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처지들 (1)
대장로와의 대화를 통해서 갑자기 끌려온 것이 어딘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부가적인 것들과 우려 섞인 말도 들었지만,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을 들여서 힘을 키워야 한다라.'
급하게 얻은 힘은 위험하다는 대장로의 말을 곱씹었지만, 그런 말은 엘프에게나 가능한 방법이었다.
인간과 엘프는 수명 자체에서 큰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그 말을 따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알 수 없는 시스템을 이용해서 힘을 얻는 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결국에는 무공을 익히는 사람의 역량이 중요한 것 같았다.
다만, 그런 것들은 강준우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당분간은 주의를 기울여야겠지만, 앞으로 만날 적들의 상태가 어떨 지 문제였다.
지금까지 상대한 적들보다 더 강해지면 강해졌지 약해지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이제 어떡하지?"
"…."
대장로와 베가르드를 뒤로한 그들은 앞으로를 고민했다.
엘프들은 이미 선을 그었다.
따로 이 싸움에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고, 그들이 싸움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다.
막막한 물음에 강준우도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가만히 권우철의 질문을 되뇌던 다이스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엘프놈들도 황당하네."
"황당하다니?"
"그렇잖아? 뒤에 있는 놈들하고 싸우는 건 꺼리면서, 먼저 우리를 공격한 건 정확히 집고 넘어가잖아! 애초에 그놈들이 먼저 우리를 공격했다고!"
"…."
별다른 경고도 없이 먼저 공격을 한 쪽은 산맥을 지키던 두 엘프들이었다.
비록, 엘프 마을에서 떨어져 나온 자들이라고는 하지만, 공격을 당한 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 때문에 화를 내는 것 같더니, 다른 놈들한테는 찍소리도 못 하는 거잖아?"
"그러게 지들도 적이 누구란 걸 알았으면 적당히 나서야 할 거 아니야? 괜히 우리한테만 화풀이를 한 거잖아?"
김연희가 뒤늦게 그 말에 동의하며 투덜거렸지만, 이미 대장로와 베가르드가 사라진 이후였다.
사실, 그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불평도 가능했다.
두 엘프가 있었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다이스케의 말에 유키코는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대장로가 있을 때, 그 말을 해보지 그랬어?"
"미쳤어? 괜히 그랬다가는 우리가… 크흠."
다이스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왔지만, 일행 대부분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엘프들이 저렇게 몰린 이유가 있었네."
"너무 꽉 막혔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게 용하다!"
오히려 적의를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남은 사람들은 투덜거렸다.
억울한 그들로서는 그런 엘프들의 모습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엘프들에 대한 적의보다는 답답한 마음이 더 컸다.
대강이나마 진실을 알게 된 상황이 오히려 더욱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지? 앞으로 상대할 놈들이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알지도 못하는 일을 왜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건지."
"… 여기에서 그런 말을 한다고 달라질 건 없어."
백선화의 말마따나 불평을 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진실을 알 수록 답답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힘을 키우면서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는 것뿐이었다.
한숨을 내쉬는 일행들을 뒤로한 권우철은 강준우를 향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우리들이 가진 힘만으로 놈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엘프를 끌어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대장로라는 엘프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어."
"엘프들도 꺼려할 정도라면… 쉬운 상대는 아니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강준우의 동의에 모두의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하지만 강준우는 침울해 하는 일행들을 일깨우며 말을 이어갔다.
"우선 근방을 살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때?"
"근방을?"
"어차피 엘프들이 지키는 쪽으로는 갈 수 없잖아. 그렇다고 안으로 들어가기에는…"
"우리가 많이 부족하지?"
"그것도 그렇지."
김연희는 부정하지 않는 강준우의 대꾸에 입술을 빼쭉였다.
그냥 말만이라도 아니라는 답을 원했지만, 큰 변화를 겪은 것 같던 강준우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긴, 갑자기 바뀌면 죽는다고 하던데. 죽을 일은 없겠네.'
여전히 무뚝뚝한 그의 반응에 김연희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강준우는 그녀를 무시하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강한 놈들이 나타나는 것 같아."
