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화
<살아남은 고수들>
되도록이면 누군가의 일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그냥 지나쳐도 될 일이었지만, 강준우는 결국 개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딱히 반일이라는 감정은 없었지만,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것 같았다.
'희생한 사람이 누구랑 닮아서 그런 건가?'
두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그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차피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놈들이라면 나중에도 위협이 될 것 같았다.
언제 싸울지 모르는 놈들이라면 이 기회에 수를 줄이고, 포인트라도 얻자는 생각이었다.
그는 이죽거리며 이런 상황을 즐기는 놈들의 뒤를 잡았다.
검기를 사용하는 놈이었지만, 극성으로 펼친 유령보를 눈치 채지는 못 했다.
아마도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 여럿인 그들인지라 누군가가 개입을 할 거라는 것은 애초에 생각하지도 않은 느낌이었다.
방심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강준우는 그렇게 일섬과 무영검을 펼치며 한 놈을 수월하게 죽일 수 있었다.
쓰러진 놈을 뒤로한 그는 또 다른 놈의 뒤를 잡았다.
"미노루. 위험해!"
쉬이익. 채앵.
"크윽."
앞선 자의 외침에 미노루라는 사내가 다급하게 그의 공격을 받아냈다.
'제법 실력이 있는 놈들인가?'
작정을 하고 날린 공격이었다.
은밀하게 날린 암습을 이렇게 막아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다.
확실히 검기나 도기를 사용할 수 있는 놈들이라 다른 것 같았지만, 강준우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남은 손으로 허공을 때리자, 미노루라는 사내의 몸이 꺾여나갔다.
"크흡."
몸속을 파고드는 낯선 기운은 강한 음기를 품고 있었다.
절로 몸이 떨려오는 한기에 상대는 괴로워했다.
너무나 쉽게 쓰러지는 동료의 모습에 도를 쥔 카에데라는 자가 다급하게 도를 휘둘렀다.
지금은 앞에 있는 동료를 구하는 게 먼저였다.
쉬이익.
먼 거리를 격하며 날아드는 도기.
하지만 그의 공격은 비슷한 기운에 부딪치면서 허공에서 터져나갔다.
"거, 검기!"
"이게 놀랄 기술인가?"
푸욱.
검기를 날리며 공격을 받아낸 강준우는 몸이 꺾인 자를 마저 처리했다.
내지른 검이 그대로 사내의 머리를 꿰뚫었고, 미노루라는 자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모두 다 나와!"
순식간에 두 명의 고수를 쓰러뜨리자, 처음 난입한 카애데라는 사내는 크게 소리쳤다.
지금은 앞에 있는 놈을 상대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주변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에 강준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인근에 다른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이들과 일행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다.
'따로 움직이던데. 설마, 일부러 그런 건가?'
그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예상외의 상황에 혀를 찬 그는 남은 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른 놈들이 합류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이들의 수를 줄일 생각이었다.
"뭐하고 있어? 너희들도 도와!"
위협적인 강준우의 모습에 카에데는 뒤에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었다.
그의 외침에 뒤에 있던 둘도 고개를 끄덕이며 힘을 끌어 올렸다.
마법을 사용하는 그들은 캐스팅을 이어나갔지만, 정작 강준우의 도움을 받은 두 사람은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하아. 저런 의리 없는 새끼들!'
따로 돕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고맙다는 말이라도 전할 줄 알았다.
그들은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며 뒤로 내달렸고, 앞에 있던 카에데는 그 모습에 입술을 비틀며 이죽거렸다.
"대단한 국민성이군."
"저 새끼들이 염치없는 놈들인 것뿐이지."
"흥! 네놈들은 원래부터……"
"곧 뒤질 놈이 말이 많네. 사과도 없는 원숭이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시간 끌 생각하지 말고 덤벼!"
"……."
정곡을 찌르는 말에 카에데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앞에 있는 자는 섣불리 움직인다고 쓰러뜨릴 상대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은 그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이대로 부딪쳐봤자 서로가 손해일 것 같은데?"
