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화
<복잡한 동굴 속>
크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상대하는 자들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피어였다. 내력을 가득 담은 피어가 그들의 몸을 구속했고, 김연희는 그대로 몸을 비틀며 놈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겨눠진 단검에 목이 베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우철이 형!"
"아, 알았어."
그가 권우철을 부르기 무섭게 그는 뒤로 물러나며 김연희에게 힐을 사용했다.
제법 깊게 베인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고, 뒤늦게 경직에서 풀려난 자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무엇보다 경악스러운 것은 김연희를 붙잡고 있던 동료의 모습이었다.
뜬금없이 피를 토해내며 괴로워하던 그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크게 소리치며 모두를 묶은 놈이 쏘아낸 붉은 기운이 그의 이마를 꿰뚫자, 통나무 쓰러지듯이 빳빳하게 넘어간 것이다.
쿠웅.
바닥에 쓰러지는 그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남아 있던 자들은 그 모습에 확실히 깨달았다.
앞에 있는 놈들은 그들이 어쩌지 못할 놈들이라는 것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인질을 잡고 상황을 반전시키려고 했던 계획이 틀어졌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튀어!"
이번에는 완전히 잘못 걸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들은 즉시 움직였다.
도망만이 살 길이었다.
혹시라도 저들이 쫓아올 것을 우려한 자들은 캐스팅했던 마법을 뿌리며 살 길을 도모했다.
콰과광. 콰앙.
시간이라도 끌 생각이었지만, 그들이 날린 마법이 허공에서 터져나갔다.
강준우가 곧장 장력을 뿌리며 공격을 쳐낸 것이다.
"미친!"
그 모습에 경악한 자들은 사력을 다했다.
물러나는 그들의 모습에 권우철이 앞으로 나서자, 강준우는 그의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소리쳤다.
"기다리고 있어."
"아, 알았어. 조심해!"
양쪽으로 통로로 찢어지는 그들의 모습에 그는 마법을 사용한 둘을 쫓았다.
수가 더 많은 것도 있었지만, 체력적으로 더 약할 거라고 생각했다.
저들을 빠르게 처리하고 남은 놈을 쫓을 생각이었다.
"씨발! 왜 여기로 오는 거야!"
강준우의 선택을 받은 그들은 기겁했다.
절로 욕이 튀어나왔지만, 그보다 마법을 캐스팅하는 게 먼저였다.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만 했다.
다만, 상대는 그들의 마법을 기다려 줄 정도로 무른 자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귀음신법에 일섬을 응용한 강준우 몸이 빠르게 쏘아졌다.
순식간에 둘을 따라잡은 그는 그들을 향해 팔을 뻗었다.
콰앙. 콰앙.
철사장에 적중당한 둘이 피를 뿌리며 튕겨져 나갔다.
어떻게든 그의 공격을 받아치려고 했지만, 마법이 주력인 그들로서는 강준우의 힘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고통을 참아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날아온 것은 강준우의 무자비한 손속이었다.
콰앙. 콰앙.
다시 한 번 꽂힌 철사장에 결국 그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두 사람의 죽음을 확인한 강준우는 그들을 뒤로하고 곧장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다른 곳으로 도망간 자를 마저 쫓을 생각이었다.
다시 한 번 기운을 폭발시키며 일섬을 운용하자 그의 몸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강준우가 다시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
"…… 놓쳤어."
"노, 놓쳐? 말도 안 돼!"
강준우의 말에 오히려 그들이 더 놀라는 눈치였다.
잠깐이지만 통로를 스쳐지나간 강준우의 움직임을 직접 본 세 사람이었다.
도저히 사람의 움직임처럼 보이지 않았던 그가 누군가를 놓쳤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신법이 뛰어난 놈인 것 같더라고."
"하긴, 은신을 가진 놈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신법이 대수겠냐?"
작정을 하고 움직인 그들이었지만, 이런 상황을 겪을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다.
생각보다 각자가 얻은 능력의 범주가 더 큰 것 같았다.
다행히 불상사는 없었지만, 마냥 밝던 김연희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연희야. 괜찮아? 많이 놀랐지?"
"모두 미안해! 나 때문에……"
"……."
