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천마신공-204화 (204/254)

황혼의 고수들 (5)

"마치 엄청난 칼자루라도 쥐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

가만히 그 말을 듣던 강준우는 베가르드를 바라봤다.

의중을 묻는 그 시선에 베가르드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강준우도 고민했다.

대충 얼버무리며 답을 하고 처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런 상황은 지나간 것 같았다.

엘프가 끼면 피곤해 질 게 분명했고, 베가르드도 다른 엘프들을 쓰러뜨린 것에 일조한 놈을 살리는 것이 달갑지 않은 듯한 눈치였다.

'그렇다고 이놈이 거짓말에 동조할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리 베가르드가 다른 엘프와 다르게 생각이 트여있다고 하지만, 그 역시도 엘프였다.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반대의 의사를 밝히는 것만 봐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조금 더 고생을 하는 수밖에.'

마음을 정한 그때,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백선화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자신의 여전히 목에 검을 들이민 채로 협박을 하는 사람을 향해 물었다.

"그들이 한 곳으로 모이는 건가요?"

"… 그렇다고 볼 수 있… 지."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반응을 보인 사내는 놀라며 말을 이어갔다.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미모를 유지한 여자가 말을 걸었다.

절로 음심이 동했지만, 그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호흡을 골랐다.

지금은 그런 생각보다 목숨을 부지하는 게 먼저였다.

"정말 그곳을 알고 있는 건가요?"

"흐음. 당연하지. 내 목숨이 걸린 일인데, 거짓을 말할 리가 없잖아?"

백선화의 채취를 맡으려는 듯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그의 모습에 모두의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녀의 몸을 훑던 사내는 다급히 정신을 일깨웠다.

"크흑! 매혹이냐?"

붉게 변한 백선화의 눈.

매혹이라는 능력을 가진 그녀가 상대를 흔들었지만, 비슷한 경지에 있는 상황에서는 그를 압도할 수 없었다.

오히려 역효과만 일었는지, 그 남자는 들이민 검에 힘을 주며 그녀를 위협했다.

"그런 수에 다할 것 같아? 여차하면 죽…"

"그럼 죽어."

"무슨… 끄아악."

백선화에게 정신이 팔린 그때, 강준우는 남자의 검을 빼앗았다.

그대로 검을 뿌리며 팔을 베어내자,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퍼억.

그 와중에 의도대로 끌려가지 않으려는 듯이 바닥에 머리를 찍었지만, 강준우의 손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투두둑.

순식간에 점혈당한 사내의 표정이 절로 구겨졌다.

뒤늦게 혀를 깨물며 자결을 택하려고 했지만, 강준우는 개의치 않으며 권우철을 불렀다.

"형. 이 사람 좀 치료해 줘."

"치, 치료?"

"죽지만 않게 해."

"알았어. 힐!"

"크윽. 이 치졸한 놈들!"

오히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자 사내는 분개했다.

하지만 강준우는 그를 무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놈들 위치를 알고 있다고?"

"내가 말할 것 같으냐?"

"… 어차피 죽을 거, 그쪽을 버리고 간 놈들이라도 길동무 삼아야 억울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때?"

"흥! 그냥 날 죽여라. 나는 나를 살려주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의외로 강단 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강준우는 개의치 않으며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란 사내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강준우는 천마흡기공을 이용해서 상대의 기운을 뽑아냈다.

하지만 사내의 힘을 흡수하려던 강준우의 표정이 절로 구겨졌다.

'뭐야? 왜 이렇게 지저분하지?'

가진 힘이 너무 혼탁했다.

이런 기운은 처음이었지만, 지금은 상대의 힘을 뽑아내는 게 먼저였다.

그렇게 계속 기운을 뽑아내자, 더 이상 아무런 기운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상대의 내공을 모두 빼앗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강준우는 일부러 이런 방법을 택했다.

미처 흡수되지 못한 기운들이 손에 머물렀다.

강준우는 그 힘을 가늠하면서 백선화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매혹으로 위치를 알아낼 수 있겠어?"

"… 시도는 해 볼 게."

"부담 갖지는 마. 어차피 살려줄 생각은 없으니까."

"알았어."

잊고 있었던 백선화의 능력을 다시 확인한 만큼, 그녀를 믿어볼 생각이었다.

정령과의 친화력에 도움이 됐던 매혹.

그 능력을 얼마나 성장시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백선화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게 나으리라는 판단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놈들이 움직인 곳을 추적할 수는 있는 거지?"

