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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의 어머니인 래스턴 남작 부인은 원래부터 건강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녀는 부친의 병을 똑같이 닮고 태어났다.
심장이 약해 조금만 무리를 해도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떨 땐 이유 없이 소화 불량을 일으켜 먹은 것을 전부 토해 내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건강 상태는 다니엘을 낳고 나서 더 나빠졌다.
다니엘이 스스로 밥을 먹고 생각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그녀는 이미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야만 하는 몸이 된 후였다.
다니엘의 아버지는 부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녀의 병에는 명확한 치료법이 없었다.
아무리 비싼 약을 사용하고 잘나가는 명의를 데려온다 한들 마찬가지였다.
치료가 거듭될수록 남작가에서 일하는 사용인의 수는 줄어들었고 그들의 생활 역시 가난해졌다.
하지만 래스턴 남작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들이 생활하던 저택을 팔아도, 이미 기울어져 얼마 남아 있지도 않은 재산을 전부 처분하는 일이 생긴다 해도.
그는 아내의 병을 고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남작 부인의 병이 호전되는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신전은 남작에게 있어 마지막으로 기댈 곳이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제 아내를 봐주십시오!”
래스턴 남작의 저택이 있는 지역에는 신성력을 가진 신관이 없었기에 그는 먼 수도까지 올라와 신전을 방문했다.
매일같이 신전을 찾아와 자비를 호소했으나 그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그럴 인력이 없다는 차가운 냉대뿐이었다.
후에 래스턴 남작은 알게 되었다.
신전의 신성력이 돈 많은 귀족들 위주로 제공되느라 그와 같은 가난한 이들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을.
결국 남작은 서러움을 삼키며 제 가족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리고 남작 부인은 고된 여행길로 병이 더 심해졌고.
그날의 일은 다니엘에게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러니 비비안을 만나 그녀의 가족과 연을 맺고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과 의사를 지원받은 것은 다니엘에게 있어 다시는 없을 행운이었다.
다니엘의 마음속에서 비비안을 향한 고마움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가족을 외면한 신전에 대해서는 원망이 쌓여 갔다.
만약 그때, 어머니가 신전에서 치료받을 수 있었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 고통 받지 않으셨어도 됐었을 텐데.
유피테르교는 언제나 그래 왔다.
그들이 가장 믿는 것은 주신 유피테르가 아닌 돈이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없었다.
만약 오늘 다니엘이 만난 신관이 그가 건넨 돈주머니를 받지 않고 마다했다면 다니엘의 생각도 조금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신관은 결국 돈을 받았다.
신전 입구에서 방문객들을 받는 말단 신관조차 제 몫을 챙기는데 그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이들은 어떠할까.
이런 곳에 시에나와 같은 사람이 소속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랄 일이라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다니엘이 신전 벽면에 몸을 붙여 모습을 숨겼다.
그가 품속에서 다른 주머니를 꺼냈다.
이번에는 금화가 든 주머니가 아니다.
주머니를 묶은 끈을 풀자 스크롤을 비롯한 마법 아티팩트가 잔뜩 나타났다.
“단단히 준비했네, 비비안.”
다니엘이 휘파람을 불며 작게 감탄했다.
비비안은 다니엘에게 신전에 방문해 시에나의 근황을 확인해 달라는 부탁을 한 다음 날, 서신을 통해 새로운 소식을 전해 왔다.
지난밤, 클럽 하우스에서 수도에 마물 중독을 퍼뜨리던 이들을 붙잡았고 그들은 예상대로 로건과 협력하고 있었으며 어쩌면 신전도 이 일에 연관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청소부에게 돈을 주고 시체를 사 모으는 이는 파직 신관이었다.
하지만 관련된 정보를 귀띔해 준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아슬란 대주교였지.
어쩌면 두 사람 사이에도 긴밀한 유착 관계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창고에는 사람을 팔아 번 돈이 모여 있겠지.”
다니엘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정직하게 축적하지 못한 재산을 불태운다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그는 어제 비비안에게서 받았던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 만약 아슬란 대주교가 성녀님을 억압하고 있으면 신전 창고에 불을 질러 줘.
- 이교도와 신전과의 관계에 대해 알아봐야 해. 우리의 움직임을 신전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면 신전의 정신을 쏙 빼놓을 큰 사고가 일어나야 하고. 제사를 앞둔 상황이니 창고에 불이 나면 다들 난리가 날 거야.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때 신전에서 성녀님을 모시고 나와 줘.