"여기에서 더 안쪽을 말하는 거지?"
"저기 솟아있는 산이 최종 목적지일 것 같지 않아? 목적지로 향할수록 지키고 있는 놈들이 강해지는 건 당연한 것 같고."
"… 최종 목적지라."
병풍처럼 늘어진 산맥의 안쪽에는 거대한 산이 솟아나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이 향할 마지막 장소인 것 같았다.
지금까지 움직인 것이 외각에서 점점 안으로 들어가는 형세였고, 몇몇의 존재들을 상대하면서 그 사실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강준우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도 꺼릴 정도로 강력한 존재들이 남아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우선 산맥 주변을 움직이면서 힘을 키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우리가 잡을 만한 놈들이 있을까?"
"차라리 다시 아래로 내려가면 어때? 안드레이라는 사람이 갔던 곳으로 합류하면서 힘을 키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이제 와서 쫓아간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그래. 너무 늦었을 거야."
각자가 자신의 생각을 밝혔지만,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상황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계속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우선은 강준우의 말처럼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게 나았다.
"우선 가 보자. 계곡을 다시 넘어야 하나?"
"아무래도 그쪽으로 가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아."
라미아를 처리했던 쪽을 살필 생각이었다.
지금까지는 베가르드가 앞장섰지만, 이제는 백선화가 나섰다.
"내가 앞장설게."
"괜찮겠어?"
"정령만 부릴 거야. 앞은…"
"내가 맡을 게."
권우철이 자처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 뒤로 유키코와 백선화가 자리를 잡았고, 남은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대형이었다.
따로 정령을 불러낸 백선화는 일행에 도움이 되면서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강준우를 비롯한 모두는 그런 그녀의 뜻을 존중했다.
앞장서는 백선화를 뒤로한 강준우는 넝마가 된 갑옷을 벗었다.
천마반탄기를 사용하면서 찢겨 나간 갑옷이 이제는 거추장스러웠다.
'이제 호신강기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 이건 필요 없겠지?'
귀물로 분류된 견고한 판금 갑옷이었지만, 앞으로 호신강기를 사용하면 큰 쓸모가 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움직이는데 더 방해가 되고 걸리적거렸다.
천마반탄기까지 익히고 있는 상황에서 본인보다는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게 더 나았다.
"이건 네가 쓰면 좋겠네."
"내, 내가?"
갑자기 갑옷을 건네는 강준우의 행동에 하야테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다.
고철로 변한 갑옷의 형태는 볼품없었지만, 그게 어떤 물건인지 잘 알고 있는 하야테는 곧바로 갑옷을 받아들였다.
"고, 고맙다."
"… 그만 가자."
선물에 하야테는 고마운 뜻을 전했지만, 강준우는 무뚝뚝한 반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어리둥절해 있는 그를 다이스케가 일깨웠다.
"뭐해? 안 입고?"
"어? 그, 그래."
"말 했잖아. 츤데레라고."
"…."
속삭이는 다이스케의 말을 무시한 하야테는 곧바로 갑옷을 착용했다.
부서진 갑옷이 다시 복구되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착용할 수 있었다.
제대로 된 갑옷이라고 할 수 없는 형태였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는 밝아진 얼굴로 일행들을 뒤쫓았고, 강준우는 일행들 뒤로 물러나며 후방을 맡았다.
'조금씩 힘을 키워야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네.'
앞으로 상대할 적을 생각하면 혼자만으로는 힘들었다.
우선은 일행들부터 차근차근 힘을 키워나가고, 이곳으로 떨어진 사람들의 힘을 모아나가야만 했다.
★ ★ ★
다시 방향을 잡은 그들은 계곡을 건넜다.
이전과는 다른 위치였지만, 계곡을 건넌 것만으로도 엘프들과의 엮일 일은 없다고 봐야했다.
"여기에도 다른 종족들이 남아 있을까?"
"다른 종족이라니?"
"엘프도 있는데, 다른 종족이라고 없으려고? 드워프나 뭐 이런 것들은 없나?"
"…."
