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1화
<살아남은 고수들>
"자, 잠깐!"
갑자기 험악해진 분위기에 개중에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그들을 가로막았다.
"뭐야? 쿄헤이?"
"공정한 대결이었어. 카에데를 욕보일 생각은 아니지?"
"무슨 소리야! 여기에서 저놈을 그냥 놓아주자는 거야?"
"이미 약속했다. 저자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때 싸워도 충분하다."
"크윽."
울분을 참지 못하는 놈들의 모습이 우스웠다.
마치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춘 놈들과 싸운다면 큰 실익은 없을 것 같았지만, 상황은 또 달라져 있었다.
'경신이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가 관건인데.'
카에데라는 놈이 보인 모습만 봐서는 쾌도술과 움직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직 제대로 된 힘을 확인해보지 못한 상황에서 저들과 부딪치는 것도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소진한 내공도 마냥 무시할 수 없는데.'
몇 번의 검기와 천마군림보를 사용했다.
스무 명에 가까운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천마기멸격이라는 힘을 펼쳐야 할 것 같았지만, 문제는 곧바로 쓰기에는 부담이 된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우선 부딪친 이후의 상황에서는 천마기멸격을 사용할 기회가 없을 지도 몰랐다.
'확실히 부족한 건…… 내공인가?'
천마신공의 성취를 올려서 내공의 총량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효율이 좋지 않았지만, 영약을 통해서 내공의 총량을 올리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할 것 같았다.
잠깐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강준우는 이어지는 쿄헤이라는 자의 질문에 상념을 떨쳐냈다.
"어떻게 할 거지?"
"뭐…… 약속한대로 살려주지."
"뭐, 뭐라고? 살려줘? 누가? 네가?"
"저런 헛소리를 듣고 우리가 참아야 하는 거냐?"
"죽은 놈이 부탁하더라고. 이대로 물러나주면 안 되겠냐고."
"개소리!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소리냐?"
"그놈에 대해서는 함께 한 놈들이 더 잘 알지 않을까?"
터무니없는 말로 치부하기에는 그들 역시 카에데라는 놈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황당해하며 소리치던 자는 말을 아꼈고, 강준우는 마저 말을 이어갔다.
"산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죽은 사람 소원하나 못 들어줄까?"
"……."
뻔뻔한 강준우의 말에 그들은 잘게 몸을 떨었다.
치욕적인 말이었지만, 그들은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강준우의 강한 자신감이 마음에 걸렸다.
이미 쾌도로는 상대할 자가 없다고 생각되는 카에데를 쾌검으로, 일검에 죽인 사람이었다.
아직도 멀쩡한 모습을 보면 여력이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
모두가 힘을 합치면 앞에 있는 놈을 쓰러뜨릴 수 있을 지도 몰랐지만, 그 사이에 큰 희생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죽는 사람은 자신이 될 지도 몰랐다.
아무리 동료가 죽었다지만, 목숨을 걸 정도로 유대감이 깊은 것은 아니었다.
"선택은 너희 몫이다. 덤빌 거냐?"
"……."
싸늘한 말과 함께 뿜어내는 기파에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차갑게 가라앉은 강준우의 시선을 은근히 피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과감하게 몸을 돌렸다.
역시나 자신감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행동에 남아 있던 자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몇몇은 갈등을 하고 있었지만, 먼저 나서기에는 상대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았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덤비는 놈은 없겠지?'
태연한 척 걷고 있는 강준우였지만, 그의 신경은 온통 뒤에 있는 놈들에게 집중돼 있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춘 놈들이 덤빈다면 고전을 면치 못할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금 거리를 벌렸다는 점이었다.
여차하면 모습을 감추고, 암습을 통해서 각개격파를 할 수 있을만한 거리는 확보한 것 같았다.
'이대로 그냥 넘어가는……'
자신의 허세가 통한 것 같았지만, 그 시간도 길지 않았다.
모두가 같은 생각일 수는 없었다.
개중에 한 명이 분기를 참지 못 하고 공격을 날렸다.
쉬이익. 콰과광.
마법을 사용하는 자였다.
비교적 뒤에 있었던 그였기 때문에 이렇게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건지도 몰랐다.
"미친 자식! 뭐하는 거야?"
"저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있으라는 건 아니지?"
