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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숨긴 것은 그가 남들보다 먼저 시에나를 찾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화 기간에 들어갔다는 말과 다르게 시에나는 아슬란에 의해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으니까.
아슬란은 직접 시간을 들여 시에나를 길들일 생각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말에 반항하지 못하고 지시한 대로 얌전히 따르도록 말이다.
남다른 성력을 보이던 시에나를 길거리에서 거두고 난 후, 아슬란이 그녀를 직접 교육해 왔던 것도 모두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였다.
시에나는 아슬란만을 위한 꼭두각시로 남아 있어야만 했다.
정확히는 대신관으로서 그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꼭두각시 말이다.
‘그런데 아직 제대로 길들이지도 못한 상황에서 놓치고 말았으니.’
시에나가 다른 신관들 앞에서 헛된 말이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몰래 사람을 풀어 사라진 시에나를 찾고 있으나 아직 반가운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아슬란은 그녀가 로시에르 후작가에 모습을 숨겼을 것이라 의심했다.
시에나는 로시에르가의 둘째인 비비안 로시에르와 제법 친분을 나누고 있었으니까.
잠시 중앙 현관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아슬란이 몸을 돌려 신전 뒤쪽으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곳에는 마차 한 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슬란이 그 누구와도 동행하지 않은 채 마차에 탑승했다.
그리고 곧 그를 태운 마차가 은밀하게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시에나가 로시에르 후작가에 숨어 있는 것이라면 쉽게 빼내 올 수가 없다.
후작가의 권위와 기세가 만만치 않으니까.
다만 그 가문의 여식이 황태자와 가까운 사이이니….
“전부 엮어 이교도로 선언한다면 상황이 달라지겠지.”
아슬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대주교는 성녀와 마찬가지로 신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그의 선언은 큰 의미를 가진다.
저들을 이교도라 단정한다면 이후 시에나가 성토할 고백도 전부 그들의 꾐에 빠져 내뱉는 헛소리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될 경우, 신전은 황실의 황위 다툼에 매우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지금처럼 간접적으로 이득을 챙기는 행위가 아닌, 직접적인 행위자가 된다는 뜻이다.
로건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에 성공한다면 신전 역시 달콤한 결실을 얻겠으나 만에 하나 실패할 경우 신전이 속세에 개입한 책임을 대주교인 그가 오롯이 떠맡아야 한다.
그가 이마에 깊은 주름을 만들며 고민에 빠졌다.
그러는 사이, 그를 태운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슬란이 내린 곳은 수도 외곽의 허름한 민가였다.
선대 황제가 수도를 정비할 때 쫓겨난 이들이 하나둘 모여 간신히 집을 짓고 사는 곳.
어찌 되었든 대주교인 그가 이 밤에 방문할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한 시간 뒤, 이쪽으로 다시 오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마부가 마차를 몰아 거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아슬란이 몸을 틀어 반대편 건물 옆으로 난 골목길에 진입했다.
좁은 골목은 달빛조차 비치지 않아 굉장히 어두웠고 언뜻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마저 풍겼다.
코를 찌르는 지린내가 풍기는 골목길을 아슬란은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마치 이 길을 수도 없이 오고 간 사람처럼 거침없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미로같이 얽힌 골목길을 걸어간 지 십 분 정도 되었을까.
아슬란은 창문조차 나지 않은 한 주택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 앞에 선 아슬란이 한숨을 쉬더니 굳게 닫힌 문을 똑똑 두 번 연달아 두드렸다.
그리고 잠깐 시간을 두고 기다리다가 다시 세 번을 노크했다.
그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암호였다.
잠시 내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조용히 문이 열렸다.
탁-.
건물 안으로 들어간 아슬란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너는 내가 직접 여기까지 오게 만드는구나, 타샤.”
한때 시에나를 보필하는 업무를 맡았던 신전의 견습 신관.
그리고 비비안을 시에나로 착각하여 납치 사건을 일으켰던 범죄자.
그 모든 수식어의 주인공인 타샤가 벽난로 옆에서 눈을 새초롬히 뜬 채 아슬란을 노려보았다.
“저도 대주교님이 오는 것을 반기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슬란에게 마실 것도, 앉을 것도 권하지 않았다.
아슬란 역시 굳이 이 더러운 공간에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았기에 문 근처에 비스듬히 섰다.
그가 곧장 본론을 꺼냈다.
“모아 둔 생명수를 전부 내게 넘기도록.”
“…방금 뭐라고 하셨죠?”
“생명수가 필요하니 전부 넘기라고 했다.”
타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생명수란 인간이 가지는 생명력을 응축한 정수였다.