걱정스러워하는 백선화의 말에 김연희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평소의 그녀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김연희는 모두에게 짐이 됐다는 사실에 자책하며 미안해했다. 하지만 세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충격이 컸나보네. 너 답지 않게 왜 이래?"
"나였어도 그렇게 됐을 거야. 자책할 필요는 없어."
"됐어. 나도 몰랐는데. 네가 어떻게 알았겠냐?"
"……."
각자가 다른 방법으로 그녀를 위로했지만, 마지막에 들은 강준우의 말에 김연희의 콧잔등을 찌푸렸다.
"꼭 위로를 해도……"
"발끈한 걸 보니까, 이미 떨쳐냈네."
"그러게. 저것도 연기 아니야?"
다시 제 성격을 되찾은 그 모습에 강준우는 담담하게 말했고, 남은 두 사람은 그제야 안도하며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웃음도 길지 않았다.
"크와아아!"
가까운 곳에서 오크의 괴성이 들려왔다.
"저놈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네."
"우리가 상대할 게. 너는 좀 쉬고 있어."
이미 많은 힘을 사용했을 강준우를 대신해서 권우철이 나섰다.
가만히 가진 내공을 가늠하던 그는 나타난 오크를 확인하며 세 사람에게 맡겼다.
고작 세 마리 정도라면 충분히 상대할 거라고 여겼다.
"매직 미사일!"
"노움!"
곧장 마법과 정령을 불러내는 두 사람을 뒤로한 강준우는 조금 전에 얻은 것을 살폈다.
유령보(幽靈步).
유령마제의 독문보법으로 마치 유령이 움직이는 것처럼 은밀하고 신묘한 움직임이 가능하다.
성취가 오를수록 은밀함이 극대화되며 모습을 감추는 것이 가능하다.
조금 전에 김연희를 인질로 잡은 놈을 상대하면서 얻은 보법인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났던 그놈이 무인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웠지만, 이런 보법을 얻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설명만 봐서는 나쁘지 않은 보법인 것 같았다.
특별한 제약이 없는 걸로 봐서 정파의 무공 같지도 않았다.
'유령마제라.'
사파나 마교쪽 인사 같았다.
별호만 보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마제라는 것 자체가 붙기 힘든 별호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점창을 확인한 그는 생각보다 높은 등급에 깜짝 놀랐다.
'S등급?'
부족했던 보법이 이런 식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아직 B등급 무공까지만 열어낸 그로서는 이런 식으로 상대의 능력을 얻어낼 수 것을 반겼다.
'그냥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힘을 얻는 게 더 빠르겠는데?'
높은 등급의 무공을 쉽게 익힐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원하는 대로 능력을 강탈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운이 좋았지만, 힘들게 상대하고도 능력을 얻지 못 하는 경우도 염두에 둬야만 했다.
실제 네 명을 쓰러뜨렸지만, 얻은 것은 유령보라는 S등급의 보법이 전부였다.
'앞으로 보법에 관한 이해도도 높여야 하나?'
천마신공을 올리기 위해서는 심법에 대한 이해도가 필요했다.
다른 무공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관련된 기초적인 무공의 이해도를 높여야 높은 성취로 오르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부족한 부분을 채웠으니, 아낀 포인트로는 관련된 이해도를 높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대충 생각을 정리한 오크를 상대하고 있는 셋을 확인하며 사용한 내공을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
***
"허억. 허억."
남은 내력을 쥐어짜며 미친 듯이 내달린 사내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뒤를 쫓아오는 놈은 없었다.
뒤늦게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놈의 손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가 처음에 얻은 능력이 바로 S등급의 신법이었다.
먼 거리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뛰어난 신법으로, 가진 무공들 중에서 가장 높은 등급인 만큼 그것과 내공 심법만 주력으로 올린 상태였다.
이미 충분한 거리를 벌린 만큼 강준우를 따돌리는 것은 당연했지만, 사력을 다한 그의 표정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미친! 그 조폭 새끼랑 비슷한 놈이 더 있을 줄이야."
그가 알고 있는 가장 강한 놈과 비슷한 힘을 가진 놈이 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런 놈을 몰라보고 그렇게 함정을 팠으니, 당하는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그가 처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마음에 맞았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더 이상 갈 곳도 없었다.
