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 (4)
[천마기멸격이 3성으로 올라섭니다.]
[천마기멸격의 위력이 증가합니다.]
무작위로 오른 기공은 천마기멸격이었다.
일부러 성취를 올리려고 해도 올릴 수 없는 까다로운 무공이었다.
필요한 내공이 상당했기 때문에 쉽게 펼칠 수 없었다.
내심 형상기검의 성취가 오르기를 바랐지만, 천마기멸격이 오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라미아라는 괴물을 처리하고 많은 보상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만큼 라미아라는 놈의 힘은 강력했다.
강기도 통하지 않은 하체는 단단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괴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강기를 사용할 수 있는 놈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놈으로, 매혹이라는 능력 역시 경시할 수준이 아니었지만, 결국 놈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화살이 날아오지 않았더라면 쉽지 않았겠지?'
강력한 적을 비교적 쉽게 처리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화살이었다.
멀리서 날아온 화살은 강력한 힘을 품고 있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큰 도움이 됐다.
쓰러진 라미아를 뒤로한 강준우는 계곡 너머에 있는 엘프들을 바라봤다.
베가르드와 다른 엘프들이 그곳에 서서 그와 일행들을 지켜봤다.
'저 엘프는…'
그의 시선에 베가르드의 옆에 있는 엘프가 가득 들어왔다.
다른 엘프와 다르게 나이가 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주름이 가득한 엘프의 손에는 활이 들려 있었고, 그 엘프는 강준우를 직시했다.
비록 거리가 있었지만, 공격을 감행했을 엘프의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경지에 오른 그가 상대의 기운을 느낄 수 없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기운을 완벽하게 갈무리 할 수 있거나, 나보다 윗선에 있는 자라는 거겠지?'
상대의 힘을 유추한 강준우는 마음을 다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뒤에 있던 일행들은 그런 강준우는 잡았다.
"준우야? 괜찮아?"
"괜찮아. 다친 사람은?"
"없어. 저 엘프들은 또 뭐야? 너를 돕던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엘프들의 모습에 권우철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하지만 강준우는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
그 역시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 바로 움직여도 괜찮겠어?"
"여기까지 와서 도와준 걸 보면… 큰 일은 없을 거야."
"그래도 조심해."
일행들의 걱정을 뒤로한 그는 다시 도약하며 계곡을 뛰어 넘었다.
상당한 거리를 뛰어넘는 그의 모습에 함께 움직인 엘프들이 놀라는 기색을 보였지만, 베가르드와 대장로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미 라미아를 처리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저런 움직임은 당연했다.
처억.
계곡을 넘은 강준우가 내려서기 무섭게 주변에 있던 엘프들이 그를 경계했다.
유난히 심각한 그들의 모습에 강준우는 베가르드를 향해 물었다.
"내 제안에 대한 답을 가지고 온 건가?"
"재미있는 제안이더군."
"…."
베가르드에 대한 답은 옆에 있는 늙은 엘프가 대신했다.
강준우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그에게 향하자, 베가르드는 그를 소개했다.
"대장로님이시다."
"대장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한 거물이 나타난 것 같았다.
그제야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납득할 수 있었다.
'대장로라. 그놈에게 중한 상처를 입힐 수 있었던 게 당연한 건가?'
그런 엘프의 개입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미 작은 도움을 주면서 어느 정도 호감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 마을을 공격한 인간들을 상대하겠다고 하던데. 맞나?"
"조건만 맞는다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 군요."
"조건이라? 원하는 게 뭔가? 먼저 들어볼 수 있겠나?"
"…."
너무나 스스럼없이 묻는 대장로의 모습에 강준우는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엘프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옆에 있는 베가르드와 비슷하게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속단할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면… 그들과의 싸움이 벌써 끝난 겁니까?"
"아직까지는 끝났다고 할 수 없지. 도망간 자들이 남아 있으니까."
"도망간 자들이라."
"이번에 그들 손에 죽은 아이들도 많으니…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이지 않도록 해야겠지."
"…."
