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질렀다.
저질러 버렸다.
나는 처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기분으로 시에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시에나는 처음에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곧 제 눈꼬리를 초승달처럼 휘며 부드럽게 웃었다.
방금 몇 시간 동안 그녀가 보여 준 천진난만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자애로운 분위기의 미소였다.
시에나가 내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올리며 말했다.
“비비안 님.”
“네.”
“저는 항상 비비안 님의 편이에요. 이 점을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잠시 말을 잊었다. 시에나의 말은 마치 내게 마음의 자유를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입을 달싹이던 내가 겨우 물었다.
“왜 제게 잘해 주세요? 저는 시에나 님께 특별히 무언가를 해 드린 게 없는 것 같은데….”
“오늘만 해도 제게 많은 선물을 주셨잖아요?”
“하지만 이건 그저….”
“그리고 비비안 님은 제게 특별한 분이시니까요.”
시에나가 싱긋 웃었다. 곧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손에서 은빛의 기운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내 손등을 감싸 안는 따스한 온기는 내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었다.
“저는 비비안 님에게 호의를 가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비비안 님은 제 호의를 마음껏 누리시면 돼요.”
시에나는 그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라는 것처럼 말했다.
“시에나 님, 사실은요….”
결국 감정이 흘러넘친 나는 그녀에게 카일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내가 카일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전부 고백하고 말았다.
시에나는 내 말을 하나도 흘리는 것 없이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확실히 시에나는 성녀였다.
***
시에나 앞에서 고해 성사 아닌 고해 성사를 하고 나니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낯부끄러워졌지만 속은 시원해졌다.
왠지 기진맥진해져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아이스티만 마시고 있으니 시에나가 쿡쿡 웃었다.
나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비비안 님도 이런 고민을 하시는구나, 해서요.”
시에나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내 쪽으로 아직 손대지 않은 케이크를 밀어 주었다.
“제게는 비비안 님이 유피테르 님처럼 큰 분으로 느껴지거든요.”
시에나가 과분한 칭찬을 했다.
신과 비유될 정도라니.
나는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심지어 카일과 시에나 사이를 두고 약간 질투하기까지 했다고.
나는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시에나 님은 저를 너무 띄워 주세요.”
“하지만 정말인걸요. 비비안 님과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시에나가 나를 향해 무한한 호의를 보였다.
저 호의의 근원이 무엇인지 도통 짐작이 되지 않았다.
원작에서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비비안은 여자 주인공인 시에나와 그럴듯한 접점이 없었는데.
그리고 그건 이번 생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시에나 님은 제 어디가 좋아서 이렇게 잘해 주세요?”
말을 내뱉고 보니 애인에게 자신의 어디에 반했는지 물어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으나 시에나는 개의치 않아 했다.
그녀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비비안 님께는 유피테르 님과 비슷한 기운이 흐르고요. 무엇보다도 저는 비비안 님께 큰 은혜를 입었거든요.”
“네? 시에나 님이 저한테요?”
“헤헤, 어쨌든 제가 비비안 님을 도와 드릴게요!”
시에나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녀는 내 고해 성사를 들은 이후 줄곧 신이 나 있었다.
시에나가 조막만 한 주먹을 불끈 쥐며 굳센 의지를 보였다.
“우선 황태자 전하께도 비비안 님의 마음을 전하는 거예요! 제가 생각했을 때 황태자 전하도 비비안 님께 분명 마음이 있으니 받아 주실 거예요.”
“안 돼요.”
“네? 왜요? 아아, 알겠어요.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그러면 비비안 님이 아닌 황태자 전하께서 먼저 고백하실 수 있도록 제가 유피테르 님께 기도를 올려 볼까요?”
“그게 아니라….”
나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
카일이 내게 먼저 고백하도록 주신께 기도를 올려 보겠다니.
시에나의 신성력을 이런 곳에 써도 되는 것인가.
“전하께서 지금 바쁘셔서 만날 수가 없어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바쁘대요. 아빠 말로는 잠도 거의 못 자고 일하는 것 같다고 했었으니까요.”
“우움.”
“게다가 지금 황궁에서는 대신과 기사 외의 외부인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더라고요.”
“아. 그건 아마 열흘 후에 있을 제사 때문일 거예요.”
제사라고? 나는 시에나의 말에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열흘 후에 북쪽의 피테 산에서 유피테르 님께 올리는 제사가 하나 열려요. 저희 신관들이 주관하고 황제 폐하와 황족들이 참여하는 큰 제사예요.”
시에나가 내게 말해 주는 것들은 원작을 아는 나도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런 게 있었나?
