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화
<복잡한 동굴 속>
세 사람과 함께 움직이던 강준우는 뒤늦게 그 시선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 정령이었어!'
백선화가 사용하는 노움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전체적인 느낌이 비슷했다.
일전에 봤던 여러 정령들 중에 하나인 것 같았다.
계약을 맺은 사람이 달랐기 때문에 느낌이 같을 수는 없었지만, 지금 움직이고 있는 노움을 통해서 대략적인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그 정체를 떠올리는 동안에도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도와주세요. 아무도…… 없어요?"
"……."
"흐윽. 흑!"
근처에 있는 그들을 불러들이는 목소리였다.
상대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한 부름에 네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들을 부르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살아왔을 정도라면 이런저런 상황을 많이 겪었을 게 분명하지만, 어설프게 그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있다는 소린가?'
어찌 됐든 좋은 의도로 이런 상황을 만든 것 같지는 않았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들어서자 주변의 상황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한 여자가 겁에 잔뜩 질린 채 흐느끼고 있었다.
그런 여자와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앞섬이 붉게 물든 남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크를 상대한 것 같았다.
그 여자 앞에 쓰러진 오크의 등에 검이 꽂힌 것을 보면 결국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내가 놈을 쓰러뜨린 것 같았지만, 그 역시 치명상을 입었는지 곧 죽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으으으."
"저 남자. 아직 살아 있는데?"
"사, 살려주세요! 저 좀 도와주세요!"
"……."
그들을 발견한 여자는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권우철은 그런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강준우의 전음이 그를 일깨웠다.
- 형은 아무 것도 하지 마.
"……."
이미 그의 어색한 연기를 지켜본 강준우는 권우철의 개입을 최대한 막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냉정한 그의 말에 권우철이 걸음을 멈추자 뒤에 있던 백선화가 그를 대신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괘, 괜찮아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살짝 떨리는 듯한 목소리에는 불안해하는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확실히 연기를 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백선화의 질문에 여자가 흐느끼며 말했다.
"오크들이 공격을 해 왔어요. 흐윽."
"……."
"일행들이 모두 당했어요. 너무 겁이 나서 도망을 쳤는데, 이놈이 쫓아와서는 저를…… 흐윽."
덮치듯 쓰러진 오크를 가리키는 그녀의 모습은 가여워 보였다.
절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지만, 누구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강준우의 언질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조심스러워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준우가 앞으로 나섰다.
그런 그의 모습에 놀란 듯 여자는 웅크리며 드러난 몸을 감췄다.
낯선 남자의 움직임에 겁을 집어먹은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도움을 바라는 듯한 말은 계속 이어졌다.
"도, 도와주세요."
"……."
"흐윽. 움직이지 못 하겠어요."
별다른 반응이 없자, 그녀는 발목이 다친 것을 알리려는지 몸을 들썩였다.
의도적인 행동에 찢겨진 옷이 들춰지며 가슴골이 드러났다. 하지만 강준우는 역시나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신중한 그의 모습에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의심이 많은 놈인가? 이미 글렀나?'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어차피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마음을 달리 먹은 그녀는 강준우와 눈을 마주치며 다시 부탁을 이어갔다.
"…… 제발! 도와주세요."
간절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처음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건?'
붉게 변한 눈동자는 백선화가 매혹을 사용했을 때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천마신공의 공능이 상대의 힘을 간파합니다.]
[매혹이 무효화 됩니다.]
'매혹? 그럼 이 여자가……'
짧은 순간, 모든 상황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백선화와 같은 힘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이미 드러난 힘을 부정할 이유는 없었다.
- 너랑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 네가 처리하는 게 좋겠어.
"……."
강준우는 곧장 백선화에게 전음을 보냈다.
능력이 같다면 그녀가 처리하면서 숙련도를 올리게 만들 생각이었다.
갑자기 입술을 달싹이는 그의 모습에 그들을 유인했던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확실히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한 그녀는 크게 소리쳤다.
"들켰어! 나와!"
힘없이 떨리던 목소리와 상반된 소리가 주변을 가득 울렸다.
동시에 옆에 쓰러져 있던 남자가 곧장 일어나며 강준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단검을 꺼내든 그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상당히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실력이 뛰어난 것 같았다.
갑자기 돌변한 이들의 모습에 권우철이 방패를 들어 올리며 김연희와 백선화의 앞을 가렸다. 하지만 강준우는 그런 그에게 소리쳤다.
