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5화
<고성에서의 임무>
임창현을 대신할 사람으로는 안드레이가 제격이었다.
비록, 그와 같이 대규모의 사람들을 이끌고 있지는 않았지만, 안드레이와 그 무리들이 가진 힘도 작아보이지는 않았다.
'니콜라이라고 했던가?'
일전에 만났던 안드레이의 친구라는 사람도 무리를 이끌고 안드레이와 함께하고 있었다.
'이걸로 다이스케의 안전은 대충 확보한 것 같은데.'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강준우는 다시 성을 바라봤다.
높다란 성벽만이 가득 들어왔다.
활짝 열린 성문과 그 뒤로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뱀파이어인 게 분명했지만, 놈들은 자리를 지킬뿐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지?"
"……."
몇몇은 성벽 앞의 공터에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놈들은 큰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성벽에서 시선을 뗀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곳곳에 자리 잡은 사람들.
생각보다 그들의 수가 더 많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힘은 경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대부분이 상당한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안드레이도 꽤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도 그와 크게 차이가 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 그의 눈에 익숙한 외형을 한 사람의 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음공을 사용하던 그 여자잖아?'
그녀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혼자 움직이던 게 아니었나?'
따로 다른 동료가 없는 걸로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 했다.
그때, 그에게 낯선 목소리가 전해졌다.
- 다시 보네요.
"……."
- 시선이 너무 강력해서요. 그런 눈빛은 너무 오랜만이라서.
- 그때는 신세를 졌어.
- 신세라니요. 작은 오해였을 뿐인데.
강준우의 말에 정은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잘못 엮인 것 같았다.
'그때 그냥 지나쳤어야했었어.'
마주한 강준우는 꽤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다이스케가 아니었다면 큰 낭패를 면치 못했을 게 분명했다.
아직도 그때의 일을 언급하는 그의 모습에 정은수는 마저 입을 열었다.
- 뱀파이어를 상대하는 동안에는 서로 싸울 수 없어요.
"……."
- 먼저 칼을 뽑는다면 모두의 표적이 될 거예요. 여기 있는 모두가 약속했죠.
- 표적이라.
- …… 그때는 오해라고 말했을 텐데요?
- 나도 오해를 한 것 같아서. 아직 그 오해가 풀린 것 같지는 않은 것 같고.
"……."
딱딱한 그의 말에 정은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전과 같이 다이스케와 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수가 더 늘어 있었다.
안드레이와 그 일행들을 모두 합치면 이곳에 자리한 무리들 중에서도 그 수가 많은 편에 속했다.
- 뭘 원하는 거죠?
- 글쎄.
- 다시 말하지만 나는 싸울 생각이……
확실히 자신의 뜻을 밝히려던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강준우에게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한쪽에 있던 무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기다려. 이봐!"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도 않았지만, 일련의 무리가 빠르게 성벽과 접근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성으로 접근한 사람은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있을지 모를 상황을 걱정해서 최대한 사람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싸워봐야 성벽 앞에 있는 뱀파이어들과 부딪쳤지만, 지금 나선 사람들은 그들이 아닌 더 안에 있는 놈들을 원하는 것 같았다.
나름 작정을 하고 움직이는 게 분명했다.
"하아압!"
선두에 선 자가 도를 꺼내들며 허공을 벴다.
그의 도에서 뿜어져 나온 도기가 정확히 성문을 스쳐 지나갔고, 커다란 굉음이 뒤를 이었다.
콰과과광.
상당히 강한 공격이었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성문 뒤에 있던 뱀파이어들이 쓸려나갔다.
성으로 달려든 자들의 갑작스러운 공격.
일격에 뱀파이어들을 쓸어낼 수는 없었지만, 그 공격과 함께 새로운 알림이 전해졌다.
**
고성에 모인 뱀파이어들이 광분합니다.
광란의 축제를 기다리는 그들이 피를 갈구합니다.
모인 인간들에 대한 적의가 강력해집니다.
목표 : 외성 장악. 외성의 뱀파이어 토벌.
전체 보상 : 내성으로 향하는 길 확보.
개별 보상 : 처리한 뱀파이어의 수에 따라 차등 지급.
**
새로운 임무가 생겨났다.
