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고수들 (4)
바닥이 흔들렸다.
들썩이는 바닥에서부터 날카로운 돌기둥이 솟구쳐 오르며 그를 노렸다.
조금 전에 요아니스라는 엘프를 처리할 때 사용했던 그 마법이었다.
강준우는 솟구쳐 오른 돌기둥을 피해 물러나면서 그곳과의 거리를 벌렸다.
콰과과광. 후두두두.
바닥에서 치솟아 올라온 돌기둥이 대뜸 터져 나갔다.
강한 폭발과 함께 부서진 조각들이 주변을 덮쳤지만, 강준우는 그 자리에 없었다.
'꼭 수류탄 같잖아?'
날카롭게 부서진 돌조각이 주변을 휩쓸었다.
강한 위력이 놀라웠지만, 이어지는 광경이 더 황당했다.
"도, 도망간다! 마녀가 도망간다!"
"저런 미친년!"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마법을 날리기 무섭게 그 여인은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자들이 분개하며 소리쳤지만, 그들은 이미 강준우와 가까워진 이후였다.
마법이 폭발하고, 그 틈을 노리며 공격을 감행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이미 거리를 좁힌 상황이었다.
"염병할!"
"온, 온다!"
그들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움직인 상황이었다.
강한 마법을 날린다는 말을 믿고, 길을 막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가 먼저 도망을 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졸지에 버림받은 신세로 전락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위협적인 적이 다가온다는 점이었다.
강준우는 곧장 달려들며 그들을 노렸다.
가까이 다가오며 손을 뻗자, 강한 지력이 날아들었다.
일양지와 함께 기검이 날아들었지만, 마주하는 자들도 바보가 아니었다.
이제는 눈에 익을 대로 익은 무공이었다.
"무, 물러나!"
그들은 의도적으로 공격을 피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그 모습에 강준우의 표정이 절로 구겨졌다.
'도망갈 생각인가?'
아마도 이대로 물러날 생각인 것 같았다.
각자가 다른 방향으로 몸을 내던지는 그들의 행동에 강준우는 곧장 손을 뻗었다.
인근에 떨어져 있던 현철보검이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허공섭물을 이용해서 보검을 손에 쥔 그는 물러나는 자들을 향해 강기를 날렸고, 허공을 격하며 강기가 쏘아졌다.
"아아악!"
한 명이 강기에 휩쓸리며 목숨을 잃었지만, 남은 자들은 목숨을 부지하며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
고작 서너 명이 전부였지만, 나중에 그들을 다시 찾아내는 것도 일이었다.
도망가는 모습을 확인하던 강준우는 고심했다.
이대로 저들의 뒤를 쫓는 것을 생각했지만, 지금은 저들보다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먼저였다.
마법을 사용하던 여성이 도망가자, 남아 있던 사람들도 도망을 강구하고 있었다.
특히, 베가르드와 싸우던 노인도 그를 뿌리치며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베가르드를 떨쳐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동료 엘프들을 잃은 그는 앞에 있는 인간을 더욱 거칠게 몰아붙였다.
터엉. 터엉.
길게 솟아난 강기가 부딪치며 서로의 공격을 받아냈다.
'형상기검이라.'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준우는 노인의 무공에 침음을 삼켰다.
그가 익힌 형상기검과 같은 무공을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상대한 자들 중에서 제대 된 형상기검을 사용하는 사람을 만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건가?'
노인은 그가 생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형상기검 자체만으로 놓고 보자면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가 있는 고수였다.
노인은 강기를 유형화 시키면서 무기를 만들어냈고, 그 무기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꿨다.
상황에 맞춰서 검에서 도로, 도에서 창으로 바뀌면서 베가르드의 검을 튕겨냈다.
터엉. 터엉.
연신 부딪치는 두 사람의 힘에 주변이 휩쓸려 나갔다.
뒤에 있던 일행들은 도망가려는 다른 사람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려 나갔고, 강준우는 남은 힘을 가늠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그놈은 내가 상대하지.
- 아니, 이놈은 내가 처리한다!