"그래서?"
"처음부터 남의 일에 끼어든 우리 잘못이다. 이미 그 대가는 충분히 받은 것 같은데…… 여기에서 끝내는 게 어때?"
"이런 참신한 개소리는 너무 오랜만이라서."
"……."
민노식 이후로 이렇게 계산적인 놈은 처음인 것 같았다.
그의 말에 뒤에 있던 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대로 그가 물러난다면 그들의 안위는 보장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카에데의 말에 그들은 말을 잇지 못 했다.
"동료들이 오면 너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다."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 과한 자신감이군."
지금은 일부러라도 허세를 보여야만 했다.
실제로 앞에 있는 자를 처리할 자신은 있었다.
아무리 수가 많더라도 이미 천마기멸격의 위력을 봤던 강준우로서는 앞에 있는 카에데 정도의 실력자가 여럿이어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문제는 그 힘을 쏟아내고 난 이후겠지만. 그래도 저렇게 말이 길어진 걸보면…… 불안한 거겠지?'
이렇게 먼저 나선 걸로 봐서 뒤따르는 자들의 실력은 앞선 자를 능가하지 못할 것 같았다.
몇몇이 그와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상대할 수 있었다.
강하게 나오는 그의 말에 카에데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정말로 자신이 있다는 소린가?'
충분히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뒤늦게 나선 게 분명했다.
이 정도의 강자가 아무런 계산 없이 나섰을 리는 없었다.
검기를 사용하며 자신과 비슷한 실력의 동료를 처리한 것을 보면 이미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카에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속속 도착하는 동료들의 모습에 안정을 되찾았다.
'뭐야? 이놈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수가 더 많았다.
그가 확인했던 놈들보다 배는 더 많은 것 같았다.
'일부러 이렇게 움직인 건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보다 이렇게 움직여야 더 많은 놈들을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시비가 인다면 주변에서 서로 도울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런 도움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다.
놀란 듯한 강준우의 모습에 카에데의 표정이 밝아졌다.
"생각보다 수가 많지?"
"……."
"그래서 말 했잖아. 우리끼리 싸워서 좋을 건 없다고."
다시 자신감을 되찾은 그의 모습에 강준우는 실소를 흘렸다.
"조금 힘은 들겠지만…… 네놈 목은 가지고 갈 자신은 있지."
"……."
진지한 그의 표정에 카에데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 말을 경시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같이 움직인다고 하지만, 그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저 뜻이 맞아서, 조금 더 쉽게 상대하기 위해서 함께 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싸늘한 강준우의 말에 고심하던 카에데는 그를 향해 제안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
"보아하니 너도 쾌검을 쓰는 것 같은데. 대결을 펼치는 건 어때?"
"대결? 미친!"
뜬금없는 말에 강준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뻔히 보이는 수작에 실소가 흘러나왔지만, 정작 그 제안을 한 카에데는 진지했다.
카에데 역시 쾌도를 주력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강준우 역시 쾌검을 사용하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놈이라면 피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개수작이냐?"
"자웅을 겨루자는 뜻이다. 일격을 나눠서 승부가 나지 않으면 물러나는 걸로 하지. 어때?"
일격을 겨루고 물러나자는 말.
적어도 서로 헤어질 명분으로는 충분했다.
카에데라는 놈과 부딪쳐서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일격에 그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카에데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구실을 주면 저놈도 쉽게 물러나겠지? 나도…… 면을 세울 수 있을 테고.'
이런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강한 놈이라도 이만한 사람들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던 강준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나름 좋은 마음으로 나섰지만,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이제 와서 굳이 목숨을 걸 이유는 없었다.
그 반응에 카에데의 표정이 밝아졌지만, 정작 그 표정을 확인한 강준우는 찝찝한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뭐지?'
굳은 표정의 강준우를 뒤로한 카에데는 마저 설명을 이어갔다.