"정령을 이용하면 어렵지 않을 거다."

"지금은 기운을 회복하고 체력을 비축하는 게 먼저 일 것 같은데. 어때?"

"좋다. 그렇게 하지."

베가르드의 답에 남은 사람들도 소진한 힘을 회복하는데 전념했다.

백선화가 정보를 캐는 동안 강준우는 뽑아낸 기운을 흩어내면서 영약을 손에 쥐었다.

혼탁한 기운을 흡수하는 것보다는 영약이 나았다.

부족한 내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영약만한 것이 없었다.

★ ★ ★

"후우. 엘프랑 손을 잡은 놈이라."

물러난 송두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른 놈들을 두고 혼자 도망을 왔지만, 그 상황에서 계속 자리를 지킨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그 영감 말을 듣지 말아야 했나?"

어설프게 엘프 마을을 공격한다고 생각했던 것 자체가 무리였던 것 같았다.

마을을 지키는 엘프들의 실력이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

장로라는 놈들의 실력은 그들 못지않았고, 대장로라는 놈은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댔다.

화경의 경지와 비슷한 위치에 선 일곱 명이 힘을 합치고, 절정을 넘어선 놈들을 잔뜩 끌어 모아서 공격을 감행했다.

사방에서 공격을 한 만큼 엘프 마을의 초입까지는 들어갈 수 있었지만, 놈들을 완전히 쓰러뜨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뒤늦게 생각을 달리해서 뒤쫓아 오는 놈들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그렇게 그들을 몰아붙일 수 있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놈의 개입으로 결국 도망을 택해야만 했다.

'이제 어떡하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어떤 놈들도 두렵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결국 살아남은 사람은 송두안 혼자였다.

'다른 놈들이 이곳으로 오려나?'

만에 하나라도 도망을 온 자들이 있다면 이곳으로 올 지도 몰랐다.

애초에 일이 실패하면 각각 알아서 도망을 가자고 정했던 그들이었다.

고심하던 송두안은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이곳을 밝히는 놈은… 없겠지?'

그럴 가능성은 없을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쉽게 믿을만한 놈들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 장소를 밝히고 목숨을 부지하려고 할지도 몰랐다.

잠깐 고민하던 송두안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여기에서 기운을 회복하고 다시 움직이는 것도 고민해 봤지만, 아무래도 자리를 피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녀는 다른 곳으로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에 걸음을 멈췄다.

"아아악!"

희미하지만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인근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올 일은 많지 않았다.

'그놈들이 뒤를 쫓아온 건가?'

도망을 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살아남은 놈들이 많이 있었다.

가장 먼저 빠져나온 만큼 놈들이 여기까지 온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지만, 저런 비명이 들려오는 걸 보면 마냥 안심할 수도 없었다.

'집요한 놈들!'

지금은 자리를 피하는 게 먼저였다.

여기까지 오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게 분명했고, 그 사이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남은 포인트로 영약을 손에 넣은 그녀는 거리낌 없이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포인트를 아끼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기운을 회복하는 게 먼저였다.

영약을 흡수하면서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곳을 벗어나기도 전에 한 사람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크큭. 뭐가 그렇게 바쁘누?"

"유, 윤 가! 네놈이 어떻게 여길!"

"다른 놈들은 어디 있지? 왜 혼자만 움직이는 거야? 위험하게."

"…."

걱정이 가득 담긴 말투였지만, 정작 그 말을 들은 송두안의 표정은 하얗게 질려왔다.

만나지 말아야 할 인간을 마주했다.

'절벽에서 떨어져 뒈졌을 놈이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이곳에 나타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당연히 죽었다고 생각했던 놈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앞에 있는 놈의 살기 어린 눈빛이 문제였다.

'설마? 그 비명이…'

송두안은 뒤늦게 인근에서 났던 비명이 앞에 있는 윤적평의 소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래서 떼 놈들을 믿지 말라고 했었던가?"

"우, 우리는…"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는 말을 너무 무시했었어."

"…."

"내 덕에 힘을 키운 연놈들이 배신할 줄을 알았을까?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가여워서 도움을 줬던 내가 어리석었던 게지."

자조 섞인 말에 송두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 윤적평이었다.

그들이 이 정도의 힘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이었지만, 결국에는 뜻이 맞지 않아서 그를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노인네들이 한 말이 정말 사실이었다는 건가?'