"이런! 놈이 사라졌어!"
"사, 사라지다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강준우의 모습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이대로 사라지면 다행이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꽤나 힘든 상황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강준우를 찾기 위해서 주변을 주시했다.
그 순간, 처음 그에게 공격을 날렸던 자의 몸이 꺾여나갔다.
"크윽."
"무, 무슨 일이야?"
"으으으으."
사시나무 떨듯이 덜덜 떠는 동료의 모습에 모두가 불안한 눈으로 그를 살폈다.
"치, 치료! 치료를 해. 뭐라도 해 봐!"
"아, 알았어."
무리 중에 치유 능력이 있는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녀가 손을 뻗기도 전에 무언가가 그녀의 미간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쐐에엑. 터엉.
"크윽."
쿄헤이는 간신히 날아오는 공격을 쳐냈다.
치유를 하려던 여자는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고, 쿄헤이의 표정이 절로 구겨졌다.
'이 위력적인 공격은 또 뭐지?'
공격을 쳐낸 팔이 얼얼했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쳐냈다지만, 다음 공격을 다시 막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저, 저기다!"
"다시 사라졌어."
일양지를 쏘아낸 강준우가 잠깐 드러났지만, 그는 다시 모습을 감췄다.
눈앞에서 사라질 정도로 그의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리라는 것 자체가 죄다 사기적인 힘인가?'
경신이라는 무리도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유령보와 같은 보법은 물론이고, 팔을 내뻗는 움직임 하나하나를 가볍게 만들었다.
당연히 지금처럼 모두의 눈을 속일 수 있을 정도의 움직임이 가능했다.
"크윽."
"뭐, 뭐야?"
"공격이 안 보여! 이 새끼. 무슨 짓을 벌이는 거지?"
무형의 장력에 사람들이 쓰러져 나갔다.
대부분이 마법을 익힌 자들이었다.
강준우는 마법과 치유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자들을 중심으로 귀음신장을 쏟아냈다.
유령보로 모습을 숨긴 채, 원거리에서 날아드는 무형의 장력에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놈이 있을만한 곳을 노려!"
"그게 무슨 소리야?"
"숨어있을 만한 곳을 공격하라는 거야!"
"…… 아, 알았어."
"그냥 넘어갈 수 있었는데, 왜 이런 사단을 만든 거야! 저 병신은!"
처음 공격을 감행한 자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움직임을 멈춘 그 모습에 남은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신출귀몰한 움직임을 보이며 공격을 하는 상대를 잡는 것이었다.
***
"허억. 허억."
"이, 이래도 괜찮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두 사람은 그곳에서 한참 벗어난 이후에야 걸음을 멈췄다.
터질 것처럼 뛰는 가슴에 호흡을 골라야만 했다.
이준희는 그제야 걱정이 된다는 듯이 물었고, 고진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어떡해? 거기 있으면…… 후우. 죽었을 건데."
"그, 그래도. 그 사람은 우리를 도우려고……"
"……."
이준희의 언급에 그는 말을 잇지 못 했다.
스스로도 창피함을 느끼고 있었다.
도움을 주려고 개입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도망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부끄러움보다는 살아남는 게 먼저였다.
'씨발! 그만한 고수가 나타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도기를 사용하는 일본인의 등장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불안해하는 이준희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그 자리에 있었으면 오히려 우리가 짐이 됐을 거야."
"지, 짐? 짐이라니?"
"그래. 웨어 울프를 상대하느라 가진 마나를 다 소진했잖아.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어떡해?"
"……."
"너는 여력이 남아 있었던 거야?"
"나도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그래. 우리도 어쩔 수 없었어."
고진규는 자기 합리화를 하듯 뇌까렸다.
그 역시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 호흡을 고른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무작정 내달린 상황이라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이준희의 울음이 그를 일깨웠다.
"흐윽. 상현이가 그렇게 죽다니. 흐윽."
뒤늦게 그의 죽음이 실감났는지 그녀는 흐느꼈다.
그런 이준희의 모습에 고진규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쩔 수 없었어. 네 잘못이 아니야."
"흐윽."
"상현이도 우리가 살기를 바랐을 거야. 그러니까…… 꼭 살아남자."
조심스럽게 어깨를 다독이는 그는 다시 이준희를 이끌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도망을 온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멀어지는 게 좋았다.