"규칙은 간단하다. 거기 있는 너와 내가 일격을 주고받는 거다. 그리고 결과를 받아들이고 물러나는 거지."
"말은 그럴듯하네."
뒤에 있는 놈들을 믿을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그 뜻을 알고 있는 카에데는 뒤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크게 외혔다.
"모두 들었지? 나와 이자의 대결이다."
"대, 대결이라니?"
"피해를 최대한 줄일 거다. 결과에 승복할 수 있도록!"
"아, 알았어!"
일방적인 통보와 같았지만, 그들은 카에데의 말을 존중했다.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서로 마주한 둘은 기회를 노렸다.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네. 후우.'
순간 잘못된 판단으로 터무니없는 짓에 휘말린 것 같았다.
옅은 한숨을 내쉰 그는 긴장한 눈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카에데라는 자를 바라봤다.
"쇼부다!"
"……."
크게 소리친 카에데는 바닥을 박찼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그의 손이 도로 향했다.
강준우 역시 기운을 끌어 올리며 준비를 갖췄지만, 그 순간 그의 귓속에 날카로운 음성이 파고들었다.
- 약속은 지켜라!
[천마신공의 공능이 상대의 피어를 이겨냅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찝찝함의 정체는 이런 꼼수였던 것 같았다.
전음을 통해 움직임을 묶고 어떻게든 상황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생각인 것 같았지만, 강준우는 그런 꼼수에서 자유로웠다.
어느새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까지 근접한 카에데는 도를 뻗었다.
발도술을 이용한 극쾌의 도격으로 상대를 베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강준우는 발을 내디디며 청강검을 빼들었다.
쿠웅.
'크윽! 이건?'
강준우보다 앞서 도를 꺼낸 카에데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졌다.
가진 내공을 모두 쏟아내며 가장 빠른 일격을 날리려고 했지만,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기맥을 파고들며 움직임을 방해한 것이다.
천마군림보였다.
카에데가 피어를 사용한 것처럼 강준우도 눈에 보이지 않는 수를 사용했다.
그 역시도 처음부터 이런 방법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특별할 것은 없었다.
이왕이면 적이 될 놈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게 나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은밀하게 이런 수를 쓴다는 게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먼저 편법을 쓴 놈은 앞에 있는 일본 놈이었다.
먼저 도를 뻗던 상대가 멈칫거렸고, 그 순간의 머뭇거림이 승부를 갈랐다.
서걱.
강준우는 정확히 그를 벴다.
일섬을 섞은 무영검의 일초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찰나의 순간, 움직임을 멈춘 카에데였지만, 남은 사람들이 그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강준우의 몸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크헉. 더, 더러…… 끄윽."
카에데는 억울해하며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목에 핏물이 차오르자 말을 잇지 못 했다.
강준우의 검은 그의 목을 베어냈고, 경악한 그가 뒤로 넘어가며 움직임을 멈췄다.
촤아악.
검신을 털어낸 강준우는 놀란 눈으로 쓰러진 카에데를 바라봤다.
[새로운 무리(武理), 경신(輕身)을 얻었습니다.]
'무리(武理)?'
생각지도 못한 것을 손에 넣었다.
카에데라는 자 역시 그와 비슷한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이미 발경이라는 무리를 가진 강준우였다.
이런 힘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발경을 얻으면서 검기를 펼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졌고, 수월해졌다.
펼치는 무공 대부분이 발경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리가 있고, 없는 것이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온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이런 식으로 무리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까다로운 상대는 처리할 수 있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카, 카에데가 한 방에?"
"……."
쓰러진 카에데의 동료들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말을 잇지 못 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카에데는 이렇게 약하지 않았다. 적어도 일격에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몇몇이 동요하며 무기를 빼들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고, 강준우는 새로 익힌 경신의 힘을 염두에 두며 천천히 기운을 끌어 올렸다.
[작품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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