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 (2)
'얻은 건 포인트가 전부인 건가?'
노인이 가진 다른 능력을 능력을 얻을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정파와 관련된 무공을 익힌 상대라서 제대로 된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생각을 떠올리기 무섭게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정파라. 정종 계열 무공을 익힌 것치고는…'
노인은 그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거리낌 없이 엘프를 상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쓰러진 자를 이용하는 것까지.
노인은 정종 무공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가 않았다.
얼마 전에 세웠던 가설이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이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주변에 모여든 남은 엘프들이 그를 일깨웠다.
엘프들의 앞에 선 베가르드는 강준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를 왜 도와준 거지?"
"그저 목적이 같았을 뿐이다."
"…."
"아, 그 엘프를 처리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계속 두면 다른 엘프들까지 계속 상대했어야만 했거든."
캐롤라인을 언급하는 강준우의 말에 몇몇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베가르드 역시 좋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강준우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강준우가 캐롤라인을 제압했다고 하더라도 그녀라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게 분명했다.
그녀의 죽음은 안타까웠지만, 그렇다고 다른 엘프들을 모두 위험에 빠뜨리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강준우에게 무조건적인 호감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속셈이지?"
"…."
"우리를 도와서 같은 인간을 상대한 이유가 뭐냐?"
엘프들의 눈에는 노인이나 강준우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간이라는 같은 종족이었다.
그런 그가 종족을 배신한 이유를 알 수 없었고, 베가르드는 그 사실을 물었다.
그가 엘프를 도와서 노인을 죽인 이유는 간단했다.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엘프들을 적으로 돌리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무엇보다 쓰러진 노인은 그가 처리할 대상으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싸워야 할 상대였다.
이미 동료로 보이는 또 다른 노인을 쓰러뜨린 만큼, 상대한 노인과는 같은 길을 걸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밝힐 수는 없었다.
잠깐 고민하던 강준우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너희 엘프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다."
"우리들의 도움?"
"지금 이자와 비슷한 놈들이 마을을 공격하고 있다고 하는 것 같던데? 맞나?"
"… 그런데?"
"나 역시 그들을 상대해야 할 것 같거든."
"…."
같은 동족을 상대할 거라는 강준우의 말에 베가르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엘프들이 동족과 대립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을 다르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적대하면서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
"왜 같은 종족을 죽이려고 하는 거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다른 생각? 그게 전부인가?"
"나를 죽이려는 놈들을 살려둘 이유가 없잖아?"
"…."
가장 명확한 답이었다.
그의 생존에 위협이 됐기 때문에 먼저 손을 쓴 것이다.
베가르드는 그 말에서 느껴지는 진심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말을 이어갔다.
"우리의 도움을 얻는다고?"
"이자와 비슷한 자들을 상대할 생각이다. 아마도 너희 마을을 공격하는 자들일 가능성이 높겠지."
"…."
"가능하다면 내가 그들을… 단죄했으면 좋겠는데. 어때?"
"단죄?"
"어차피 너희들도 그들을 살려둘 건 아니잖아?"
마을의 영역을 침범한 놈들을 살려줄 이유가 없었다.
'저자의 도움을 얻는다면 확실히 일이 수월해지겠지만…'
강준우의 말에 베가르드는 고민했지만, 이런 일은 그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다.
외부인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마을에 있는 장로들의 허락이 필요했다.
물론, 그가 알고 있는 장로들이라면 일부를 제외하고 비슷한 결정을 내릴 게 분명했다.
'당연히 대부분의 장로님들은 이자의 말을 무시하겠지.'
그렇다고 여기에서 그런 말을 전할 수는 없었다.
멀쩡해 보이는 강준우를 자극해서 좋을 건 없다는 판단이었다.
고심하던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장로님들의 뜻을 물어야 한다."
"… 그래서 가능하다는 거냐?"
"따로 의견을 물어보고 오지."
