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위복 (2)
- 제안에 따를 것인가? 계약을 맺는다면 더욱 강력한 힘을 얻을 것이다.
"더욱 강력한 힘이라."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한 존재의 제안에 노인은 고민했다.
쉽게 결정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앞에 있는 놈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까만 털을 가지고 있는 짐승의 손을 가진 존재의 제안에 그는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주저하는 그의 모습에 제안을 한 존재는 마저 말을 이어갔다.
- 이 힘을 토대로 힘을 키운다면… 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뜻인가?"
- 우리의 계약은 그것뿐이다. 주어진 인간의 수를 줄이면 그걸로 충분하다.
"…."
-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 단지 그것뿐이지.
입에 발린 소리였지만, 계약만으로 큰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고심하던 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겹게 쌓아올린 힘에 준하는 여분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더군다나 이 힘을 토대로 더 큰 힘을 키울 수 있었다.
그는 달콤한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고, 결국 계약에 응했다.
"후우. 어마어마하군. 내가 가진 힘에 버금갈 정도의 힘이라니."
- 계약은 성사 됐다.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하지.
"크크큭. 좋군. 아주 좋아."
로브를 쓴 자가 자취를 감췄지만, 노인은 손에 넣은 힘에 관심을 기울였다.
순식간에 배로 늘어난 내공.
터질 것처럼 팽창한 단전에 만족한 그는 환한 웃음을 보였다.
갑자기 떠오르는 낯선 광경들.
무엇보다 환한 웃음을 보이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강준우는 침음을 삼켰다.
'그 노인이잖아?'
그의 손에 쓰러진 노인들 중에 한 명이었다.
형상기검을 사용하는 노인을 필두로,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다.
모두가 비슷한 존재와 계약을 맺은 모습이었다.
임무가 완료됐다는 말과 함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장면은 그들이 계약한 존재였다.
'모습을 감춘 자들이 등장한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고작 한 놈뿐인데.'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저 단편적인 기억이 전부인 것 같았다.
배후에 있는 자들은 물론이고, 이곳에 관련된 비밀을 모두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었다.
[개인 보상이 주어집니다.]
[특정 무공의 성취가 100% 상승합니다.(무작위)]
'부족했었나?'
나름 많은 공을 세웠다고 생각했지만, 원하는 보상이 나오지는 않았다.
내심 예전에 우르치를 처리하면서 지대한 공을 인정받아서 얻은 보상이기를 바랐다.
상점창에서 원하는 무공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보상을 희망했지만, 생각에는 미치지 못한 보상이었다.
특정 무공의 성취가 상승한다는 보상.
만에 하나라도 천마신공의 성취가 오른다면 큰일이었다.
불안한 생각이 스쳤지만, 다행히 오른 무공은 천마신공이 아니었다.
다만, 원하는 등급 외의 무공이 아닌 낮은 등급의 무공이 성장했다.
[점혈이 11성으로 올라섰습니다.]
[점혈의 위력과 효과가 상승합니다. 기공을 이용한 점혈이 가능합니다.]
점혈이 11성으로 올라서면서 새로운 효과까지 얻을 수 있었다.
쉽게 올리지 못할 정도로 높은 성취에 오른 무공이었지만, 그래도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얻은 보상을 뒤로한 강준우는 남은 일행들의 목소리에 상념을 떨쳐냈다.
"도망가던 사람들이 죽은 것 같아."
"누군가가 저들을 노렸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나저나 누구지?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실력자를 처리할 수 있을 정도라면…"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거겠지."
"…."
가장 큰 불안은 이들을 쓰러뜨린 자의 정체였다.
송두안은 물론이고, 여기로 오기까지 마주한 사람들 역시 보통의 실력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 것도 아니었다.
비교적 짧은 시간동안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자들을 쓰러뜨렸다는 것 자체가 그 실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쓰러진 자들은 모두 비슷한 상흔을 가지고 있었다.
"검을 쓰는 고수라."
"남은 사람도 그 사람에게 당했을까?"
"모르지. 그게 사람인지 다른 존재인지는."
"다른 존재?"
