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화
<복잡한 동굴 속>
우연찮게 만난 자들도 일전에 상대한 괴물 같은 놈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사내는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에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들도 그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적의를 가지고 있는 듯한 반응에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안내를……"
"지금 죽기 싫으면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럼 살려주는……"
스르릉.
별다른 말없이 검을 꺼내는 김기철의 모습에 사내는 급히 뒤를 가리켰다.
"이쪽으로 계속가면 놈들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흐음. 이쪽으로?"
"길은 제가 안내 할…… 크윽."
말을 이어가던 그는 목을 파고드는 차가운 날붙이에 말을 잇지 못 했다.
김기철은 스스럼없이 그의 목숨을 취했고, 사내는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 하고 무너져 내렸다.
"어떡하려고?"
"어쩌긴? 그놈하고 만나봤자 좋을 건 없잖아?"
"그렇기는 하지. 근데 어디있는 지는 왜 물었어?"
지금 강준우와 부딪쳐봤자 좋을 건 없었다.
그저 조금 운이 좋은 놈인 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부딪친 놈은 생각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 쓰러진 놈들의 일행을 잡은 걸 보면, 전보다 더 강해졌다고 봐야했다.
동굴에서 활동하는 놈들을 처리할 정도로 위협적인 놈인 것은 분명했다.
"그래도 마냥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 무슨 소리야?"
이곳에서 계속 지낼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고블린들이 있던 곳에서 빠져나갔던 것처럼 결국 이 동굴을 벗어날 게 분명했다.
마냥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김기철은 불안했다.
이미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만큼 만에 하나라도 다시 만난다면 필연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그놈을 상대할 수 있을까?"
"…… 우리가 상대할 필요는 없어."
"좀 알아듣게 말해라."
"우리 말고 다른 놈이 있잖아. 그놈만큼 싸가지 없는 놈이."
"……."
김기철의 말을 곱씹던 박형선의 눈이 커다래졌다.
뒤늦게 그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민국이를 말하는 거야?"
"그래. 정민국이 지금 눈에 불을 켜고 그놈들을 찾고 있잖아."
"……."
정민국은 김연희와 권우철을 찾고 있었다.
그들과의 관계가 틀어진 그는 언젠가 그들과 만나서 자신의 힘을 보여줄 거라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하긴, 민국이 그놈도 강준우라는 놈한테 좋은 감정은 없었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박형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기철은 그런 그의 모습에 비열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놈이랑 강준우랑 싸우게 만들면 볼만하겠지?"
"민국이랑 그놈을 붙인다고?"
김기철의 생각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다시 만난 정민국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힘을 내보였다.
정민국 역시도 고블린을 통해서 힘을 키운 경우였다.
처음으로 동굴에 진입한 사람들 중에 한 명으로, 오크들에게 쫓기면서 도망을 간 곳이 막혀 있던 다른 입구였다.
고블린들에 의해서 사람들이 전멸당한 곳으로, 그는 그곳에서 힘을 키웠다.
그에게는 천운이었지만, 그만큼 악에 받쳐 있었다.
나름 믿었던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단단히 벼르고 있던 그는 독한 마음으로 고블린들의 수를 줄여 나갔다.
그렇게 손에 넣은 혈랑도법의 힘.
차근차근 포인트를 모으며 혈랑심법과 도법의 성취를 높여나갔고, 결국 강한 힘을 손에 넣은 것이다.
강해진 정민국은 박형선을 비롯한 무리들과 마주했다.
그들을 통해서 권우철과 일행들에 관한 소식을 전해들었고, 다시 그들을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강준우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정민국.
두 사람을 붙인다는 김기철의 생각이 그렇게 허무맹랑하지만은 않았다.
"근데, 그게 가능할까?"
"죽은 놈이 그랬잖아. 저쪽에 그놈들이 있을 거라고."
"…… 어차피 그놈은 정민국이 상대하겠지. 우리는 남은 셋만 상대하면 되잖아? 그 과정에서 두 놈 중에 한 놈이 죽으면 더 좋고."
결국, 김기철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제법 강하다고 생각되는 두 사람이 서로 적대하다가 쓰러지는 것.
동귀어진을 바라는 그의 말에 박형선도 수긍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강준우가 지치면 우리한테도 기회가 될 테니까."
"바로 그거지!"
