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난 비밀 (2)
강준우는 다시 엘프의 대장로와 마주했다.
베가르드가 마을 안으로 들어가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이후에야 엘프들의 대장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그가 나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만큼 그들이 기다린 시간은 길었다.
다행히 생각할 것이 많았던 강준우였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히려 기다리던 다른 사람들이 불편함을 드러냈다.
그들은 마을과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늦었군요."
"… 그렇게 됐네."
다시 마주한 대장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표정과 함께 하고 있는 베가르드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강준우는 침음을 삼켰다.
'흐음. 설마, 그 일이 드러난 건가?'
처음 만난 엘프들과의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도 당당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었다.
다시 그런 상황을 마주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강준우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대장로를 바라봤다.
"그래. 부탁한 일은 잘 해결한 것 같더군."
"그런가요?"
"이 아이에게 전부 전해들었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이네."
"…."
당연히 대장로에게 모든 것을 알려야만 했다.
그게 베가르드의 역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베가르드의 눈빛은 얼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들을 처리하는 대가로 캐롤라인을 비롯한… 아니지. 지금까지 엘프들과 있었던 일을 불문에 부치자고 했었지?"
"…."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난 대장로의 말에 강준우는 말을 아꼈다.
달라진 태도로 봐서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알아낸 게 분명했다.
'정령을 이용해서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확인한 건가?'
베가르드와 움직이면서 정령을 이용하는 여러 방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령의 도움으로 싸움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곳의 일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확인한 거라면 이렇게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장로의 말에 이들이 이미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묘하게 말을 바꾼 이유를 알겠더군."
"먼저 우리를 공격한 쪽은 그 엘프들이었죠."
"그대들의 입장도 이해를 하지만… 그 아이들이 그렇게 대지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후우."
대장로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말을 아꼈다.
이미 세계수에 맹세를 한 이후였다. 그 맹세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앞에 있는 인간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지금 강준우의 몸에서 느껴지는 힘은 이전에 만났을 때와는 또 달라져 있었다.
여기에서 앞에 있는 인간들과 부딪친다면 다시 피해가 남을 게 분명했다.
이미 베가르드에게 강준우의 상황을 전해들은 만큼, 대장로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불문에 부치겠다고 세계수에 맹세를 한 일이었다.
"약속은 약속이니. 그 일은 묻어두겠네."
"저놈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요?"
"네놈! 잘도 나를 속였겠다!"
"속이다니? 그저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뒤에 있던 베가르드가 강준우의 지적에 언성을 높였다.
경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그의 감정이 격해지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베가르드는 분한 듯 강준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네놈들을…"
"먼저 공격한 쪽을 그들이라고 했을 텐데?"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강준우도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함께 싸우면서 힘이 됐던 베가르드였지만, 이런 상황에서 공격을 한다면 참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곧 부딪칠 것 같은 둘의 모습에 대장로가 나서며 중재했다.
"베가르드? 그만 힘을 거둬라."
"대장로님. 저들은…"
"되었다. 어찌 됐든 이들은 우리를 돕질 않았더냐?"
"하지만…"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지만, 대장로와 시선을 마주한 베가르드는 고개를 떨궜다. 대장로가 아무 생각 없이 이런 판단을 내렸을 리가 없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나설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미리 자리를 옮긴 대장로는 분위기를 일깨우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일을 해결했으니, 나도 약속을 지켜야겠지?"
"…."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겠네."
대장로의 말에 강준우와 일행은 긴장하며 귀를 기울였다.
사뭇 진지한 그들의 모습에 지켜보던 베가르드는 말을 아꼈고, 대장로는 마저 설명을 이어갔다.
"이곳은… 그대들이 있던 곳과 완전히 다른 곳이네."
"다른 곳?"
"차원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인간들에게 배신당하고, 내몰린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지."
"…."
"그대들이 봐왔던, 여기에서 만났던 대부분은 오랜 과거에 인간들과 함께 살아왔던 존재들이네. 그리고 여기는 인간에 의해서 밀려난 존재들이 삶을 이어가고 있는 다른 차원이지."
대장로는 약속을 지키며 이곳을 설명했다.
이미 단편적인 기억들을 얻으면서 어렴풋이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봐왔던 웨어 울프나 오크, 고블린과 뱀파이어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물론, 쉽게 믿을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허구라고 생각했던 존재들이 모여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놈들을 인간들이 몰아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들 모두가 말이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인간에 의해서 밀려났다니. 그게 사실입니까?"
"내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은가?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무엇일 것 같은가?"
"하지만 인간은 아무런 힘도 없는데요? 총이 있다고 하더라도 큰 도움이 됐을 것 같지 않은데."
뒤에서 그 말을 듣던 김연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뇌까렸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아무리 강력한 화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웨어 울프나 뱀파이어들을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더군다나 오랜 과거라면 총과 같은 강력한 무기는 없었다고 봐야 했다.
의구심이 가득한 김연희의 말과 일행의 반응에 대장로는 씁쓸해하며 말을 이어갔다.
"인간들은 나약했지."
"나약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강한 존재들을 몰아낼 수 있었죠?"
"하지만 영악했지. 힘이 약할 때는 힘이 강한 자들과 함께 했네. 그렇게 힘을 얻고, 그 힘을 키워갔지."
"…."