이 생명수를 기반으로 마물을 만들기도, 그리고 현재 수도를 강타하고 있는 마물 중독의 해독제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로건이 방문해 기적을 일으킨 곳에서는 마물 중독으로 죽는 사람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전부 아슬란이 금방이라도 죽어 갈 이들을 수거해 타샤에게 대가를 받고 넘겼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시체도 있었고 아직 죽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아슬란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는 그렇게 로건과 타샤 둘 모두에게서 돈을 받으며 자신의 주머니를 채워 갔다.
하지만 로건의 성자 행세가 끝이 나면서 그의 수입도 뚝 끊겼다.
다른 먹거리가 필요한 것이다.
“대주교 님, 미치셨습니까?”
“나는 네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아슬란의 입가에 자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감히 성녀님을 납치해 해하려고 했던 네가 이렇게 버젓이 수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느냐.”
“대주교.”
“파직 처분을 당한 신관인 것도 모자라 이교도의 앞잡이이기도 하지. 현재 신전에서는 이교도를 전부 붙잡아 그 목숨을 거둬 가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하다. 그리고 타샤 너라면 좋은 시작이 될 수 있을 것 같구나.”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겁니까?”
“네 별 볼 일 없는 목숨값치고 매우 비싸게 쳐준 것이다.”
아슬란이 살짝 비웃으며 뇌까렸다.
암, 비싸게 쳐주고말고.
타샤의 목숨은 지금 여기서 거둬 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만큼 값싼 것이니 말이다.
아슬란은 아직 카일러스 황태자와 로건 황자 중 어느 편에 설 것인지 확실하게 정하지 않았다.
다만 현재 수도를 점령한 병이 심각한 사안인 만큼 이 병을 해결하는 자가 민심을 얻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아슬란은 마물 중독 해독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이 생명수를 가지고 그들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를 선점할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생명수가 반드시 필요했다.
“생명수를 신전에 기부하거라. 그러면 내가 그래도 과거 너를 신전의 식구로서 거두었던 정을 생각해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주지.”
“하.”
“너도 이교도라는 누명을 쓰고 도망가는 것은 싫지 않겠느냐.”
타샤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슬란이 속으로 피식 비웃었다.
그가 손목에 찬 고급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어 말했다.
“내일 사람을 보내지. 그때까지 준비해 놓도록.”
그러고는 마차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가 낡은 나무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깡-!
“윽….”
무언가 뾰족한 둔기가 그의 머리를 거세게 후려쳤다.
순간 아슬란의 눈앞에 별이 보이며 시야가 깜빡였다.
“아, 빗맞았네요.”
자리에서 휘청이는 아슬란을 보며 타샤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아슬란의 회색빛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테이블 모서리를 붙잡고 간신히 몸을 지탱한 그가 타오르는 고통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지, 금 이게 무슨….”
“대주교님이 저를 이렇게 몰아붙이시니 저도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타샤가 피식 웃으며 피가 묻은 부지깽이를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불 관리를 위해 벽난로 옆에 세워져 있던 부지깽이였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사냥감을 눈앞에 둔 짐승 같았다.
“그리고 대주교 님. 대주교 님께서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게 있습니다.”
“으윽….”
“저는 이교도의 앞잡이가 아닙니다. 제 육신과 영혼은 처음부터 저희의 주군을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아슬란이 제 이마를 짚었다.
이마를 타고 흐른 피가 속눈썹에 엉겨 붙어 눈을 뜨는 것조차 어려웠다.
의식을 잠식하는 고통 때문에 생각이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다만 지금 그가 취해야 하는 행위는 명백했다.
어서 여기서 도망가야 한다.
하지만 타샤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어딜 가십니까.”
“크악!”
그녀가 휘두른 부지깽이가 아슬란의 어깨를 위아래로 크게 찢었다.
“웃겨, 정말. 누가 누구한테 명령인지.”
타샤가 무릎을 꿇은 아슬란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게다가 멍청하게 성녀를 잃어버리기나 하고. 설마 내가 그걸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아직도 신전에는 내 눈과 귀가 되어 줄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요.”
“으으….”
“성녀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만…. 그래도 나름 대주교의 자리까지 올라간 당신이라면.”
아슬란은 그의 인생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그가 철철 흘러넘치는 피를 손으로 막으며 비굴하게 빌었다.
“제, 제발. 타샤…. 우리가 옛, 정이….”
“아하, 옛정이요?”
“나, 를 여기서 윽…. 보내 준다면 내가 꼭… 사례를.”
“어머나, 제가 그렇게 정 없는 사람은 아니랍니다.”
타샤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그러니 마지막은 아프지 않게 해 드릴게요.”
둔탁한 소음을 마지막으로 대화는 뚝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