"그럼 나는 어떡하라는 거지?"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최대한 빨리…"
"아니. 나는 계곡을 넘어서 기다리고 있겠다. 결정을 내리면 그곳으로 와라."
"… 알겠다. 그렇게 하지."
확실하지 않는 상황에서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엘프들의 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보다는 그 구역이 아닌 곳에서 기다리는 게 좋았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지켜본 엘프들은 너무나 답답해 보였다.
융통성이 없는 모습과 자신 없어하는 베가르드의 모습에 강준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히 엘프를 도왔나?'
뒤늦게 후회가 됐지만, 그렇다고 노인을 도와서 엘프를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면 아직도 노인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게 분명했다.
베가르드는 두 명의 엘프에게 따로 지시를 내렸다.
"저 인간을 계곡까지 안내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말은 안내였지만, 그게 감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강준우는 멀어지는 엘프들을 확인하며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마을로 돌아온 베가르드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표정을 굳혔다.
꽤나 치열한 싸움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비교적 숲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마을이었지만, 그 일부가 부서진 채로 방치돼 있었다.
"결계가… 부서진 건가?"
"어쩔 수 없었어요. 생각보다 인간들의 힘이 강력했으니까요."
"침입자들은?"
"남은 놈들이 물러났어요. 일부가 놈들을 쫓아서 움직인 상황이에요."
다행히 침입한 놈들을 모두 쫓아낸 것 같았다.
하지만 치열한 싸움이 이루어진 곳으로 움직인 그는 침음을 흘렸다.
'이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는 건가?'
꽤 많은 엘프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 역시 힘든 싸움을 이어갔다지만, 이곳도 만만치 않은 싸움이 있었던 것 같았다.
마을에는 여러 전사들과 장로들까지 남아 있었다.
아무리 인간들의 힘이 강력하다고해도 이렇게까지 피해를 입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난장판이 된 곳을 지나친 베가르드는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무리를 찾았다.
"베가르드. 왔느냐?"
"죄송합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아니다. 네가 있는 곳 역시 쉽지는 않았겠지."
"…."
이미 곳곳에서 놈들이 기습을 이어온 것을 잘 알고 있는 장로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베가르드는 그런 장로들을 향해 곧바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그가 있었던 곳의 상황을 알리면서 강준우와의 일을 밝혔고, 그의 뜻을 전하면서 장로들의 의견을 구했다.
"인간이 우리를 돕겠다고?"
"예."
"…."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금 전까지 인간과 싸우던 그들이 또 다른 인간을 믿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장로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 같은 인간이 우리를 돕는다? 아무래도 베가르드, 네가 뭔가를 잘못 생각한 것 같구나."
"캐롤라인을 죽인 자라면서? 오히려 그자를 처치하고 왔어야지!"
그들은 베가르드를 질책했다.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장로들의 반응에 베가르드는 씁쓸해했다.
장로라고 다른 엘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부는 그의 판단을 존중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대부분은 그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
베가르드는 그런 장로들을 뒤로하고 한 사람을 바라봤다.
장로들 중에서 가장 주름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엘프였다.
누구보다 현명한 엘프로, 그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대장로의 뜻을 구했다.
"그자가 원하는 게 우리의 도움이라는 거지?"
"예. 대장로님. 마을을 공격한 다른 인간들을 제 손으로 단죄하겠다고 했습니다."
"…."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다른 인간을 처리한다라."
다른 장로들과 다르게 대장로는 베가르드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고심하는 그의 모습에 다른 장로들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대장로는 개의치 않았다.
"그 인간이 원하는 것은… 그게 전부라고 하더냐?"
"밝힌 것은 그게 전부입니다."
"마냥 믿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냥 흘려들을 수도 없겠구나."
"대장로님. 그자는 인간입니다!"
"캐롤라인을 죽인 자를 어떻게…"
"그만! 그만하시오."
