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은 내 몸과 발목을 묶은 밧줄도 풀어 주었다.
꽉 묶여 있던 밧줄이 풀리자 몸에 피가 돌며 찌릿찌릿해졌다.
탈진하기 직전이었던 나는 힘이 빠져 그대로 카일의 품 안에 쓰러졌다.
곧장 기절할 것 같았지만 카일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카일, 타샤가….”
견습 신관인 타샤가 이 모든 짓을 저질렀다. 그리고 타샤는 나를 이곳에 마물과 함께 버려둔 채 자리를 떠나 버렸다.
“성녀님 곁에 타샤라는 신관이 하나 있었어. 그 신관이 마물을….”
“그 사람은 지금 당장 신경 쓰지 마. 네 상태가 먼저니까.”
카일이 단호하게 내 말을 끊었다.
어쩐지 상대가 화가 난 것처럼 느껴져 나는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러자 이를 눈치챈 카일이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네게 화낼 일이 아닌데.”
하지만 카일의 얼굴은 여전히 잔뜩 찌푸린 상태이다. 시선 역시 내 손과 몸에 남은 상처에 머물러 있다.
나는 내 몸을 껴안은 카일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일이 손에 힘을 주어 나를 잡았다.
“너를 잃는 줄 알았어, 비비.”
애끓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대로 널 잃어버리는 줄로만 알고…. 만약 네게 무슨 일이 생겼더라면 나는 아마 평생 스스로를….”
“카일.”
“어째서 피테 산에 온 거야.”
카일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여긴 네가 올 데가 아니잖아. 이 성녀복은 또 뭐고. 지금 네가 어떤 일을 당할 뻔한 건지 알아?”
“왜 내 탓을 하는 거야…?”
카일이 나를 나무라자 갑자기 서러움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땅에 쓸려 생긴 상처가 더 아프게 느껴졌다.
“전부 내 잘못이라는 거야?”
“비비.”
“황족이 참여하는 행사만큼 안전한 곳도 없는데. 왜 사고가 난 게 내 잘못이라는 것처럼 말해? 카일은 오늘 이런 일이 발생할 거라는 걸 알았어?”
나는 그저 카일을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카일이 나를 피하니까, 이렇게 시에나의 도움을 받아 움직이는 것 외에는 전혀 방법이 없었다.
“비비, 그런 말이 아니잖아.”
“나는 신전에서 정식으로 초대받고 온 거야. 몰래 침입한 게 아니란 말이야. 물론 카일은 몰랐겠지. 내가 전혀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내가 왜 카일에게 말해 주지 않았던 것일지 생각해 봤어?”
나는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서러움에 또 눈물이 흐를 것 같았지만 동시에 울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여기까지 온 건지 전혀 모르겠어?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하고 싶은 거야?”
“비비.”
“카일이 날 전혀 만나 주지 않고 피하기만 하니까 내가 여기까지 온 거잖아. 카일, 너를 만나려고!”
결국 흥분하여 목소리가 높아지고 말았다.
마지막 남은 기운을 전부 짜내 소리를 지른 나는 힘겹게 몸을 들썩였다.
어쩐지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카일이 걱정스럽게 나를 살피며 말했다.
“비비, 진정해. 너 지금 많이 다쳤어.”
“카일이 나빠.”
나는 툭 내 속마음을 내뱉었다. 둑이 터진 감정은 내 뜻대로 제어되지 않고 줄줄 새어 나왔다.
“왜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 주는 거야? 정작 내가 원하는 말은 절대로 해 주지 않으면서. 심지어 내가 먼저 말하려고 해도 말하지 못하게 막고.”
어느새 내 목소리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나는 카일이랑 달라. 카일처럼 속마음을 숨기고 살 수 없다고.”
상대도 나를 좋아하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 고문과도 같은 생각을 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확실한 애정이 좋았다. 지난 생에 내가 받지 못했던 사랑과 관심을 이번 생에서는 확실히 보답받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제발 확실하게 말해 줘. 카일이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고 해도 절대 카일을 원망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간신히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왜냐하면 나는 카일의 가장 친한 소꿉친구잖아.”
우리 관계가 어떻게 변한다고 한들 한때 우리가 절친한 사이였다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카일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카일의 푸른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저 속에 담긴 감정은 긍정일까 아니면 부정일까.