저마다 윤적평의 힘을 손에 넣지 못했다고 했던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그때는 누군가가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윤적평이 가진 힘이나 포인트를 손에 넣는다면 남은 노인들보다 앞설 수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모두의 표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모두는 진실을 말한 게 분명했다.

'그것도 모르고 다 의심하고 있었으니!'

윤적평은 처음부터 살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몸에서는 강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놈들 뜻에 반대…"

"크크큭. 요망한 할망구. 어울리지도 않는 거죽 때기를 뒤집어써서 그런가? 낯짝 한 번 두껍네그려."

"…."

"네년 역시 죽을 목숨이다!"

마지막 말을 끝으로 윤적평의 몸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지만, 송두안은 곧바로 준비한 마법을 펼치며 주변을 가로막았다.

쿠구구궁.

인근의 바닥이 흔들리면서 날카로운 가시를 만들었다.

누구 하나 섣불리 다가올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곳이 가시밭으로 변했지만, 윤적평은 그런 마법을 무시하며 달려들었다.

"이놈! 죽어라!"

콰과과광.

달려드는 윤적평의 인근이 터져나갔다.

폭발한 돌덩이가 그와 인근을 휩쓸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으며 기운을 뿜어냈다.

콰과광. 콰과광.

강한 위력을 가진 마법을 무시하며 달려드는 윤적평의 모습.

그는 일전에 절벽에 몰아놓고 싸울 때보다 더 강한 모습을 보였다.

송두안 역시 이전에 비해서 크게 힘을 키운 상황이었지만, 윤적평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더군다나 송두안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미 많은 힘을 소진한 송두안으로서는 상대하는 것 자체가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괴물 같은 놈이구나.'

다시 한 번 윤적평의 강함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당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송두안은 남은 마나를 끌어올리며 윤적평의 앞을 가로막았다.

콰드드득. 콰과광.

그의 앞을 가로막으려는 듯이 수많은 돌기둥이 솟아올랐다.

오롯이 그에게 집중되는 마법이었지만, 윤적평은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베어냈다.

"하아압!"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윤적평은 정면 돌파를 고수했다.

마치 상대에게 좌절감을 심어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마법을 받아냈고, 송두안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으으으! 지독한 늙은이!"

"끌끌. 마귀 같은 네년이 할 소리더냐?"

연신 공격을 날려대던 송두안은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남은 마나를 집중해서 강한 힘을 쏟아냈고, 곧 변화가 시작됐다.

쿠구구궁.

요란한 소리와 함께 주변의 돌조각들이 윤적평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강한 폭풍이 휘몰아치며 윤적평을 휩쓸었지만, 그는 어렵지 않게 그 공격을 받아냈다.

티디디딩.

날아드는 공격이 모두 튕겨져 나갔다.

검막을 펼치며 모든 공격을 무로 되돌렸지만, 송두안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쿠구궁.

다시 거대한 돌기둥이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그의 몸을 꿰뚫듯 솟구쳐 오른 날카로운 기둥에 윤적평은 몸을 띄웠다.

동시에 송두안의 표정이 밝아졌다.

"죽어라!"

그가 뛰어오르기만을 기다린 것 같았다.

그녀가 크게 소리치자, 허공에서 마법진이 펼쳐졌다.

허공에서 생겨난 마법진에서는 거대한 돌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상대를 압사시키려는 듯이 위와 아래에서 생겨난 돌기둥이 그대로 윤적평을 압박했다.

하지만 윤적평은 어렵지 않게 몸을 뒤집으며 그 공격을 피해냈다.

"뭐, 뭐냐?"

"내가 익힌 무공이 뭔 줄 모르는 모양이구나? 바로 곤륜의 무공이다."

"고, 곤륜?"

"운룡대팔식이다. 이런 것들은 어렵지도 않지!"

호기롭게 외친 윤적평은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공격을 피해냈다.

그는 오히려 그 돌기둥을 박차며 송두안에게 달려들었고, 뽑아낸 강기가 그대로 그녀를 베어냈다.

푸욱. 촤아악.

생각보다 수월하게 목숨을 취한 윤적평은 검신을 털어내며 혀를 찼다.

"아직도 남은 놈이 많은 건가? 귀찮군. 이놈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도 일이야. 쯧!"

쓰러진 옛 동료를 담담하게 바라보던 그는 몸을 돌렸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복수는 물론이고, 임무까지 완수하려면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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