대장로는 장로들의 말을 일축했다.
"우선 그 인간을 만나는 게 좋겠소."
"괜히 시간만 버리는 꼴입니다. 그런 인간은…"
"내가 직접 만나보고 결정을 내리겠소. 다른 장로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대장로님께서 직접 말입니까?"
"나를 믿는다면 내 뜻을 존중해주길 바라겠소."
"…."
적극적인 그의 모습에 남은 장로들은 반대를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이런 식으로 종족이 살아남을 수 있게 된 이유는 대장로의 결정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멸종됐을 운명이었다.
여전히 존경할 인사였기 때문에 그들은 대장로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말도 없는 그들의 모습에 대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내 뜻에 따라줘서."
"인간은 쉽게 믿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알겠소. 염두에 두겠소."
부정적인 그들의 말에 대장로는 쓰게 웃었다.
베가르드의 설명만 들어 보자면 그 인간을 이용해서 다른 인간들을 견제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우선 만나보고 의견을 조율해 보는 게 현명했다.
뜻이 통한다면 그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배척보다는 그런 식으로 인간을 이용해도 될 일이었지만, 마을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다른 장로들의 생각은 꽉 막혀 있었다.
어쩌면 엘프들이 이런 상황에 놓인 것 자체가 당연했는지도 몰랐다.
인간들과 비교해서 너무 고지식했다.
같은 엘프인 그조차도 답답함을 느낄 정도로 대부분의 엘프들이 꽉 막혀있었다.
"베가르드?"
"예. 대장로님."
"앞장서라. 그 인간을 만나러 가야겠다."
"모시겠습니다."
대장로는 베가르드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게 숲을 내달리는 그들의 모습에 남은 장로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인간과 접촉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모질게 내치지 못한 대장로의 모습에 그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자비로우시질 않으신가?"
"현명하신 분이네. 우리보다는 나은 판단을 하시겠지."
"그래도 인간을 믿는 다는 건…"
"아직 결정된 건 없지 않은가? 대장로님께서 현명한 선택을 하시겠지."
"…."
★ ★ ★
베가르드가 마을로 향하는 사이 강준우는 계곡으로 움직였다.
계곡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은 마주한 두 노인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분명히 두 사람은 서로 알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두 번째로 죽은 노인은 먼저 죽은 자를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강준우를 아는 체 하면서 엘프들을 움직이는 모습까지 보자면 그들이 힘을 합쳤다는 것을 뜻했다.
'계곡 근처에서 만났던 놈들도 엘프 마을을 공격하기 위해서 움직였던 건가?'
우연찮게 그들을 공격했을 가능성은 낮았다.
아무래도 엘프 마을로 향하는 와중에 그들을 발견하고 공격을 감행한 것이 분명했다.
비록, 그 일이 성공하지는 못 했지만, 새롭게 알아낸 사실에 강준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같은 경지에 오른 두 명의 고수가 뜻을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다른 놈들까지 생각하면 둘이 전부가 아니라는 건데.'
아무리 경지를 넘었다고 하더라도 엘프 마을을 공격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없다면 시도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말인데.'
아직까지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없던 강준우는 그들에 관해서 고민했지만, 곧 상념을 떨쳐냈다.
어느새 계곡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계곡 너머에 있는 일행들은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확인한 강준우는 건너편에 있는 자들의 모습에 뒤를 돌아봤다.
갑작스러운 그의 시선에 그를 뒤따르던 엘프가 움찔거렸다.
"뭐, 뭐냐?"
"저놈은 뭐지? 엘프는 아닌 것 같은데."
"우리를 모욕하는 거냐?"
"그냥 묻는 거잖아. 그래서 저놈이 누구냐고?"
"… 라, 라미아다."
"라미아?"
낯선 모습이었다.
하반신은 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 모습에 강준우는 곧장 산길을 내달렸다.
그리고 크게 도약하며 계곡을 뛰어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