"뒤를 막아!"
"뒤, 뒤? 알았어."
여자의 말만 들어봐서는 일행이 있는 게 분명했다.
당연히 숨어 있는 놈들이 나타날 곳은 뒤 밖에 없었다.
그의 말에 권우철은 지체 없이 뒤로 물러났고, 그 사이 강준우에게 달려든 남자는 단검을 내지르며 그의 목을 노렸다.
위협적인 공격이었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던 그에게 부담스러운 공격은 아니었다.
쉬이익.
강준우는 뒤로 물러나며 그 공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일섬의 힘을 섞은 그의 움직임은 달려든 사내보다 더 빨랐고, 좋은 기회를 만들어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기습이 실패하자 치명적인 빈틈이 드러났다.
강준우는 곧장 철검을 손에 쥐었다.
그대로 상대의 목을 향해 일격을 뿌릴 생각이었지만, 그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옥죄었다.
'이건 뭐지?'
갑자기 투명한 형체의 무언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그를 압박하는 정체를 바로 정령이었다.
매혹을 걸었던 여자가 불러낸 실프가 온 몸으로 그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하지만 이대로 기회를 날릴 생각이 없던 그는 곧장 기운을 끌어올렸다.
파앙.
짧은 순간, 천마신공의 힘을 방출하자 그를 압박하던 정령이 튕겨져 나갔다.
"말도 안 돼! 실프를 저렇게 간단하게 떨쳐낸다고?"
하급 정령이 너무 쉽게 밀려났다.
그녀는 생각보다 대단한 강준우의 힘에 깜짝 놀랐지만, 이어지는 광경에 생각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
서걱.
"크흡."
번뜩이는 빛과 함께 기습을 감행했던 사내가 목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엄청난 쾌검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놀라운 것은 사내의 몸을 꿰뚫은 기운이었다.
'다, 닿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내보낸 정령이 시간을 번 사이, 공격에 실패한 사내는 뒤로 물러나며 강준우와의 거리를 벌렸다.
안전하다 싶을 정도로 거리를 유지했지만, 이어지는 일격에 허무하게 쓰러진 것이다.
다시 일어나지 못 하는 그 모습에 여자는 초조해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름 실력에 자신이 있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았다.
적진 깊숙한 곳에 혼자 남은 그녀는 크게 소리쳤다.
"실프! 막아!"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
뒤에 나타난 일행들이 이놈들을 쓰러뜨릴 동안 버티는 게 최선이었다.
그녀의 외침에 밀려났던 바람의 정령이 강준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곧 거센 바람이 칼날로 변하며 그를 노렸지만, 상대는 어렵지 않게 그 공격을 받아냈다.
티디딩.
투명한 칼날이 그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하지만 휘두른 검격이 날아오는 칼날을 모두 튕겨냈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공격이었지만, 야생의 감각이 활성화되면서 투명한 칼날이 날아드는 곳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실프를 상대하는 사이, 백선화는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를 노렸다.
곧바로 노움을 불러서 그녀를 공격했지만, 상대 역시 정령을 잘 알고 있었다.
"흥! 어디를!"
솟아난 돌기둥을 눈치 챈 그녀는 노움을 불러내며 공격을 막아냈다.
비록, 최하급이라 그 힘을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실프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놈에게 묶여 있었다.
이대로는 오래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승부수를 띄우며 백선화를 노려봤다.
'같은 편이라면 쉽게 공격하지 못 하겠지.'
같은 정령을 다루고 있었지만, 다른 능력은 자신이 더 우위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백선화를 보며 매혹을 펼쳤다.
그녀를 옭아맬 생각이었지만, 정작 그 시선을 바라본 백선화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뭘 봐?"
"…… 뭐?"
"눈을 왜 그렇게 뜨냐고?"
"미친!"
"나도 너 마음에 안 들거든! 눈깔아!"
순간 뿜어진 여배우의 카리스마.
매혹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그런 그녀에게 은밀한 기운이 꽂혔다.
"어억!"
갑자기 파고드는 한기에 절로 몸이 꺾였다.
이상함을 느낀 그녀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강준우에게로 향했고, 자신을 향해 손을 뻗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푸욱.
"아아악!"
솟아 오른 돌기둥이 그녀의 발바닥을 꿰뚫었다.