"여기에 사람만 있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일전에 마주했던 다크 엘프도 단검을 사용했었다.
베가르드 역시 검을 사용하고 있는 마당에 그들이라고 검을 이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시체에 남은 흔적을 보면 무공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어떤 무공인지 파악할 정도의 식견은 없었다.
이곳에 있는 자들도 은연중에 무공을 사용하고 있는 만큼 속단할 수 없었다.
비슷한 목적을 가진, 아직 드러나지 않는 자에 관해서 고민하는 사이, 베가르드는 정령을 불러냈다.
그리고 그 정령을 통해서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확인했다.
베가르드만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를 통해서 대충 벌어진 일을 전해들은 모두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인간이었다고?"
"그래. 인간이라고 했다."
"…."
엄청난 고수가 또 있는 것 같았다.
이들을 처리한 걸로 봐서 그 사람 역시 같은 임무를 전해 받은 게 분명했다.
'아무리 지쳤다고는 하지만…'
마주한 여자 마법사의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아무래 지친 상황에서 각개격파를 했다고 하지만, 이들을 압도할 실력이 없었다면 짧은 시간에 모두를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심해야겠는데? 그 사람과 마주칠 지도 모르겠어."
"생각이 있다면 쉽게 덤비지는 않겠지."
"그대로 되도록이면 부딪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
수적으로는 유리했지만, 그런 강자와 부딪쳐봤자 좋을 것은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작은 시비가 일어난다면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강준우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마을로 돌아가도 되는 건가?"
"…."
"이미 마을을 공격한 사람들은 다 죽은 것 같은데. 어때?"
"다 죽었다고? 확신하는 건가?"
"함께 움직인 무리들은 다 죽은 게 분명하니까. 너도 사로잡은 놈의 설명을 듣었을 텐데?"
"…."
백선화를 통해서 모든 것을 밝힌 자의 말에 따르면 엘프 마을을 공격한 무리는 노인들을 위시한 그들 무리들이었다.
임무가 완수됐다는 것으로 다른 힘을 가진 자들은 모두 처리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베가르드에게 설명을 할 수는 없었지만, 베가르드도 주된 자들은 모두 죽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아니면 다른 놈들이 더 남아 있다는 거냐?"
"아직 남은 놈들이…"
"그럼 앞장서라. 마저 놈들을 처리하고 너희 대장로를 만나야 할 것 같으니까."
이제 중요한 것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마을을 공격한 자들을 모두 처리한 만큼 대장로를 통해서 이곳에 관한 정보를 얻어내야만 했다.
이미 공격한 놈들이 다 죽은 것 같았지만, 베가르드는 조금 더 확실한 상황을 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아직 남은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서 움직였다.
강준우와 일행들도 그의 뒤를 따라서 일을 마무리지으로고 노력했다.
★ ★ ★
처참하게 죽어 있는 또 다른 시체.
이전에 확인했던 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비슷한 형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걸로 봐서 같은 상대에게 당한 게 분명했다.
"이걸로 확인 된 건가?"
"…."
"아직도 다른 사람이 더 남아 있다는 건 아니지?"
"죽어 있는 이 인간이 마지막인 것 같군."
강준우의 말이 맞았다는 사실에 베가르드는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요아니스와 다른 엘프들이 상대했던 자들은 이미 목숨을 잃은 이후였다.
따로 그들의 복수를 할 자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을을 공격한 자들도 이들이 전부였다.
이미 다른 엘프들을 통해서 대강이나마 그 수를 전해 들었기 때문에 대장로의 명을 확실히 수행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베가르드의 표정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힘을 키운 인간들이라.'
비록 강준우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지만, 이들과 움직이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인간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게 분명했다.
딱딱하게 굳은 베가르드의 표정을 뒤로한 강준우는 쓰러진 사람의 상처를 조금 더 주의 깊게 살폈다.
'강기인 것 같은데. 이들과 원한을 진 사람인가?'
도망간 자들이 흔적을 확인하면서 새로운 고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기를 능숙하게 펼치는 것만 봐서는 그와 비슷한 극마경이나 화경에 이른 고수일 것 같았다.