의아해하는 김연희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말처럼 다른 종족이 있을지도 몰랐다. 오히려 다른 종족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베가르드라는 엘프한테 물어볼 걸 그랬네."
"그놈이 퍽이나 말해줬겠다! 안 싸운 것만 해도 다행이지."
"그런가? 그래도 사이가 좋았을 때 물어봤으면…"
"그 말은 이제 그만하는 게 좋지 않을까?"
"…."
권우철은 다이스케의 말을 가로막았다.
굳이 그 일을 언급해봤자 좋을 건 없었다. 지금은 엘프를 적으로 돌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았다.
"그나저나 그 라미아라는 놈은… 아니, 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존재가 더 없는 건가? 왜 안 보이지?"
"라미아가 나타나도 문제일 것 같은데? 일전에 겪어봐서 알겠지만, 우리가 쉽게 상대할 놈은 아니었잖아?"
"그건 그랬지."
산맥을 타고 안쪽이 아닌 그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일부러 약한 놈이 있는 곳을 살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상대하기 쉬운 존재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괜찮을까? 이대로 움직여도?"
"뭐라도 나오겠지. 그때가 되면 이런 생각도…"
"조심해. 누가 오고 있어!"
"…."
뒤에 있던 강준우는 빠르게 다가오는 기감을 확인하며 일행들을 일깨웠다.
투두둑.
그 와중에 스스로의 혈을 두드리며 만약을 대비했고,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무기를 꺼내들며 긴장을 유지했다.
"어느 쪽이야?"
"저쪽이야!"
백선화는 강준우를 대신해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별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숲속이었다. 하지만 백선화까지 확신을 하며 말하는 것을 보면 누군가가 가까워졌다는 것은 분명했다.
"블레싱! 홀리 아머, 홀리 웨폰!"
권우철은 신성력을 끌어 올리며 이어질 상황에 대비했다.
그가 신성 마법을 사용하자, 유키코고 기운을 끌어 올렸지만, 강준우가 그런 그녀를 일깨웠다.
"되도록이면 소수마공은 사용하지 마."
"하지만… 그래. 알았어."
의미심장한 말에 유키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준우가 괜히 그런 말을 꺼낼 사람은 아니었다.
일전에 보인 그의 모습을 확인한 만큼 그녀도 눈치가 있었다.
'마공을 사용하면 그런 식으로 변하는 건가?'
강준우야 워낙 강한 힘을 내보여서 막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만에 하나라도 이성을 잃고 일행들을 공격하게 된다면 오히려 강준우의 손에 제압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냥 제압당하는 걸로 끝날까?'
잠깐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쩌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 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유대감을 쌓았다지만, 그런 상황이 오면 강준우가 어떻게 대처할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지금까지 보인 강준우의 모습만 봐서는 그대로 목숨을 잃는 것도 염두에 둬야만 했다.
끔찍한 상상에 잘게 몸을 떤 그녀는 허리춤에 채워둔 대금을 꺼내들었다.
그동안 소수마공 하나만 익히기 위해서 준비를 했지만, 아무래도 음공을 먼저 키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사사삭.
그녀가 대금을 꺼내들기 무섭게 적막이 깨졌다.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수풀 스치는 소리에 모두는 마른침을 삼켰다.
동시에 무언가가 수풀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크아아아!"
"흐읍!"
[천마신공의 공능이 피어를 이겨냅니다.]
짐승처럼 울부짖은 소리에는 제법 강한 힘이 남아 있었다.
미처 반응하지 못한 다이스케가 움찔거렸고, 그 모습을 확인한 자가 빠르게 쇄도하며 그의 목을 노렸다.
가타부타 말도 없었다.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달려든 그는 앞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오로지 다이스케를 노렸다.
맹목적인 그의 모습에 권우철이 방패를 들어 올리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상대는 개의치 않고 그대로 방패를 후려쳤다.
"크아아!"
콰앙.
괴성과 함께 강한 충격에 권우철이 밀려났다.
나름 작정을 하고 공격을 막아냈지만, 생각보다 나타난 자의 힘이 강력했다.
'극마경? 가진 힘이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가볍게 권우철을 밀어낸 상대의 모습에 남은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