따로 베가르드에게 뜻을 전했지만, 베가르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들과 함께 움직인 자들 때문에 엘프들이 쓰러진 만큼 죽은 엘프들의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생각과 다른 베가르드의 반응이 당혹스러웠지만, 강준우도 앞에 있는 노인을 넘길 생각은 없었다.
- 그 노인은 내가 처리한다.
- 싫다고 했을 텐데! 이 인간은…
- 네가 복수할 대상은 그 노인이 아니라, 도망간 마법사잖아?
"…."
- 엘프들이 그 손에 죽었으니, 네가 그 마법사를 죽여라. 그 노인은 나도 양보할 수 없으니까.
- 이 인간이나 그들이나…
- 너희 대장로와 내가 약속을 했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이들을 죽이는 건 내 손으로 한다고 했다는 걸 잊지 마라.
"…."
단호한 강준우의 말에 베가르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강준우가 대장로 사이에 있었던 거래를 그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서 고집을 부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한 강준우는 물러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또 다른 노인을 향해 검을 날렸다.
터엉.
"크윽. 이놈들이!"
위협적인 검격에 노인은 이를 악물었다.
비슷한 실력을 가진 둘이 협공을 가해오기 시작하자, 당연히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놈은 아직도 이런 힘이 남아 있다는 건가?'
뒤늦게 합류한 강준우가 많이 지쳤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공격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콰앙. 콰앙.
둘의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서로 다른 종족이었지만, 강준우와 베가르드의 공격은 매서웠다.
둘 모두 이미 경지에 오른 상태였다.
거기에 노인의 목숨을 강준우에게 넘긴 상황이었기 때문에 베가르드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주된 공격은 강준우가 이어갔고, 베가르드는 빈틈을 노리며 날카로운 공격을 감행했다.
콰앙. 촤아악.
"크윽."
노인이 강준우의 검강을 막아내는 순간, 베가르드의 검이 그의 장딴지를 베어냈다.
강한 충격에 노인의 몸이 휘청거렸고, 강준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서걱.
"끄아악!"
노인의 팔이 잘려 나갔다.
그대로 몸을 베어낼 생각이었지만, 상대는 그 와중에 몸을 비틀며 치명적인 공격을 피해낸 것이다.
팔을 잃었지만, 전의를 잃지는 않았다.
노인은 남은 팔에 힘을 쏟아 부으며 거대한 대검을 만들어냈다.
하늘 위로 치켜세운 대검.
그대로 앞에 있는 강준우를 양단하려는 듯한 강한 기세가 느껴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놈!"
분개한 노인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대검이 떨어져 내렸다.
형상기검으로 만들어진 대검이 그대로 강준우의 머리를 향해 꽂혔다.
콰과광.
강기로 된 대검이 바닥을 뒤흔들었다.
베여낸다기 보다 부서뜨린다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로 대검이 휩쓴 공간이 터져 나갔다.
하지만 정작 공격을 받아내야 할 강준우는 멀쩡했다.
"팔을 잃으면 균형이 틀어지는 것 같더라고."
"이 어린…"
"그리고 그 정도 크기라면 굳이 막을 이유도 없고."
서걱. 투욱.
어느새 노인의 뒤를 잡은 강준우는 곧장 검을 휘둘렀다.
현철보검이 순식간에 노인의 목을 베어냈고, 상황을 알림이 전해졌다.
[무영검이 6성으로 올라섰습니다.]
[무영검의 위력이 증가합니다.]
익히고 있던 무영검의 성취가 올랐다.
그동안 상당한 숙련도를 쌓았던 무공이 결국 단계를 높였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노인을 통해서 얻은 게 더 중요했다.
[형상기검을 획득하였습니다. 가지고 있는 동일한 능력으로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형상기검이 7성으로 올라섰습니다.]
[상대가 가지고 있던 포인트를 강탈합니다.]
같은 무공을 익히고 있는 노인을 통해서 형상기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곧바로 형상기검의 성취가 오르면서 조화신공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을 하나 더 채울 수 있었지만, 아직 상생이라는 조건이 남아 있었다.
'상생이라.'
이제 막 실마리만 얻은 무리였다.
음양신공을 얻으면서 상극의 무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상생은 손에 넣지 못하고 있었다.
'음양신공의 성취를 높여야 하나?'