이미 상대했던 다른 노인들도 비슷한 경지에 이른 고수들이었지만, 지금 확인한 새로운 고수의 등장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 있다면 부딪칠 수도 있겠는데.'
아직 상대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상대가 혼자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쓰러진 시체들의 몸에 남아 있는 흔적은 동일했지만, 다른 동료가 함께 하고 있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만약을 위해서라도 신중하게 살필 필요가 있었다.
치명적인 상처가 난 것만으로도 어떤 형태의 검을 사용하는지 대강이나마 유추할 수 있었지만, 베가르드는 가만히 시체를 살피는 그를 일깨웠다.
"그만 돌아가자."
"…."
"대장로님께서 기다리신다. 마냥 여기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그래. 그게 좋겠네. 어차피 받아야 할 것도 있으니까."
강준우의 말과 함께 베가르드가 다시 앞장을 섰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그의 행동에 다른 사람들도 그의 뒤에 섰지만,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그들을 붙잡았다.
- 네놈들은 누구냐? 거기 쓰러진 놈과는 무슨 사이지?
"…."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모두가 주변을 살폈다.
전음도 아닌 이런 식의 외침은 모두가 처음 접하는 것들이었다.
여러 방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바로 육합전성(六合傳聲)이었다.
사방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만드는 높은 수준의 수법이었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랐지만, 강준우는 흐릿하게 느껴지는 기운을 감지하며 품에 있는 비도를 날렸다.
쐐에엑.
그가 던진 비도가 나뭇가지를 스치며 한 곳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이렇다 할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잠잠한 상황에 모두가 의아해했다.
강준우가 아무 생각 없이 공격을 날렸을 리가 없었지만, 그 생각을 가지기 무섭게 그가 날린 비도가 되돌아왔다.
쐐에엑. 채앵.
그대로 마법사로 보이는 다이스케를 노리며 날카로운 공격이 쏘아졌다.
하지만 강준우의 검격에 막힌 비도는 다시 그의 손에 들어갔다.
'만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건데. 저들을 죽인 자가 나타난 건가?'
손끝에 남은 묵직한 충격에 강준우는 침음을 삼켰다.
육합전성과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비도를 다시 되돌리는 것만 봐서도 상당한 실력자가 분명했다.
그런 그들의 눈앞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흥미로운 눈으로 강준우를 바라보며 나타난 사람은 그동안 상대했던 노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뭐야? 일행이었어?"
"설마, 일행을 죽였다고?"
나타난 노인의 모습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사람들을 이끌던 대부분이 노인이었다.
그것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괴물들이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조금 전에 보인 절묘한 수와 육합전성까지 사용한 걸로 봐서는 이미 경지를 뛰어 넘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노인은 바로 윤적평이었다.
그는 강한 힘을 품고 있는 강준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거기 쓰러진 놈들과는 무슨 관계냐?"
"여기 있는 놈을 당신이 죽인 건가?"
"…."
"죽은 노인들과는 무슨 관계지?"
"허어.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을 봤나. 내가 먼저 묻질 않았더냐?"
오히려 되묻는 강준우의 말에 윤적평은 황당해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내비치기 무섭게 날카로운 일격이 날아들었다.
경시할 수 없을 정도로 예리한 공격에 윤적평은 절로 얼굴을 찌푸리며 공격을 받아냈다.
쉬이익. 채앵.
목을 벨 것처럼 날아드는 예리한 검격.
그 공격을 날린 사람은 앞에 있는 강준우가 아니었다.
"에, 엘프?"
"네 목으로 형제들의 넋을 위로할 것이다!"
"…."
생각지도 못한 상대가 공격을 감행해왔다.
분개한 베가르드의 검이 그 수를 늘리며 윤적평을 옥죄어왔다.
갑작스러운 검격과 전방을 가득 채우는 수많은 검신에 윤적평은 기운을 끌어 올렸다.
가장 경계해야 할 놈은 다른 놈인 것 같았지만, 지금은 달려드는 엘프의 공격을 받아내는 게 먼저였다.
티디디딩.
그 역시도 검격을 날리며 모든 공격을 튕겨냈다.
하지만 그 순간, 강한 기운을 품은 일격에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