'소진한 마나를 채우는 것도 쉽지 않겠어. 그나마 준희의 능력이 좋으니까 어떻게든 버틸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이준희의 능력이라면 죽은 사체를 움직일 수 있었다.
마력만 받쳐준다면 충분히 웨어 울프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미 많은 마나를 소진한 그녀인지라 지금은 제대로 된 힘을 낼 수 없었다.
우선은 여기에서 멀리 벗어나야만 했다.
조금 안정이 된 그녀의 모습에 그는 이준희의 손을 잡으며 다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도 길지 않았다.
"크르르."
전방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지긋지긋하게 만날 놈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노, 놈들이야!"
"……."
놀란 이준희가 크게 소리쳤지만, 고진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놈들을 만난 것이다.
그는 그녀를 뒤로 이끌며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는 늑대들을 노려봤다.
과장을 조금 더하면 집채만 한 덩치를 가진 놈들이었다.
몸을 일으키면 어지간한 성인 남성보다 더 큰 몸집을 가진 놈들이 전하는 위압감에 절로 다리가 떨려왔다.
"어, 어떡하지?"
"내가 한 놈을 쓰러뜨릴게. 놈이 죽으면 네가 그놈을 일으켜서……"
"마력이 없어!"
"하아. 쓸데없는 년."
다급한 상황에 좋은 소리가 나올 리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내뱉은 고진규의 말에 이준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앞에 있는 고진규뿐이었다.
"어, 어떡하지?"
"마력이라도 채워! 내가 어떻게든 시간을 벌 테니까."
"아, 알았어."
그래도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다행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상점창을 열어서 최하급 단약을 손에 넣었다.
내공은 물론이고, 마력의 회복을 돕는 물건이었다.
그것을 삼키는 모습을 확인한 고진규는 곧바로 마법을 캐스팅하며 놈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크아앙!"
그런 그에게 한 놈이 달려들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의 눈빛에 옆에 있던 놈이 도약하며 그의 목덜미를 노렸다. 하지만 달려들던 놈은 그가 날린 매직 미사일에 튕겨져 나갔다.
"하압!"
콰앙.
다행히 제때 몸을 뒤집으며 바닥으로 내려섰지만, 마냥 당하고 있을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잠깐 간을 봤는지, 놈들은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다.
틈이 나면 그대로 달려들 것 같은 기세였다.
다섯의 늑대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놈들이 변신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저 늑대인 상태로 놈들을 처리하는 게 최선이었지만, 위협을 느끼면 놈들은 곧바로 모습을 바꿀 게 분명했다.
"크아앙."
점점 놈들의 공격이 거세졌다.
매직 미사일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마법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놈들은 조금씩 공격 횟수를 늘려갔다.
콰앙. 콰앙.
점점 터져나가는 매직 미사일의 수가 많아졌지만, 놈들의 수는 그대로였다.
"어떻게 됐어?"
"아, 아직!"
"무슨 마법이라도 써 봐. 지금은 이 새끼들을……"
"조, 조심해!"
콰앙. 촤아악.
그녀에게 말을 거는 사이, 우두머리로 보는 놈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놈을 견제하기 위해서 마법을 날렸지만, 달려든 놈은 다른 놈들과 다르게 그대로 공격을 뚫고 들어왔다.
놈의 발톱에 상처를 입은 고진규의 얼굴에 절로 구겨졌다.
이제껏 잘 버티던 그는 들려오는 소리에 남은 마나를 끌어올리며 그 힘에 대항했다.
"오, 오빠? 괜찮아?"
"…… 끄으으윽."
이준희는 이런 모습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마, 만월의 저주!'
이놈들에게 공격을 허용하면 나타는 증상이었다.
곧바로 저주를 풀어야했지만, 지금은 그 일을 해줄 수 있을 사람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그녀가 위기였다.
다른 늑대들이 고진규를 무시하고 그녀를 노리기 시작했다.
"크아앙!"
다시 한 놈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제는 끝이라는 생각에 이준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 순간, 앞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콰앙. 캐앵.
고통스러워하는 늑대의 소리에 눈을 뜨자, 한 사람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채 물었다.
"괜찮아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얼굴은 눈이 부셨다.
걱정이 가득한 낯선 남자의 모습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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