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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님 밀지 말고 당기세요 (106)화 (107/112)

106

시에나는 백 년 만에 나타난 성녀로 그 자체만으로도 기적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재판정의 그 누구도 시에나의 발언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성력을 지닌 이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바로 개인의 영혼이 타락했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무나 가능한 건 아니고… 시에나 정도로 특출 난 이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작에서는 대주교도 그 정도의 능력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시에나 역시 결말의 클라이맥스 부분에 도달하고 나서야 그 능력을 각성하였는데 이곳의 시에나는 원작과 다르게 이미 스스로 능력을 개화시킨 것 같았다.

듣자 하니 아슬란에게서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그에게 악행을 멈출 것을 호소했다고 하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 결과는 감금 행이었지만….

‘무려 시에나가 먼저 손을 내밀고 잘못을 멈출 기회를 줬는데 그걸 그대로 걷어차다니.’

사라진 아슬란의 결말이 그리 좋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쨌든, 그런 시에나의 능력을 활용해 재판 당일 로건에게 벗어날 수 없는 낙인을 찍을 계획이었다.

최근 들어, 수도로 올라오는 마차를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과장이 어느 정도 섞여 있겠지만 그만큼 제국의 모든 이들이 이번 재판의 결과를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거리에 마물 중독이 돌고 있는 상황에 칩거하며 몸을 사리던 귀족들까지 전원 참석 의사를 보였다고 하니….

로건의 재판이 얼마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카일과 미리 짠 계획을 시에나와 다니엘에게 알려 주고 곧바로 래스턴 저택을 떠날 준비를 했다.

“벌써 가실 거예요, 비비안 님?”

“미안해요, 시에나. 이틀 후에 봐요. 다니엘, 성녀님을 잘 부탁해.”

“응, 걱정하지 마.”

시에나는 몹시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배웅했다.

물론 나도 오랜만에 본 시에나와 이렇게 빨리 헤어져야 한다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바빠서 어쩔 수가 없었다.

재판 당일 로건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일이니 만반의 준비를 해야만 했으니까.

내가 특히 걱정하는 건 그가 재판 결과를 인정하지 못하고 무력시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인데….

귀족들을 인질로 잡고 쿠데타라도 일으킨다면 상황이 더 복잡해질 수 있었다.

“그건 절대 안 되지.”

재판 당일, 로건은 반드시 유죄를 선고받고 얌전히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긴장과 기대감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

로건 이그리트의 재판이 열리는 날.

제국 수도의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화창했다.

카일이 다소 굳은 표정으로 황태자 궁을 나섰다.

재판은 오후 2시에 예정되어 있었다.

현재 시각은 오후 1시 30분.

아직 재판이 시작되기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으나 현재 재판정은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그의 기사가 고했다.

“드디어 오늘이군요, 전하.”

카일의 뒤를 따르며 리오넬이 말문을 열었다.

“그 황자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 기사들이 겪은 고초를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립니다. 오늘 정말로 제대로 먹여 줘야 합니다. 다들 벼르고 있다고요.”

“그래, 알고 있어.”

“그런데 넬이 저번에 말해 주길 법률상 가장 강한 형벌은 교수형이라고 하던데요. 지금까지 황족에게 교수형이 내려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요.”

여태껏 선례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리오넬의 말투에서는 은근히 상대가 그런 벌을 받으면 좋겠다는 뉘앙스가 풍겼다.

리오넬이 털어놓은 희망 사항에 카일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로건이 사형만큼은 당하지 않길 바라.”

카일이 로건에게 혈육으로서의 정을 느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황위를 욕심내 일부러 수도에 병을 퍼뜨리고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다니.

그는 로건이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했고 그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황족에게 사형이란 리오넬이 말한 대로 쉽게 내려지는 처벌이 아니었다.

아무리 로건의 죄가 밝혀진다 해도 대법관은 그가 황자라는 점을 들어 관대한 처벌을 내릴 가능성이 높았다.

천 명의 백성보다 황족, 특히 황자 한 명의 존재가 더 귀중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 사형이 내려질 상황이라면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질 때뿐이다.

예를 들면 로건이 사병을 일으켜 쿠데타를 일으킨다거나 하는 일 말이다.