어느 쪽이든 이제는 답을 듣고 싶다고 생각하며 난 입을 열었다.
“카일은 내가 좋아?”
“…응.”
“그건 가족이나 친구로서 느끼는 감정과는 다른 좋아함이야?”
질문을 내뱉음과 동시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나는 부디 카일이 나와 같은 마음이길 바랐다.
내가 지금까지 착각한 것이 아니라고 네가 확신시켜 줘.
그리고 나를 더 이상 밀어내지 마.
찌르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달조차 뜨지 않은 어두운 밤, 카일과 내 시선이 진득하게 엮였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이 짧은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카일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내가 세상에서 비비안 너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건 없어.”
바다를 닮은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은 꼭 폭풍우가 치기 전 고요함을 유지하는 심해를 연상시켰다.
“나보고 널 가족으로, 그리고 친구로서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카일의 입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지독한 갈증을 참아 온 사람처럼, 그가 입을 달싹였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비비?”
카일이 엄지로 내 입술을 훑었다.
겨우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졌을 뿐인데 상대의 마음이 물씬 드러나는 것 같았다. 예민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그러자 카일이 피식 웃었다.
“내가 얼마나 저급한 욕망을 가진 사람인지 알게 되면 비비 넌 분명 날 싫어하게 될 거야.”
“…내가 왜 널 싫어할 거라고 생각해.”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항변했다.
카일이 어떤 사람이건 내가 그를 싫어할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 긴 시간을 함께하면서 나는 이미 카일에게 속절없이 빠져 버리고 말았으니까.
나는 지금이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순간이라 여겼다.
“카일 네가 좋아.”
카일과 시선을 맞추며 진심을 다해 속삭였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면 좋겠어.”
그리고 그 순간, 카일의 입술이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카일이 나를 사로잡았다. 벌어져 있던 입술 사이로 카일의 숨결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내 치열과 입 안을 부드럽게 훑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달콤한 감각에 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뜨거운 열기가 내 몸을 달구고 호흡은 점차 가빠졌다. 카일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쥐었다.
목덜미에 닿는 그의 손가락에 나는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러면 카일은 마치 내가 도망갈까 무섭다는 듯 나를 더 꽉 껴안았다.
카일의 입맞춤은 달콤했고, 또 나를 향한 간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물씬 느껴져 그것이 못내 기뻤다.
잠시 뒤, 카일이 입술을 살짝 떼어 냈다. 열린 입을 통해 나는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카일의 눈동자는 열기에 물들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카일이 내 뺨을 은근하게 쓸었다. 그러고는 사뭇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비비.”
어쩐지 쓸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카일이 자꾸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나는 카일의 입맞춤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침내 진심을 보여 준 그의 행동에 기뻐하며 화답했다.
나는 팔을 뻗어 카일의 목에 내 손을 걸쳤다.
내가 먼저 카일에게 다가가자 카일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내게서 시선조차 떼지 못하는 그를 보며 나는 작게 속삭였다.
“나도 카일이랑 똑같아.”
카일의 목덜미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내 두 번째 입맞춤이 이어졌다. 누가 먼저 입을 맞췄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둘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하아, 카일….”
두 번째 입맞춤은 첫 번째보다도 더 격정적이었다. 카일은 마치 나를 잡아먹을 듯 굴었다.
그렇게 애타게 행동하지 않아도 나는 도망가지 않을 텐데.
나는 카일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고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나를 껴안은 카일의 몸이 움찔 굳는 것이 느껴졌다. 곧 전보다 더 깊고 은밀하게 입을 맞춰 왔지만.
“으음….”
숨결이 뜨거웠다. 입맞춤이 길어질수록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몸이 달아올랐다. 나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로 숨을 헐떡였다.
카일의 키스는 어린아이들이 하는 입맞춤처럼 아기자기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절박하고, 정열적이었으며, 나를 향한 독점욕으로 가득했다. 다만 그런 와중에도 내 뺨과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은 한없이 다정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카일은 내가 머리에 열이 올라 숨이 막힐 것 같은 상태가 되고 나서야 나를 놓아주었다.
카일이 나를 꽉 붙잡고,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채로 우리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카일이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열이 오른 내 뺨을 자신의 손등으로 식혀 주며 그가 속삭였다.
“좋아해, 비비.”
이제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한 목소리.
카일은 그렇게 내게 고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