성벽 안에 또 다른 성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지만, 우선 안에 있는 뱀파이어들을 상대하는 게 먼저인 것 같았다.
가만히 있던 뱀파이어들을 깨운 놈들은 그대로 성문으로 향했다.
그들은 성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따로 성 안으로 들어서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활짝 열린 성문 앞에서 자리만 잡을 뿐이었다.
"치사한 놈들이네.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겠다?"
안드레이의 말처럼 그들은 그 자리를 지키며 공격을 이어갔다.
성문은 상당히 넓었지만, 그만큼 유리한 장소였다. 그곳에서 쏟아지는 뱀파이어들을 상대할 생각인 것 같았다.
쉬이익. 콰과광. 콰과광.
자리 잡은 그들은 곧장 성문 너머로 공격을 쏟아냈다.
예의 도기가 허공을 갈랐고, 함께 하던 자들도 검풍과 검기를 쏟아내며 뱀파이어들을 공격했다.
비교적 뒤에 자리 잡은 마법사들이 캐스팅을 한 마법을 날리면서 공격을 시작했다.
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약은 놈들."
"약아?"
"저놈들이 먼저 말을 꺼냈거든. 뱀파이어들하고 싸우는 중에는 서로 적대하지 말자고!"
"……."
그 약속을 먼저 꺼낸 자들이었다.
나름 상황을 주도하면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 같았다.
특히, 앞에 선 자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처음 도기를 날리던 자로, 그는 튀어나오는 뱀파이어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가진 힘의 대부분을 쏟아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막강한 힘을 사용하는 그 모습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 뒤에 있는 마법사들이 마법이 곧장 성문을 막았고, 다른 놈들은 일부만 공격을 감행하고 나머지는 지켜볼 뿐이었다.
몇몇이 사력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
뒤에 이어질 모습은 하나 밖에 없었다.
"이제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준비?"
"저렇게 벌집을 쑤셔대고 있는데, 벌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
"그, 그럼?"
"곧 물러나겠지. 흥분한 뱀파이어들을 떠넘기고."
"……."
그의 말처럼 한차례 기운을 쏟아낸 자들이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확인한 안드레이는 흥분하며 쌍욕을 내뱉었지만, 그보다 곧 있을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는 게 먼저였다.
"모두 모여! 이 골목에서 놈들을 상대한다."
"아, 알았어."
나름 지형지물을 이용할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은 안드레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에 있던 또 다른 무리들도 나름 방어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준우는 옆에 있는 다이스케를 향해 말했다.
"여기에서 버티고 있어."
"따로 움직이려고?"
"포인트나 많이 모아 놔."
"걱정하지 마.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마법은……"
"그래?"
말을 이어가던 다이스케는 급히 입을 닫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강준우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럼 마법이나 하나 더 배워 놔라."
"마, 마법?"
- 소리를 죽이는 마법.
"……."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다이스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리를 죽이는 마법?'
그 이유를 쉽게 떠올릴 수 없었지만, 비슷한 마법을 확인한 기억이 있었다.
'사일런스(silence)가 있었던가?'
고심하는 다이스케를 뒤로한 강준우는 안드레이를 찾았다.
"나는 따로 움직이지."
"따로? 그냥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게 좋지 않을까?"
"조만간 다시 합류하지."
"…… 그래. 조심해라."
"너희들도."
말을 마친 그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안드레이는 눈앞에서 사라지는 강준우의 모습에 놀랐지만, 앞에서 느껴지는 강한 살기에 정신을 일깨웠다.
"크아아아!"
"죽여라. 인간들을 잡아라!"
지금은 뱀파이어들을 상대하는 게 먼저였다.
그는 내기를 끌어올리며 달려오는 놈들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과광.
양손을 떠난 권기가 달려드는 뱀파이어들을 막아냈다.
그의 행동을 기점으로 다른 동료들도 공격을 이어가며 쏟아지는 뱀파이어들을 상대했다.
***
"후우. 후우."
"준비했던 대로 움직여. 너희들이 먼저 놈들을 막아. 우리가 회복할 시간을 벌어."
"알았어!"
알렉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의 외침에 그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한차례 강한 공격을 쏟아낸 자들은 비교적 뒤에 물러서서 기운을 채웠고, 멀쩡한 자들은 좁은 골목에서 달려드는 놈들을 막아냈다.