의지를 드러내는 대장로의 말에 강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막상 말을 들어보니 찝찝한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앞에 있는 엘프가 가진 힘은 그를 상회하고 있었다.
따로 부딪치지 않았지만, 만약 싸운다면 아무래도 밀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자를 상대로 도망을 갔다?'
날린 화살의 위력만 봐서도 쉽게 도망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대장로와 마주치기 전에 물러났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엘프 마을을 공격한 자들의 실력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들을 대신 처리해 주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맞나?"
"그런 제안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니, 원하는 게 있는 것 같군. 필요한 것이 뭔가? 말해 보게."
"말을 한다면 다 들어주는 겁니까?"
대장로는 당돌한 그의 말에 옅은 미소를 보였다.
이미 강준우가 라미아를 상대하는 모습을 확인했다.
작은 도움을 줬다지만, 골칫거리 중에 하나였던 라미아를 잡는 것을 보면 이미 그의 실력을 확인한 것과 같았다.
"우선 들어보고 판단하지."
대장로의 시원스러운 답에 강준우는 생각했던 것을 밝혔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습니다."
"이곳?"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우리는 왜 여기로 왔는지. 먼저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 흐음."
크게 어렵지 않은 답인 것 같았지만, 대장로는 말을 아꼈다.
침음을 흘리며 고심하는 그의 모습에 강준우의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하지만 대장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나 고심하던 대장로는 곧 어렵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나로서도 답을 하기 힘든 부분이군."
"답을 하기 힘들어요?"
"이후에 그들을 만나면 알게 될 일이네. 내가 언급할 건 아닌 것 같군."
"…."
"대신,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알려줄 수 있네."
"어떤 곳이죠? 이곳이?"
정작 이곳이 어딘지도 몰랐다.
이 기회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여겼지만, 마주한 대장로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건, 그대가 마을을 공격한 인간들을 잡은 이후에 알려줘야겠지. 아직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았는데, 지금 그것을 밝힌 수는 없지. 안 그런가?"
"…."
대장로는 보상을 그 이후로 돌렸다.
줄다리기를 하는 대장로의 반응에 강준우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공격했던 자들을 찾는 것도 힘들 것 같은데요? 여기에 어떤 놈들이 있는 지도 모르고, 그쪽이 지키는 곳에는 발도 못 들이게 하는데. 어떡하라는 겁니까?"
"베가르드를 붙여주겠네."
"대장로님?"
대장로의 말에 오히려 옆에 있던 베가르드가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그나마 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아이가 베가르드 너일 것 같구나."
"하지만…"
"이들의 길잡이를 해줄 아이가 필요하다. 다른 아이에게 이 일을 맡겨도 될 것 같으냐?"
"그건…"
베가르드 역시 대장로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융통성이 없는 엘프들은 오히려 앞에 있는 인간들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캐롤라인이 강준우의 손에 죽은 만큼, 만에 하나라도 이들과 부딪친다면 그 결과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엘프들을 잘 알고 있는 대장로였다.
가장 적합한 사람을 뽑은 게 분명했다.
대장로의 생각을 헤아린 베가르드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에 따랐다.
"알겠습니다."
"들었겠지? 이 아이가 그들을 찾는데 도움을 줄 거네."
"엘프들이 지키는 구역은…"
"베가르드와 함께라면 마을 밖에서는 움직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지."
나름 많은 것을 양보하고 있었지만, 강준우의 성에 차지는 않았다.
감시자 격인 엘프 한 명과 길을 지나가게 만들어주는 게 전부였다. 그것도 엘프와 함께 움직여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만만한 자들이 아닌 것 같던데. 맞습니까?"
"쉬운 상대는 아닐 거네. 그래도 베가르드라면 제 한 몸은 충분히 지킬 수 있을 정도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네."
"그걸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대장로는 강준우를 바라봤다.
뭔가를 더 바라는 눈치였다.
"필요한 것이 더 있는 건가?"
