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위복 (5)
걷잡을 수 없는 살의가 강준우의 몸을 잠식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강준우는 고개를 돌렸고,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김연희의 모습이 그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누, 눈이 돌아갔…"
"위험하다. 물러나라!"
"아악!"
베가르드의 외침과 함께 강준우가 손을 뻗었다.
예의 일양지가 그대로 김연희를 노리며 쏘아졌다.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김연희는 깜짝 놀랐다.
설마하니 강준우가 자신을 공격할 거라고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살의를 가지고 날아드는 강력한 공격은 반응을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대기하고 있던 권우철이 그녀를 밀어내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콰앙.
신성력을 잔뜩 실으며 대신 공격을 받아냈지만, 그의 몸은 무기력하게 튕겨져 나가며 바닥에 처박혔다.
"궈, 권 상!"
"선배! 괜찮아?"
"크윽. 나는 괜찮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권우철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신성력을 덧댄 방패는 큰 구멍이 뚫렸고, 그의 팔도 곧 떨어져 나갈 것처럼 큰 상처를 입었다.
방패는 물론이고, 갑옷까지 입고 있었지만, 큰 소용이 없었다.
갑옷에도 신성력을 부여했던 만큼 힘겹게나마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라진 강준우의 제대로 된 공격은 큰 피해를 남겼다.
"리스토레이션(restoration)!"
"…."
"리스토레이션! 힐! 힐!"
권우철은 여러 번의 치유를 통해서 몸을 다시 회복했다.
부서진 갑옷과 방패를 제외하고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였지만, 몸이 다친 것보다 더 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이지를 상실한 것 같은 강준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같은 편이라는 생각이 없었는지 그는 일행들을 향해 움직였다.
달라진 그의 모습에 모두가 긴장하며 주저했지만, 베가르드가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조심해라! 정면에서 공격을 받아내지 마라."
"…."
그의 말대로 정면에서 받아내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그렇다고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느린 그들로서는 강준우의 공격을 피하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헤이스트! 헤이스트!"
"여, 연희야?"
"조심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거 밖에 없는 것 같으니까."
따로 공격을 한다고 먹힐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강준우는 공격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는지 공격보다는 피하는 것에 중점을 뒀다.
"블레싱!"
"노움!"
"젠장, 그래비티!"
저마다 조금이라도 살 확률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강준우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건 다이스케뿐이었지만, 그마저도 중력을 조절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가 마법을 사용하기 무섭게 강준우가 달려들었다.
그는 순식간에 다이스케에게 쇄도했지만, 기다리고 있던 베가르드가 검격을 뿌리며 그를 제지했다.
쉬이익. 채앵.
"크윽."
베가르드의 공격은 너무 쉽게 가로막혔다.
오히려 그에게 섬전이 쏘아졌다.
쉽게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빠른 검격이 목을 노렸지만, 베가르드는 힘겹게 그의 공격을 쳐냈다.
'무지막지한 힘이다! 이건 저주 받은 힘인가?'
강준우가 뿜어내는 힘은 엘프들이 다크 엘프로 변했을 때, 나타나는 힘과 닮아 있었다.
정확히 그 힘은 아니었지만, 그가 뿜어내는 마기는 진한 살의를 품고 있었다.
"정신 좀 차려!"
"으윽. 그래비티로 억누르고 있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잖아?"
삐리링.
뒤늦게 유키코도 파혼소를 쏘아내며 강준우의 정신을 뒤흔들었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베가르드를 필두로 그들은 강준우에게 맞섰다.
자리를 피하는 것은 요원해 보였다.
차라리 강준우가 정신을 되찾기를 바라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터엉. 터엉.
베가르드는 달라진 강준우의 공격을 받아냈다.
힘겹게 그의 공격을 흘리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신 밀리는 상황에 이를 악물며 버텨야만 했고, 그를 돕기 위해서 다른 일행들이 힘을 모았다.
"그래비티!"
"힐!"
"노움! 발을 묶어!"
쿠구궁. 콰앙. 콰앙.
점점 상처가 늘어나는 베가르드의 모습에 권우철은 그를 도왔다.
강준우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가할 수 없는 만큼 가장 큰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베가르드를 회복시키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의 치료가 강준우의 공격력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베가르드의 몸에 상처가 더욱 늘어났다.
백선화는 계속 노움을 이용해서 그의 발을 묶었고, 하야테는 마법을 날리며 그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하지만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었다.
콰앙.
"크흡!"
"선화야? 괜찮아?"
"괘, 괜찮아."
강제로 귀환된 노움과 함께 충격을 입은 그녀가 비틀거렸다.
짧은 순간 아주 작은 공백이 생겨났다. 하지만 강준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베가르드를 떨쳐냈다.
콰앙.
강한 충격에 베가르드가 튕겨져 나갔다.
각혈을 토하는 그 모습에 권우철은 다시 그를 회복시키며 빈자리를 채워야만 했다.
"끄윽."
"리스토레이션!"
권우철만으로는 강준우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 유키코는 급하게 소수를 뿌리며 그를 도왔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뿌린 유키코의 무공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퍼엉. 치이이이.
어느새 혈수마공을 펼친 강준우의 손짓에 주변을 얼리던 얼음이 녹아내렸다.
9성의 소수도 제대로 된 위력을 내보일 수 없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장력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연희는 답답한 마음에 크게 소리쳤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
강준우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모두가 덤벼도 그를 막지 못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를 제압할 수도, 그렇다고 쓰러뜨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크게 소리치는 것뿐이었다.
이제 곧 헤이스트도 끝날 시간이었다.
그나마 김연희가 걸어둔 헤이스트로 겨우 버티고 있었지만, 다시 모두에게 헤이스트를 걸어줄 만한 마나가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일부를 택해야 했다.