“몸을 정갈히 해야 한다고 하여 2주간 외부인과의 만남을 최소화하는 것이 규칙이거든요. 피테 산의 제사는 귀족분들은 제외하고 오로지 황족분들이 주체가 되어 진행되는 제사라….”
“그러면 앞으로 열흘은 카일, 아니 황태자 전하를 보지 못한다는 건가요?”
“네, 그렇죠….”
시에나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나 역시 시에나만큼이나 시무룩해졌다.
그런데 잠시 뒤, 시에나가 갑자기 의견을 내었다.
“비비안 님! 혹시 이건 어떠세요?”
“네? 무엇을….”
“비비안 님께서 저를 보필해 주시는 견습 신관으로서 함께 가시는 거예요! 그리고 피테 산에서 황태자 전하를 만나는 거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게 가능해?
“괜찮은 거예요?”
“네! 원래 타샤 님 외에도 몇 분 더 그 역할로 가게 되어 있었거든요. 충분히 가능해요.”
“하지만 아까 귀족들은 참여하지 못한다고….”
“그렇긴 하지만 비비안 님은 그냥 귀족이 아닌걸요. 엄청난 금액을 신전에 기부해 주신 신실한 신자님이시죠. 로시에르는 꾸준히 저희 유피테르교에 기부를 해 오셨고요. 그 누구도 비비안 님만큼 신실하지는 못하실 거예요!”
그건 그저 신전에 드나들기 편해지려고 했던 기부였는데.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되네…?
“저만 믿으세요, 비비안 님!”
시에나가 의욕을 활활 불태웠다. 그녀는 매우 적극적으로 날 도와주려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내가 감동을 받기도 잠시.
“제가 아슬란 님께 꼭 허락을 받아 올게요!”
“대주교님이요?”
“네!”
시에나가 던진 순진한 발언에 정신을 차렸다.
아까 변장한 시에나를 끌고 신전에서 나올 때 마주쳤던 대주교는 나를 붙잡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봤었지.
어쩌면 내 뒤에 서 있던 사람이 시에나였다는 걸 알면서도 눈감아 준 건 아닐까?
그러면 나 이미 조금 찍힌 거 아냐?
“시에나 님! 저희 이제 그만 돌아가요.”
“네?”
“다음에 또 나오고요. 얼른요!”
나는 다급한 마음에 서둘러 시에나를 챙겨 신전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부디 리사가 메소드급 연기를 펼치고 있어야 할 텐데!
내 희망은 너뿐이야, 리사!
***
아주 다행스럽게도 신전에서 사라진 시에나를 찾는 대소동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흐어엉, 아가씨. 왜 이제 오셨어요!”
내가 도착했을 때 리사는 긴장하다 못해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리사를 챙겨 신전을 빠져나갔고 시에나도 다시 옷을 갈아입고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물론 나는 신전을 떠나기 전에 호탕한 기부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후로는 저택에서 얌전히 내 할 일을 하며 시에나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타샤에게 붙일 사람을 구했고 블루윙에서 일할 연구원들의 면접도 보았다.
그러자 금방 시간이 지나 내게 기쁜 소식이 도착했다.
나를 특별 신도로서 피테 산에 데려갈 수 있게 되었다는 시에나의 편지였다.
“됐어!”
나는 기쁨의 쾌재를 불렀다.
처음에 시에나가 말했던 견습 신관이 아닌 특별 신도로서의 참석인 것을 보면 시에나는 애초에 아슬란에게 나를 함께 데려가고 싶다고 솔직히 말하고 참석을 부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며칠 후 신전의 이름으로 정식 초대장이 도착했다.
이제 곧 카일을 만날 수 있다.
그 사실이 나를 기쁘게 했다.
***
피테 산으로 떠나는 날의 하늘은 매우 맑았다.
내가 갑자기 신전으로부터 초대를 받자 부모님은 깜짝 놀라셨다. 하지만 곧 굉장한 영예라며 나보다 더 기뻐하셨다.
귀족들은 절대로 참여할 수 없는 행사인데 그곳에 내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물론 나는 어디까지나 시에나의 부탁으로 예외적으로 참여하는 것이기에 지켜야 할 규칙이 있었다.
우선 피테 산에서 단독 행동은 절대 불가했다. 성녀를 보필하기 위해 참석한 만큼 내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건 뭐,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지급된 사제복을 완벽하게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는 규칙은 조금 불만족스러웠다. 로브에 달린 모자까지 쓰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모자를 쓰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 그 탓에 나는 종종 앞서서 걸어가던 사람과 부딪쳐야만 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오늘 오후에 도착하실 거예요.”
시에나는 내게 행사의 대략적인 일정을 귀띔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