"그들은 머리가 좋았어. 욕심도 많았지. 다른 힘을 손에 넣었고, 후대를 위해서 그 힘을 물려주고 발전시켜나갔네. 그리고 나중에는 후대에 큰 위협이 될 거라고 생각한 종족들을 쓰러뜨리기 시작했지. 힘이 약할 때는 서로 다른 종족들을 부추기면서 서로를 싸우게 만들었지."
대장로의 말만 들어보면 이들이 인간을 적대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정작 이곳으로 끌려온 그들은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죠?"
"…."
"우리는 전부 처음 듣는 것들인데요."
"그럴 지도 모르지. 인간들의 수명은 짧으니까."
"그들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과 우리들은 아무 상관도 없는데. 왜 우리가 이곳에 끌려와야만 하는 겁니까?"
"그에 대한 답은… 내가 해줄 게 아닌 것 같군."
"…."
이미 대장로는 약속했던 것들을 모두 지켰다.
엘프들과의 일을 불문으로 부쳤고,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려줬다.
이어지는 질문에 답을 할 이유가 없었다.
조금 충격적인 내용들까지 알아낼 수 있었지만, 정작 그들이 이곳으로 끌려온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굳게 입을 다문 대장로의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따로 강제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싸운다고 하더라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가 바로 앞에 있는 대장로였다.
"이제 볼 일은 끝난 것 같은데. 어떤가?"
"…."
"되도록이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멀어졌으면 좋겠네."
"엘프들이 공격당한 이유는 그 인간들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힘을 전해준 다른 존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잘 알고 있네."
"알고 있다고요?"
"마을을 공격했던 인간들이 가지고 있던 힘을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겠나?"
대장로는 이미 계약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강준우는 그런 대장로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을 생각입니까?"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나?"
"당연히 일을 저지른 자들을…"
"그들과 싸워봤자 희생되는 것은 엘프들뿐이질 않은가?"
"…."
무게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조금이나마 대장로라는 엘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의 그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말이었다.
"배신한 인간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불러들인 거라면 당연히…"
"그대들을 우리가 불러들인 것이 아니네."
"…."
대장로는 선을 그었고, 강준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쩔 수 없나?'
따로 이들의 도움을 얻으려고 생각했었다.
함께 한 베가르드가 큰 힘이 된 것처럼 모든 엘프들의 도움을 얻으면 적대적인 자들을 조금 더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호한 대장로의 모습을 봐서는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이제 그만 헤어졌으면 하네만?"
"… 그렇게 하죠."
"아, 만약 경계를 지키는 아이들과 만난다면 무작정 공격하지 말아줬으면 하네."
"…."
"그대와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많은 불만을 잠재워야 했거든.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네."
점잖은 말투였지만, 강한 경고의 뜻을 담고 있었다.
강준우로서도 따로 적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대강이나마 싸워야하는 자들의 정체를 확인한 상황이었다.
그들을 상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먼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아야겠죠."
"우리 마을이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을 거네."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강준우의 답에 대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스러운 답은 아니었지만, 괜한 싸움으로 남은 엘프들을 희생시킬 생각은 없었다.
지난 일로 불편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계속 대화를 나눈다고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았고, 강준우는 그만 일행들을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때, 대장로가 그를 붙잡았다.
"아, 듣자하니 저주 받은 힘이 그대를 지배했다고 하던데?"
"저주 받은 힘이요?"
"그대가 가지고 있는 어두운 힘 말이네."
"…."
가지고 있는 천마신공을 가리키는 말 같았다.
갑자기 그 말을 꺼내는 대장로의 모습에 강준우는 말을 아꼈다.
"아무래도 많은 주의가 필요할 거네."
"주의요?"
"우리를 몰아냈던 인간들 역시 그 힘에 사로잡혔다고 봐야지."
"그 힘에 사로잡히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대들이 손에 넣은 힘 말이네. 쉽게 다룰 수 있는 힘이 아니지. 특히나 저주 받은 힘에 가까운 힘들은 더욱 그럴 테고."
여러 능력은 물론이고, 마공에 관해서 뭔가 아는 듯한 눈치였다.
대장로 역시 엄청난 기운을 품고 있는 고수였다. 어쩌면 대장로를 통해서 드러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묘한 기대감을 품은 강준우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물었다.
"따로 방법이 있는 겁니까?"
"방법이라니?"
"이 힘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이…"
"그건 온전히 힘을 사용하는 자의 역량이겠지. 응당, 그 힘을 사용하는 자가 져야 할 책임이고."
"…."
내심 기대를 했던 강준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대장로의 말에 실망했다.
따로 말을 꺼낸 걸로 봐서 큰 조언을 해줄 것 같았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대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인간들 모두가 조심해야 할 거네. 모두가 비슷한 상황을 겪게 될 지도 모르니까."
"…."
"갑작스럽게 얻은 힘은 큰 변화를 주지. 그게 인간이든, 엘프든."
엘프를 덧붙이는 말에 달라졌던 다크 엘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 역시 저주 받은 힘을 받아들이면 완전히 다른 힘을 뽑아냈다.
힘을 사용하는 자의 역량이라는 말을 되뇌던 그는 가만히 대장로의 말을 곱씹으며 물었다.
"엘프들은 어떻죠?"
"엘프들?"
"저주 받은 힘? 그걸 받아들인 엘프들은 완전히 변하는 것 같던데요? 그렇게 한순간에 바뀔 거라면 그 힘이나 내가 가진 힘이나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은데요?"
"우리라고 크게 다를 게 있을 건 없겠지. 다만, 인간들보다는 나을 테지. 적어도 오랜 시간동안 노력하고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