"그럼 지금 바로 움직일 거야?"
"늦어져서 좋을 건 없잖아? 형선이 네가 정민국한테 이 사실을 알려라."
"알았어. 지금 찾아볼 게."
"다시 여기로 와. 나는 준비하고 있을 게."
"준비라니?"
"받은 건 다시 되돌려 줘야지. 이번에 좋은 걸 얻었으니까."
"……."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하지만 박형선은 개의치 않으며 정민국을 찾았다.
그를 이용하는 것은 미안했지만, 강준우라는 후환을 처리할 수 있다면 그런 미안함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
"도망간 놈은 그냥 둬도 괜찮은 거야?"
"어쩔 수 없잖아."
"내가 헤이스트라도 걸어줄까?"
"네가 뛰어가는 건 어때?"
"……."
인질로 잡혔다는 사실이 못내 억울했는지 김연희는 전과 다르게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를 쫓는다고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괜히 힘을 쏟느니 차라리 오크를 사냥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만 움직이자고."
"오크들 잡으러 가는 거야?"
"다들 몸 상태는 어때?"
"나는 괜찮아."
"나도."
이미 소진한 힘은 모두 회복했다.
모두 내색하지 않았지만, 도망간 놈이 다른 무리를 끌고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일전에 당한 것을 되돌려줄 생각이었지만, 그자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미 모든 힘과 체력을 회복한 만큼 다시 움직여서 오크를 상대하는 게 나았다.
"노움!"
백선화는 다시 노움을 불렀다.
정령을 통해서 인근에 있을 오크를 찾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행을 이끌었다.
"우리는 이쪽에 있는 놈들을 상대할 게."
"나는 저쪽인가?"
"거기에 좀 많은 놈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아."
"조심해."
"그래. 너도."
강준우는 그들과 따로 떨어져서 다른 오크들을 찾았다.
'유령보라. 우선 저놈들한테 사용해봐야겠지?'
오크들을 상대하면서 S등급의 보법을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얼마나 큰 효과를 보일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등급이라면 충분히 위력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기를 발로 내보내자, 그의 몸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어색했는지 매끄러운 움직임을 보이지는 못 했지만, 확실히 귀음신법보다 더 복잡한 움직임이 가능했다.
조심스럽게 유령보를 펼친 그는 모여 있는 오크들을 발견했다.
백선화가 찾은 놈들로, 한창 오크와 싸우고 있는 일행과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었다.
강준우는 그들을 발견하기 무섭게 보법을 밟으며 거리를 좁혀갔다.
우선 유령보에 익숙해질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가 근접할 때까지 놈들은 그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 했다.
'확실히 S등급이라 다르다는 건가? 고작 1성인데 이렇게 효과가 좋다고?'
그는 모두의 눈을 속이면서 김연희의 뒤를 잡았던 놈과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아직까지 어설펐지만, 오크들은 그를 발견하지 못 했다.
암습에 최적화된 보법 같았다.
은밀한 검법만 얻는다면 완벽한 살수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놈들의 주변을 맴돌던 그는 검을 꺼내들며 기운을 흘렸다.
유령보를 통해서 줄어드는 내공을 가늠하며 오크의 뒤를 잡았고, 놈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따로 검풍을 일으키지 않아도, 충분히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오크라는 놈이 너무나 쉽게 쓰러졌다.
놈이 죽는 순간까지 옆에 있는 놈들은 그의 존재를 찾지 못 했지만, 공격과 함께 강준우의 모습이 드러나자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크와아아!"
괴성을 내지른 놈들의 도가 그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그대로 목을 베어낼 듯한 공격이었지만, 유령보를 밟자 그의 몸이 연기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부우웅. 부우웅.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흘려내는 강준우의 움직임.
보법 하나만 바뀌었을 뿐이었지만, 공격을 피하는 행동이 더 수월해졌다.
빠르게 바뀌는 시야와 함께 그의 몸이 주변을 포위한 오크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우와. 이건 완전 신세계네.'
마냥 은밀하고 빠르게 움직였던 귀음신법이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것 같은 보법 같았다.
오히려 그가 유령보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흔들렸다.
촤아악.
오크 전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끼를 휘둘렀다.
거대한 도끼가 그의 머리를 쪼갤 듯이 꽂혔지만, 뒤늦게 보법을 밟자, 그의 몸이 다시 연기처럼 흩어졌다.