"아무리 제가 제안한 일이라지만, 이 일이 엘프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실질적으로 돌아오는 뭔가가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잠깐 나눈 대화로 대장로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지금까지 싸웠던 고블린이나, 오크 같은 다른 종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이들의 처지를 떠올린 강준우는 나름 시험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들을 통해서 따로 임무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따로 임무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라미아를 처리하면서 얻은 게 적지 않았을 텐데?"
"그건 제 노력의 결과라 당연히 얻어야 할 것들이었죠."
"내 도움이 없었다면…"
"저 엘프들도 제 도움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지도 모르죠."
"…."
베가르드와 주변에 있는 엘프들을 가리키는 강준우의 말에 대장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베가르드를 통해서 일전에 있었던 일을 전해들은 이후였다.
조금 뻔뻔한 말이었지만, 강준우의 지적은 그럴듯했다.
'욕심을 내는 걸보면… 확실히 인간이라는 건가?'
예전에 상대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강준우의 모습에 대장로는 씁쓸해하며 입을 열었다.
"좋네. 대신 캐롤라인과 있었던 일에 관한 책임을 묻지 않겠네."
"캐롤라인? 그 죽은 엘프를 말하는 겁니까?"
"그렇네. 캐롤라인 역시 우리들의 가족이지."
"만약 그 여자 엘프를 처리하지 않았다면 저들이…"
"결국, 그대의 손에 그 아이가…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대장로라는 자가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간 봐왔던 엘프들의 모습만 봐서는 협상이 쉬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앞에 있는 대장로라는 엘프는 만만한 자가 아닌 것 같았다.
지금까지 봐온 엘프들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강준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엘프들과 있었던 일은 모두 불문에 부치겠다?"
"그건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롭니다. 캐롤라인이라는 엘프는 물론이고, 다른 엘프들이 상처를 입은 것까지 모두 포함해서 하는 말이죠."
"… 그렇게 하겠네."
마음속 한켠에 자리 잡고 있던 작은 죄책감이 덜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부딪쳤던 일곱의 엘프까지 은연중에 포함한 그는 대장로의 답을 들으며 확인하듯 되물었다.
"일이 끝나면 이곳이 어떤 곳인지에 관해서도 알려준다고 했던 말. 잊으면 안 됩니다."
"그 일을 해결하는 게 먼저겠지."
"나중에 가서 말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여기에서 나눴던 모든 말들을 부정한다면…"
"대장로님을 모욕하는 것인가?"
"확실히 하자는 거다. 그저 말만으로 이곳에서의 일을 믿는 건 불안하까."
강준우는 조금 더 확실한 것을 원했다.
이후에 말이 달라지면 곤란할 수밖에 없었고, 대장로는 그런 강준우를 안심시키듯 말을 이어갔다.
"세계수에 맹세하지. 됐나?"
"…."
말로만 듣던 세계수를 언급한 걸로 봐서는 이제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얼렁뚱땅 일전에 있었던 일의 책임까지 돌린 그는 내심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움직이도록 하죠."
"그럼 부탁…"
"아, 그 전에… 그 활 좀 빌릴 수 있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대장로가 가지고 있는 활을 가리키는 강준우의 말에 베가르드는 황당해하며 소리쳤다.
앞에 있는 인간이 너무 무례하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강준우는 개의치 않으며 말을 이어갔다.
"보니까 정령을 이용해서 화살을 날리던데. 일행 중에 정령을 부리는 사람이 있거든요."
"흐음."
"활을 이용해서 공격을 하면 더 수월할 것 같더군요. 어떤가요?"
"여분의 활을 대신…"
"설마, 빌려주는 겁니까?"
"…."
묘한 뉘양스에 대장로의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하지만 강준우는 개의치 않으며 중얼거렸다.
"제대로 된 보상도 없는 것 같은데. 엘프들은 원래 다 쪼잔한가?"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근처에 있는 엘프들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 말에 발끈한 대장로는 짜증 섞인 말로 언성을 높였다.
"그냥 주겠네. 크흠. 우리는 그렇게 마음이 좁지 않네!"
순간 평정심이 깨진 것 같은 대장로의 모습.
노회한 모습을 보였던 그 역시 엘프인 것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