하지만 남은 마나를 가늠하던 그녀는 자신을 직시하는 강준우의 눈빛에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흐읍!"
조금전에 소리친 것이 강준우의 주의를 끈 것 같았다.
간신히 그의 이목을 끌던 베가르드가 튕겨져 나간 상황에서 강준우의 시선이 김연희에게 꽂혔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싸늘한 눈빛에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안 돼! 준우야!"
"이익. 그래비티!"
"노움! 막아!"
콰과광.
강준우는 쏟아지는 공격을 튕겨냈다. 그리고 앞에 있는 김연희의 목을 틀어쥐었다.
아무리 천마신공이 10성으로 올랐다고 하지만, 소진한 내공이 무한할 수는 없었다.
그의 능력을 벗어난 힘까지 펼친 마당에 단전이 바닥을 드러내는 것은 당연했다.
이대로라면 진원진기를 사용해야만 했다.
이미 이성이 없는 그였지만,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기피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익숙한 물약을 찾았다.
목이 잡힌 김연희는 빠져나가는 기운을 느끼며 눈을 부릅떴다.
곧바로 자신을 죽이지 않고 기운을 뽑아내는 강준우의 모습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꼈지만, 강한 압박에 생각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
빠르게 빠져나가는 마나.
가진 힘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이대로 마나를 모두 빼앗긴다면 끝이 자명했지만, 뽑혀나가던 기운이 움직임을 멈췄다.
'뭐, 뭐지?'
[상청무상신공(上淸無上神功)을 획득하였습니다.]
[상반된 무공이 천마신공과 부딪칩니다. 조화신공의 공능이 두 힘을 조율합니다.]
[천마신공의 마기를 억누릅니다.]
[천마강림이 해제됩니다.]
[상대가 가지고 있던 포인트를 강탈합니다.]
다시 들려오는 여러 알림들.
그와 함께 까만 어둠속에 묶여 있던 강준우의 정신이 되돌아왔다.
"흐음."
"… 끄윽."
목에 가해지는 강한 압박이 느슨해지자 김연희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천마흡기공을 멈춘 강준우의 행동에 김연희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
의아한 표정으로 상황을 살피는 강준우의 모습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지만, 아직 강준우의 상태를 확신할 수 없었다.
"이제 정신이 든 거야?"
"…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보면 몰라? 우선 이 손 좀 놓고 말해!"
"…."
뒤늦게 설움이 들었는지 김연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강준우를 일깨웠다.
상황을 인지한 강준우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고, 남은 일행들도 안도하며 안부를 물었다.
"연희야 괜찮아?"
"안 괜찮아. 으윽. 목 부러지는 줄 알았네."
꽉 잡힌 목을 매만진 그녀는 다리가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행히 강준우가 제때 정신을 차리면서 무사할 수 있었지만, 조금만 늦었다면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지도 몰랐다.
다른 일행들도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강준우는 제자리에 앉아서 호흡을 고르는 일행들의 모습에 옅은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후우.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건가?'
짧은 순간 벌인 일들이 뒤늦게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의지를 벗어나서 움직인 스스로의 몸.
'천마강림?'
무지막지한 힘을 낼 수 있는 능력이었지만, 정작 그 힘이 불러왔을 지도 모를 참사를 생각하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다행히 곧 죽어가던 윤적평의 목숨이 끊기면서 그의 무공을 흡수할 수 있었다.
곤륜의 절기인 상청무상신공(上淸無上神功)을 손에 넣으면서 천마강림을 풀어낼 수 있었고,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그는 윤적평을 바라봤다.
엄청난 고수가 숨이 끊어진 채로 쓰러져 있었다.
'만약 저 노인이 죽지 않았더라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게 분명했다.
윤적평을 쓰러뜨린 것과 그의 몸에서 상청무상신공을 얻은 것까지.
그뿐만 아니라 함께 움직인 모두에게 천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기억이 남아 있었다.
단편적인 기억들은 쓰러진 윤적평의 기억인 것 같았다.
'이게 왜?'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당혹스러웠지만, 조심스럽게 들려오는 우려 섞인 목소리에 그런 생각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
"준우야? 너 괜찮은 거야?"
"… 괜찮아."
"리무브 커스(remove curse)! 힐!"
"뭐하는 거야?"
"혹시 몰라서. 이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
다행히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지만, 확신을 할 수는 없었다.
권우철은 불안해하며 신성력을 부여했다.
힐과 리무브 커스를 통해서 그를 지배하던 알 수 없는 힘을 조금나마 약화시키려고 했다.
그런 권우철의 의도를 깨달은 강준우는 씁쓸해하며 남은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모두… 미안해."
"…."
"미리 대비를 했었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었나 봐."
"네 입에서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다이스케는 놀라워했다.
지금이야 담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지만,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그는 주저앉은 채로 강준우의 상태를 살폈다.
'확실히 제 정신을 차린 건가?'
여전히 불안했다.
갑자기 달라진 강준우의 모습에 일전에 그가 유키코에게 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잘못하면 유키코도 저런 식으로 변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는 잘게 입술을 깨물었다.
무거운 분위기를 뒤로한 강준우는 스스로의 상태를 살폈다.
그 역시도 불안했다.
언제 다시 천마강림을 펼칠지 알 수 없었다.
'내 통제를 벗어난 무공이라.'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일을 벌인다는 게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고민하던 그는 스스로의 혈을 점했다.
투두두둑.
11성에 이른 점혈로 잠시나마 천마신공의 기운을 묶어둘 생각이었다.
손에 넣은 상청무상신공의 힘을 키울 때까지 되도록 천마신공을 자제하는 게 나으리라는 판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