은밀함은 기본이고, 뛰어난 회피까지 가능했다.
상승 보법의 위력을 여실히 느낀 그는 다시 검을 휘두르며 놈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고작 1성의 보법만으로는 이미 드러난 모습을 감추기는 요원해보였지만, 놈들의 공격을 피해내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부우웅. 콰직.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며 검을 휘두르자, 오크들이 무기력하게 쓰러져 나갔다.
오히려 검풍을 사용하는 것보다 보법을 밟아가며 공격을 내지르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비록, 놈들을 쓰러뜨리는 시간은 더 길어졌지만, 소진하는 내공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강준우는 유령보를 적극 사용했다.
S등급의 보법이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내공을 잡아먹지 않았다. 오히려 내공의 효율이 더 좋아진 느낌이었다.
그 움직임에 취해 검을 휘두르자, 오크들의 수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후우. 후우."
격한 움직임에 숨이 차올랐다.
몇 번의 호흡으로 여러 놈들을 처리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뒤늦게 호흡을 고른 그는 유령보의 장점을 여실히 느끼며 남아 있는 오크 전사를 바라봤다.
"크륵. 크륵."
그 많던 오크들 중에서 유일하게 서 있는 놈이었다.
놈도 그의 움직임에 당황했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강준우는 말 그대로 유령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신묘한 움직임에 놈은 다시 한 번 괴성을 내지르며 전의를 불태웠다.
"크아아아!"
전사라는 호칭에 걸맞은 행동이었다.
그 많은 놈들이 쓰러지면 겁을 집어먹을 만도 했지만, 놈은 도끼를 앞세우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부우웅. 콰앙. 콰앙.
분노한 놈의 도끼가 그를 휩쓸었다. 하지만 예의 신묘한 움직임은 놈의 공격을 모두 피해냈다.
그 와중에 내뻗은 일검이 오크 전사의 미간을 노렸다.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날아드는 일격.
일섬을 응용한 공격으로 놈의 목을 노렸지만, 확실히 전사는 평범한 오크들과는 달랐다.
푸욱.
순간 몸을 비튼 놈의 어깨에 검이 박혔다.
놈은 그런 강준우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근육에 강한 힘을 쏟아냈다.
단단하게 뭉쳐진 근육이 그의 검을 붙잡았다.
순간적인 오크 전사의 판단에 놀란 강준우는 곧바로 기운을 쏟아내며 놈의 몸을 베어냈다.
촤아악.
"끄아아!"
검신에 어린 회색빛의 기운이 오크 전사의 어깨를 잘라냈다.
아무리 힘을 더한다고 하더라도 검기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순간, 강한 힘을 뽑아낸 그의 검이 오크 전사의 목을 스쳤다.
"크륵."
결국, 놈이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싸우는 과정에서 터트린 포효가 다른 놈들을 불러낸 것 같았다.
멀리서부터 시작된 커다란 괴성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뭐지? 오크들 같은데?'
호흡을 고른 그는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다른 놈들이 나타난다면 남은 세 사람이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다른 놈들과 싸우고 있을 그들을 대신해서 놈들의 방향을 바꾸는 게 중요했다.
'뭐, 뭐야?'
호흡을 고르고 몰려드는 오크들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몰려드는 오크들의 모습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타난 오크들은 자연스럽게 모인 놈들이 아니었다.
뒤에 수많은 오크를 대동하고 움직이는 한 사람의 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문제는 놈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는 점이었다.
'저놈은 김기철?'
김기철이 확실했다.
그가 수십 마리의 오크와 오크 전사를 달고 달려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통로를 가득 채운 오크들.
김기철은 놀란 듯 그와 오크를 바라보는 강준우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선물이다! 이 새끼야."
"……."
크게 소리친 그는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며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행동이 낯설지 않았다. 일전에 그가 했던 것처럼 몹을 몰아오면서 복수를 한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김기철의 움직임이었다.
그는 함정을 판 놈들 중에 유일하게 빠져나간 놈이 사용했던 그 경신법을 펼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강준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많은 놈들이 김기철의 뒤를 쫓았지만, 뒤따르던 다른 놈들은 미처 그를 따라가지 못 했다.
그렇게 남은 놈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아직 오크들과 싸우고 있는 권우철과 일행들이 있는 곳이었다.
[작품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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