"나중에 이 일로 트집을 잡지는 않겠지?"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아니었어도 그렇게 행동할 놈들이 있었을 거야."
"그래도 괜히 트집을 잡히면……"
"그러니까 최대한 힘을 키워야지. 이번에 꽤나 많은 놈들을 잡았으니까, 그 포인트를 이용해서 능력을 키우라고."
"알았어."
그의 말에 남은 사람들은 획득한 포인트를 확인했다.
먼저 선수를 쳤다지만, 힘만 있으면 몇몇 항의는 충분히 무마시킬 수 있었다.
알렉세이도 손에 넣은 포인트를 확인하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
조금 얍삽했지만, 어차피 벌어질 일을 앞당기면서 상당한 포인트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환하게 웃던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살기?'
솜털이 곤두서는 낯선 느낌에 그는 급히 바닥을 박차며 소리쳤다.
"조심……"
콰과광.
미처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일행이 쉬고 있던 곳이 터져나갔다.
갑작스러운 폭음에 그를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미친! 무슨 짓이냐?"
"……."
그곳에는 검을 쥔 낯선 자가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흥! 약속을 깨고 공격을 해?"
"……."
접근하던 자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알렉세이의 말처럼 그들의 뒤를 치기 위해서 접근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가 미처 힘을 쏟아내기도 전에 그가 있던 곳에서 누군가가 먼저 공격을 감행했다.
문제는 공격을 날린 사람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는 점이었다.
'졸지에 내가 다 뒤집어쓰게 생겼잖아!'
억울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게 먼저였다.
눈치를 살피던 그는 곧장 뒤로 물러났다.
흥분한 알렉세이는 쓰러진 동료들을 확인하며 곧장 그의 뒤를 쫓았다.
"개자식. 내가 놓칠 줄 알고?"
"오해라고. 나는 너희들을 공격하지 않았어!"
"개소리……"
콰과광.
욕설을 내뱉으며 그를 쫓던 알렉세이 말을 잇지 못 했다.
그가 빠져나온 곳에서 다시 한 번 강한 굉음이 흘러나왔다.
놀란 그는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봤다.
지금 도망간 놈이 그 일행과 짜고 그들을 공격했다는 사실에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개자식들! 다 죽인다!"
흥분한 그는 곧장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당장은 뒤로 물러나서 멀쩡한 자들과 함께 상황을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괜한 흥분으로 오히려 기회를 줬다는 사실에 그는 급하게 제 자리로 돌아왔다.
"뭐, 뭐야?"
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변이 초토화된 지 오래였다.
뒤에서 기운을 회복하고 있던 자들은 모두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있었다.
그나마 앞에서 뱀파이어들을 막아내는 자들은 건재했지만, 그들은 놈들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크윽. 알렉세이!"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몰라! 갑자기 폭발이 일어나더니 모두 죽었어."
"그게 말이 돼? 갑자기 폭발이 일어나다니?"
"우선 도와줘. 우리도 정상이 아니니까."
"……."
"내상을 입었어. 갑자기 낯선 기운이 몸속으로 파고 들었어."
황당한 소리였지만, 지금은 동료들을 도와서 상황을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강한 살기가 그를 덮쳤다.
미간을 노리며 쏘아지는 강렬한 기운에 알렉세이는 급히 뒤로 물러나며 도격을 날렸다.
쉬이익.
예리한 도기가 그가 있던 자리로 날아들면서 그 자리에 있던 자를 덮쳤다.
"잡았다. 이 쥐새끼 같은……"
절묘한 순간에 되받아친 공격에 상대가 휩쓸렸지만, 그가 날린 도기가 다시 튕겨져 나오며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일에 기겁한 알렉세이는 다시 한 번 도를 휘둘렀다.
콰앙.
자신이 날린 도기를 다시 받아내야 했다.
하지만 되돌아온 도기 뒤로 까만 형체가 나타났다.
뒤늦게 그의 존재를 확인한 그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푸욱.
"잡았다. 쥐새끼 같은 놈."
그를 쓰러뜨린 강준우는 지체 없이 물러났다.
유령보를 펼친 그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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