'씨발!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가진 내공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위험한 동굴 속에서 내공까지 없다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무리에 끼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낯선 자를 쉽게 받아줄 곳은 없다고 봐야 했다. 오히려 남은 포인트나 능력을 노리고 죽이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후우."
막막함에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힘들게 목숨을 부지했다지만, 앞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절망했다. 하지만 갑자기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와 화들짝 놀랐다.
"어? 사람이네?"
"……."
갑자기 나타난 사람의 모습에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지금 상황에서는 오크보다 더 마주치기 싫은 게 바로 사람이었다.
지친 그의 모습을 살핀 자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그는 지친 사내를 바라보며 해맑게 물었다.
"여기서 뭐해요?"
"아……"
"아?"
짧은 순간 이렇다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 사내는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자각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여차하면 앞에 있는 놈을 처리할 생각이었지만, 그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씨발, 여기에서 혼자 움직인 것만 봐서는……'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엇보다 그의 뒤로 일행으로 보이는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야?"
"어? 어. 길을 잃은 사람을 발견한 것 같아서."
"…… 그러네. 아니면 뒤에 꼬리가 붙어 있나?"
김기철의 말에 상대를 확인한 박형선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그 표정을 확인한 자는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두 사람이 보인 웃음은 그동안 그들이 지어보였던 웃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먹잇감을 바라보는 눈빛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생각은 길지 않았다.
이제 와서 지친 기색을 숨기기도 힘들었고, 도망가는 것도 요원해 보였다.
멀쩡한 그들의 모습에 그는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도, 도와주세요."
"……."
짧은 순간 달라진 상대의 반응에 김기철은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느새 무릎을 꿇은 사내는 그를 향해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습격을 당했어요. 이상한 놈들한테 공격을 당해서 일행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흐음. 그것 참 안 됐네요."
불안해하면서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행동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김기철은 오히려 그런 그의 모습에 흥미를 가졌다.
"우리를 공격한 놈들이 꽤 많은 포인트를 가지고 갔을 거예요."
"많은 포인트? 그걸 어떻게 알아?"
"포인트를…… 몰아줬던 놈이 그놈 손에 죽었거든요. A등급 무공을 열려고 모아두고 있어서 확실해요."
"……."
"도와주세요. 많은 포인트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그놈들 복수만 하면 충분합니다. 정말이에요."
대뜸 하는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구미가 당기는 소리였지만, A등급의 무공을 열기 위해서 포인트를 모을 정도의 실력자가 당한 거라면 그들에게도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굳이 모험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냥 눈앞에 있는 먹이를 손에 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내의 말에 김기철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참…… 안 됐네. 근데, 우리도 도울 여력이 안 돼서."
"자, 잠깐만요!"
"……."
"그놈들 사이에 연예인이 있어요."
"연예인?"
"예. 여자 연예인이요! 엄청 예쁜 년이었어요. 그놈들을 잡으면 그년을 노리개로 쓸 수 있을 거예요."
"……."
"엄청 이름이 뭐였더라…… 맞아! 백선화! 백선화라고 알죠? 연기자 백선화!"
"배, 백선화?"
뜬금없이 등장한 이름에 김기철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박형선도 놀란 눈으로 김기철을 바라봤다.
두 사람 모두 그녀가 누구와 함께 움직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들의 행보를 전해들은 김기철은 다급히 물었다.
"같이 있는 놈들이 모두 몇 명이었지?"
"…… 세, 셋이요. 한 놈은 방패를 들고 있었고, 한 놈은 무공을 썼어요. 여자 한 명도 있었는데 그년도 꽤나 반반했어요."
"맞는 것 같은데?"
"씨발, 이렇게 그놈 소식을 알게 되네."
"……."
반기는 듯하면서도 걱정이 가득한 말투였다.
알 수 없는 김기철의 반응에 말을 꺼낸 사내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잘하는 짓인가?'
일전에 마주한 놈들과 이들을 싸우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 틈을 노리고 도망갈 생각이었다. 지금 그가 살아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놈들. 지금 어디 있지?"
"……."
"어디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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