짧은 순간 느낀 강렬한 고통이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게 만들었고, 백선화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남은 힘을 쏟아내며 그 여자를 쓰러뜨렸다.
'누구한테 꼬리를 쳐?'
차마 밖으로 말을 내뱉지는 못 했지만,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준우를 유혹하려던 그 모습을 떠올리던 그녀는 새로운 알림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매혹을 획득하였습니다. 기존에 가진 동일한 능력으로 매혹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그제야 강준우가 왜 이 여자를 자신에게 넘겼는지 알 수 있었다.
백선화가 그 여자를 처리하자, 실프라는 정령이 모습을 감췄다.
강준우는 고맙다는 눈짓을 보내는 백선화를 뒤로하고 시선을 돌렸다.
콰과광. 콰광.
그들을 불러낸 일행이 권우철의 방패를 두드렸다.
나름 강력하게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그동안 크게 성장한 권우철의 방어를 뚫을 수 없었다.
"씨발, 희정이가 당했어!"
"…… 보통 놈들이 아니잖아?"
"어떡하지?"
"어떡하긴? 여기에서 물러난다고 달라질 건 없어."
"그건 그렇지만……"
"그냥 공격해. 놈들도 지치겠지."
"아, 알았어."
선두에 선 자의 지시에 뒤에 있던 자들이 마법을 쏟아냈다.
홀리 쉴드로 방어력을 키운 권우철은 그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계속되는 공격으로도 그를 뚫을 수 없었다.
이만하면 물러나야 할 것 같았지만, 그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뭐지?'
이들이 무모하게 공격을 감행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김연희과 백선화도 그런 권우철을 돕기 위해서 움직이는 만큼, 그들의 공격은 큰 효과를 보지 못 했다.
그저 힘만 낭비하는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씨발! 동작 그만!"
"……."
처음 보는 자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권우철을 지나친 그는 어느새 김연희의 목에 날이 선 단검을 겨누며 크게 소리쳤다.
"멈추라고! 더 움직이면 이년은 죽는다!"
"……."
날선 그의 말에 권우철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백선화도 쉽게 정령을 부리지 못 하고 그대로 멈춰 섰다.
강준우는 뒤늦게 놈들이 물러나지 않은 이유를 확인하며 얼굴을 구겼다.
'인질을 잡을 생각이었나? 저놈은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
그의 등장에 버티던 놈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초조해하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전세가 역전된 지금은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모두의 눈을 피한 상대의 뛰어난 능력이었다.
이렇게 몸을 숨길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다.
별의별 능력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능력이 아니라 김연희의 안전이었다.
"흐읍."
"보이지! 조금만 움직이면 이년은 죽는다."
"……."
손에 쥔 것이 장난감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려는 듯, 그는 일부러 피를 내보이며 소리쳤다.
"모두 무기 버려!"
"……."
"안 버려?"
권우철과 강준우가 주저하자 놈은 다시 김연희의 목에 단검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그냥 죽일까?"
다시 시작된 협박에 강준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냥 죽여."
"뭐?"
"그냥 죽이라고."
"이 미친 새끼가. 내가 못 할 것 같냐?"
"해 봐."
"……."
냉정한 그의 말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상대는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이러면 내가 쫄 거라고 생각했냐?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어. 이 새끼야!"
"…… 흐읍."
"무기 버려! 무기 버려!"
연약한 피부를 더 깊숙하게 파고든 단검에 강준우는 어쩔 수 없이 철검을 내던졌다.
그 모습에 권우철도 방패를 내리자, 남은 놈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저년은 죽이지 마."
"뭔 소리야?"
"배우잖아. 반반한 얼굴 보면 몰라?"
"어? 저년은?"
뒤늦게 백선화의 얼굴을 알아본 놈들은 음흉한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김연희의 뒤를 잡은 자가 그들을 일깨웠다.
"집중해. 이 새끼들아!"
"……."
"뭐하고 있어. 저 새끼들 먼저 처리…… 씨발, 너 뭐야?"
입술을 움직이는 강준우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자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무슨 개수작이야? 입술을 왜 달싹…… 저, 전음?"
뒤늦게 그게 전음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다시 단검에 힘을 줬다.
하지만 그가 대응하기도 전에 바닥이 크게 울렸다.
쿠웅.
한차례 크게 울린 바닥과 함께 이질적인 기운이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강준우의 외침이 뒤를 이었다.
"지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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