- 만약 대주교가 성녀님을 억압하고 있지 않고 네가 성녀님을 무사히 뵐 수 있는 상황이라면 위의 계획은 모두 무시해 줘. 어쩌면 아직 신전이 선을 넘지 않은 상태일 수도 있으니까….
“그럴 일은 없어, 비비안.”
신전은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했다.
그리고 이번 일이 계기가 되어 신전에도 물갈이가 이루어지면 좋을 것이라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그는 우선 주머니에서 신전 내부 구조가 그려진 지도를 꺼냈다.
비비안은 시에나가 자신의 방에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신전의 지하에 갇혀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지하에 이제는 쓰지 않는 지하 감옥이 있다고.
아마 이번에 사로잡은 용의자에게서 캐낸 정보일 것이다.
다니엘이 지도를 통해 창고와 시에나의 방, 그리고 지하실로 이어지는 길을 확인했다.
예상 경로를 눈에 익힌 다니엘은 지도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후.”
곧 그는 신전의 창고 벽면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우선 신관들이 입는 옷과 비슷한 흰색의 천을 몸에 둘렀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조용히 스크롤 한 장을 꺼냈다.
5분간 거대한 화염을 만들어 내는 마법 스크롤이다.
잠시 스크롤을 내려다보던 다니엘은 망설임 없이 스크롤을 북 찢었다.
그러고는 열려 있는 창문 너머로 그것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 잠시 뒤-.
쾅-!
엄청난 소음과 함께 신전 창고에 화염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뭐, 뭐야?!”
“불이야! 불이 났다!”
놀란 신관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왔다.
창고를 집어삼키는 화염은 멀리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사람들이 전부 창고 주변으로 몰려온 것을 확인한 다니엘이 신전 내부로 숨어들었다.
그는 가장 먼저 시에나의 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성녀님!”
다니엘이 잠기지 않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하지만 방 내부에 시에나는 없었다.
다니엘이 제 머리카락을 마구 휘저었다.
“여기가 아닌가!”
그러면 정말로 비비안이 말한 대로 지하 감옥에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발걸음을 돌렸다.
신전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제법 외진 곳에 있었다.
운 나쁘게 신관 몇 명을 마주치긴 했으나 다들 다급한 상황이라 그런지 다니엘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하 입구를 찾은 다니엘이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성녀님! 계십니까?”
“소남작님?”
공간 안쪽에서 모기 소리만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다가간 다니엘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단단한 쇠창살 너머로 시에나가 갇혀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모포 하나만을 손에 쥔 채로.
다니엘이 쇠창살에 바짝 붙으며 물었다.
“성녀님! 괜찮으신가요?”
“네, 네…. 그런데 위에 무슨 소란이라도….”
“그건 여기서 나가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열쇠는 어디 있습니까?”
“열쇠는 아슬란 님께서….”
그때, 그들의 뒤편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시에나가 흠칫 몸을 굳혔다.
누군가 지하 감옥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 역시 이를 눈치채고 서둘러 주머니를 뒤졌다.
그가 시에나에게 스크롤 한 장을 건넸다.
“성녀님, 그것 어서 찢으십시오.”
“예?”
“어서요!”
다니엘의 재촉에 시에나가 스크롤을 세로로 크게 찢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녀의 모습이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감옥 안에서 자취를 감췄다.
시에나가 완벽하게 사라진 것을 확인한 다니엘이 제 몫의 스크롤을 꺼냈다.
“잠깐, 거기 너는 누구…!”
그리고 지하 감옥을 찾은 이가 다니엘에게 달려들기 직전.
다니엘 역시 이동 스크롤을 찢고 신전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
지난 몇 주간 날아오를 것 같던 황자 궁의 분위기는 정확히 삼 일 전부터 굉장히 침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두말할 것 없이 황자 궁의 주인인 로건 때문이었다.
“으아악!”
쨍그랑-.
로건이 성난 포효를 지르며 잉크병을 내던졌다.
단단한 벽면에 부딪친 유리병이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
아름다운 크림색 벽지가 검은 잉크로 보기 싫게 물들었다.
로건이 손에 한 장의 종이를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카일러스 그 녀석을 진작에 죽여야 했어.”
그는 지금 몹시 분노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그에게 재판관의 이름으로 한 장의 소환장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수신인은 로건 이그리트.
수도에 마물 중독을 의도적으로 퍼뜨려 백성들의 안전을 위협했다는 죄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