤다. 그러더니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가 비비안 님께 도움이 되어 기뻐요.”
“아가씨, 아가씨께서도 옷을 갈아입으러 가시지요.”
카일과 마찬가지로 홀딱 젖은 나에게 황궁의 시녀가 다가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건네준 수건을 받았다.
그러나 시녀를 따라 떠나기 전 우뚝 멈춰섰다. 그러고는 시에나에게로 돌아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발개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시에나에게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고 진심으로 속삭였다.
“제가 곧 다시 찾아뵐게요.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시에나 님.”
“네, 네! 기다릴게요!”
“아가씨, 이쪽으로 오시죠.”
나는 시녀가 안내하는 바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문득 내 시야에 불안한 얼굴로 서성이는 티타니아가 들어왔다.
티타니아는 지금 카일이 다쳤을까 불안해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낸 상처를 들킬까 불안해 하는 것일까.
나는 무조건 후자일 것이라 보았다.
까득.
나는 이를 갈았다.
감히 카일에게 또다시 손찌검을 해?
이번에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