상생을 얻는 방법이 확실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조각에 조바심이 일었지만, 아직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노인이 죽었어도 도망간 여자와 다른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거기에 아직 쓰러지지 않은 자들도 여럿이었다.
터엉.
권우철의 방패에 공격이 막힌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고작 셋이었다.
그를 포함한 수로, 남은 둘이 힘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살아날 가능성은 없었다.
'괴물 같은 놈들!'
도저히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노괴 둘을 직접 처리한 자가 가장 큰 문제였다.
마저 한 놈을 더 쓰러뜨린 그가 남아 있는 세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멀리서도 확연히 느껴지는 강력한 살기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생각에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라이트닝 매직 미사일 12연발!"
콰과과광. 콰지지직.
"크윽. 너 일부러 전격 마법을 섞은 거지?"
"그, 그럴 리가!"
"이번에는 양보해! 마법사도 아닌데 네가 잡아봤자…"
"나도 급하다고. 네가 양보하는 건 어때?"
"…."
이제는 사냥감으로 전락한 것과 같았다.
그들의 목숨을 놓고 다투는 적들의 모습에 사내는 결심을 굳혔다.
"하압!"
콰과광.
남은 힘을 쏟아낸 그는 뒤로 몸을 날렸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남아 있던 모두가 황당해했지만,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저런 미친놈!"
"하필 가도 왜 저기로 간 거야?"
"쓰읍. 저 인간한테 또 빼앗기겠는데?"
사내는 오히려 강준우를 향해 달려갔다.
과감한 결단을 내렸지만, 멍청한 그의 행동에 모두가 그를 비웃었다.
콰과광. 화르르르.
"아아악!"
그가 빠지자마자 뒤에서 버티던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남은 한 명도 사력을 다했지만, 곧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과감하게 움직였다.
그는 팔을 들어 올리는 강준우의 모습을 확인하며 그대로 허리를 굽히며 몸을 숙였다.
"살려주십시오."
"…."
오체투지하며 목숨을 구걸하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비슷하게 목숨을 구걸했던 자는 강준우의 손에 목숨을 잃은 이후였다.
지금 몸을 숙인 사내도 그 모습을 봤을 게 분명했지만, 그는 비슷한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끄아악."
몸을 낮추기 무섭게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뒤에 있던 또 다른 동료가 목숨을 잃는 소리였다.
자세를 낮춘 사내는 그 소리에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지만, 마냥 버텼다고 하더라도 죽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차라리 모험을 거는 수밖에!'
마음을 다잡은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도망간 놈들이 어디로 모일지 알고 있습니다."
"… 흐음."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작정을 하고 몸을 낮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엘프와 함께 손을 잡은 채, 이곳으로 온 것만 봐서는 뜻을 함께 하고 있다고 봐야만 했다.
이미 엘프들의 동료로 보이는 자들도 죽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내는 그 점을 이용했다.
믿고 있던 고수들이 모두 죽은 만큼, 이제 살아날 가능성은 없었다.
계속 반항을 한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것이 없다면 선택은 하나였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확실히 몸을 굽히는 것.
뒤에 남아 있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힘들어도 무리에 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더라도 여기에서 죽는 것보다는 비굴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게 나았다.
"목숨만 살려준다면 그들이 모일 곳을 안내하겠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강준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앞에 있는 남자가 하는 말이 솔깃하게 들렸다.
'도망간 자들이 모일만한 곳이라.'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남자를 바라봤지만, 사내는 곧 손에 쥔 검을 스스로의 목에 겨누며 말을 이어갔다.
"우선… 확답이 먼저일 것 같습니다."
"… 좋아. 살려주지."
여차하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반응이었다.
단호한 그의 모습에 강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사내는 옆에 있는 엘프를 향해 말했다.
"저 엘프가 증인이 됐으면 합니다."
"증인?"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저 엘프가 대신 나서서 이 부당함을 벌하는 걸로 해주는 것으로 말입니다."
"…."
목숨이 달린 일이라 그는 신중하게 움직였다.
나름 엘프를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적어도 그와 엘프 사이의 관계를 틀어지게 만들 정도의 제안에 강준우의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