황제가 갑작스럽게 붕어하고 카일이 그를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는 바람에 일이 비틀어지긴 했으나 애초에 황제가 인정한 자신의 후계자는 카일이었다.

오늘은 카일의 무죄와 로건의 유죄를 밝히는 자리였고.

결과가 나온 후 로건이 무력시위를 한다면 이는 반란으로 치부될 것이다.

아무리 황족이고 황자라 한들 반란만큼은 사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카일은 그저 로건이 거기까지 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면 로건의 목을 베는 것은 자신의 검이 될 테니까.

카일이 그를 따르는 기사들을 이끌고 재판정에 도착했을 때였다.

“황태자 전하!”

한 귀족이 불쑥 카일의 앞에 나타나 그를 붙잡아 세웠다.

리오넬이 인상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무례하다! 감히 누구 앞을 가로막는 것이냐!”

“리오넬, 그만.”

카일이 화를 내는 리오넬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갑자기 나타난 귀족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잠시 움찔하던 상대는 곧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 저는 그저 전하를 지지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상대가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 전하, 저는 처음부터 전하를 믿고 있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저희 코날드 백작가의 모두가 전하를 지지합니다. 오늘 전하께서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상대의 절절한 고백에 카일이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지금 그에게 자신의 충심을 고백하는 자는 정작 카일이 누명을 쓰고 고난을 겪고 있었을 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자가 남들보다 특별히 더 박쥐 같은 성질을 가진 건 아니었다.

이미 카일은 지난 며칠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수도 없이 겪었다.

대부분 수도를 강타한 새로운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이었다.

황자가 넘보아서는 안 되는 자리를 넘봐 하늘이 벌을 주었고 그 증거로 그가 치료한 자가 피를 토하며 죽어 갔다.

그런데 제국의 진정한 후계자인 황태자가 자리에 나타나자 죽어 가던 이가 살아나고 병이 사라졌다는 전설과도 같은 소문 말이다.

이제 와 뒤늦게 다시 그에게 꼬리라도 흔들려는 것인지….

상대의 행위가 같잖았지만 카일은 이를 겉으로 티 내지 않았다.

대신 인자하게 웃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고맙군.”

“…!”

“그대의 진심, 잘 알았네.”

“가, 감사합니다! 전하!”

그저 알았다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상대는 마치 측근의 자리에 오른 것처럼 기뻐했다.

머리가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신거리며 인사하는 그를 지나치며 리오넬이 쯧 혀를 찼다.

“전하는 비위도 참 좋으십니다. 저런 녀석들을 하나하나 상대해 주다니.”

“혼자 착각하는 것까지 내가 막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게 더 잔인한 처사 같은데요. 그보다 그날의 연기가 제대로 먹히긴 한 모양입니다. 이렇게까지 여론이 반전될 줄은 몰랐어요.”

리오넬이 히죽 웃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런 연극을 벌일 생각을 다 하다니. 여론전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런 식으로 상황을 주도하는 건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역시 로시에르 영애가 참 똑똑해요. 그렇죠?”

“맞아.”

“전하는 연기를 엄청 잘하시고요.”

“시끄럽네, 리오넬 경.”

카일이 리오넬을 가볍게 째려보았다.

리오넬이 히죽 웃더니 곧 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앞만 보고 걸어갔다.

그러는 사이 카일은 재판정에 도착했다.

“카일러스 황태자 전하께서 들어오십니다.”

그에게 집중되는 모든 시선을 받으며 카일이 원고석으로 향했다.

맞은편 피고석에 앉아 있던 로건이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로건의 뒤에는 그가 가진 권력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황후와 그래스린 공작이 함께 서 있었다. 역시나 눈빛만으로 카일을 찢어 죽일 기세다.

카일이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열린 황족의 재판이다.

일찍이 도착해 재판을 준비하고 있었던 대법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면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장내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

“지금쯤 벌써 재판이 시작되었을 텐데.”

시에나를 데리러 래스턴 저택으로 가는 길.

나는 정차된 마차 밖에 서서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잘 달려가고 있던 마차가 가던 길목에서 멈추게 된 것은 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말이 갑자기 흥분하며 반항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워워, 진정하자. 얘들아.”

마부가 필사적으로 말들을 달랬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흥분한 말들은 도통 진정할 줄을 몰랐다.

“아니, 이 녀석들이 갑자기 왜 이래.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녀석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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