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처지들 (3)
"너… 괜찮은 거야?"
가만히 서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강준우의 모습에 김연희는 불안한 듯이 물었다.
다시 이성을 잃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걱정이 가득한 그녀의 물음에 강준우는 정신을 일깨우며 답을 이어갔다.
"괜찮아. 다른 사람들은 어때?"
"글쎄. 선배? 괜찮은 거지?"
"어. 나는 괜찮아. 그리고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아."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큰일이 일어나기 전에 강준우가 상대를 쓰러뜨렸기 때문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모두가 어느 정도 성장을 한 상황이었다.
화경을 넘은 자를 상대로 큰 부상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강준우의 말에 일행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럼 다시 준비해."
"준비라니?"
"누가 오고 있어. 이번에는 수가 제법 되는 것 같아."
"…."
이제 겨우 싸움을 끝낸 상황에서 다시 적을 맞을 지도 몰랐다.
시기가 너무 공교로웠다.
아무래도 지금 다가오는 자들은 강준우가 쓰러뜨린 자와 관련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강준우의 말에 일행들은 소진한 기운을 회복하기 위해서 단약을 입에 넣었다.
하지만 모든 기운을 회복하기도 전에 일련의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준우의 말처럼 새로운 자들이 나타났다.
나타난 사람들 역시 그들과 같은 인간이었다. 아무래도 쓰러진 자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은 쓰러진 사내의 처참한 모습에 고정됐다.
그리고 한 사람이 격분하며 소리쳤다.
"파, 파블로? 파블로!"
"…."
아마도 쓰러진 사람의 이름이 파블로인 것 같았다.
'대략… 열 명인가?'
드러난 수만 봐서는 여덟 명이 전부였지만, 아직 합류하지 않은 두 명이 더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정체를 눈치챈 강준우는 앞에 있는 자들을 바라보며 고심했다.
이제 되도록이면 이런 식의 싸움을 피하는 게 좋았다.
죽은 윤적평이 남긴 기억처럼 남아 있는 다른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인간들끼리 힘을 합쳐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보인 반응만 봐서는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았다.
"파블로를 이렇게 만든 게… 당신들인가요?"
"…."
비교적 정중한 어투로 묻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적의였다.
곧바로 공격을 해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뒤에 있던 한 사람이 그런 그녀를 만류했다.
"타티아나. 진정해."
"진정하라고? 저기 파블로가 쓰러져 있는데?"
"파블로가 정상은 아니었잖아. 저 사람들도… 어쩔 수 없었겠지."
"…."
사내의 말에 타티아나라고 불린 여자는 말을 아끼며 호흡을 골랐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전음인가?'
뒤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강준우는 따로 뭔가를 말하는 사내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내보인 반응만 봐서는 곧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하지만 앞에 있는 여자는 그 말을 듣고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이 어색했지만, 그래도 강렬했던 적의가 많이 누그러진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반응이었다.
곧바로 싸울 거라고 생각했던 강준우와 일행들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들 역시 이제 이런 식의 싸움은 지양하는 게 나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일이 복잡하게 됐군요."
"…."
"유감입니다. 이런 식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어서요."
상대의 말에 권우철이 강준우를 대신해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우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 사람이 다짜고짜 공격을 해오더군요."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겠네요."
앞에 나선 사내는 이런 결과를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내보인 반응만 봐서는 상황을 쉽게 풀어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속단할 수는 없었다.
"다친 사람은 없습니까?"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네요."
"흐음."
권우철의 말에 페데리코는 내심 놀라워했다.
여기 있는 모두가 파블로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파블로를 쓰러뜨리고도 희생자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앞에 있는 사람들의 실력이 대단하다고 봐야 했다.
적어도 파블로를 상대할 수 있는, 그에 준하는 실력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게 분명했다.
실제로 파블로의 실력은 그저 뛰어나다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는 부족했다.
'파블로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다는 뜻인데.'
뒤늦게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작정 부딪쳤다면 희생을 피할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다행히 타티아나를 제때 막아낸 페데리코는 스스로의 판단에 안도하며 말을 이어갔다.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입니다."
"…."
"그럼 우리가 파블로의 시신을 수습해도 되겠습니까?"
페데리코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고, 뒤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신중하게 움직였다.
"지금까지 함께 해온 친구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시신은 수습해 주는 게 도리인 것 같아서요."
"…."
외국인으로 보이는 그의 말이 어색하게 들렸지만, 저들이라고 그런 문화가 없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권우철 혼자서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다.
그의 물음에 권우철은 뒤를 돌아봤다.
일행들의 의견을, 특히 강준우의 뜻을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권우철과 눈이 마주친 강준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죽은 시신을 굳이 잡아둘 이유가 없었다.
동의하는 강준우의 모습에 권우철은 뒤에 있는 일행들과 눈을 마주하며 다시 그들을 바라봤다.
"그렇게 하시죠."
"감사합니다."
권우철이 동의하고 뒤로 물러나자, 나타난 사람들이 급하게 시신을 수습했다.
타티아나라는 여자는 여전히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며 모두의 시선을 붙잡았고, 그녀를 막아섰던 페데리코는 상체의 절반이 날아간 파블로의 시신을 확인하며 침음을 삼켰다.
'파블로를 이렇게 죽일 수 있는 실력자라니.'
주화입마에 빠지면서 새로운 경지에 올랐던 파블로였다.
저 사람들 중에는 적어도 초절정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떤 공격이라도 흘러낼 수 있는 파블로가 이렇게 커다란 상처를 남기며 죽었다는 것 자체가 앞에 있는 자들의 힘을 증명하고 있었다.
"파, 파블로! 흐흑."
"…."
이곳에 와서 서로 의지하고 있었던 타티아나가 슬퍼하는 것은 당연했다.
페데리코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조심스럽게 위로했다.
"파블로는 되돌리지는… 못 했을 거야."
"…."
굳은 타티아나의 모습에 페데리코는 불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미 은밀하게 자신의 뜻을 전한 이후였다.
누구보다 파블로의 상태를 잘 알았던 그들인지라 앞에 있는 사람들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상체의 절반이 날아간 파블로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보이던 타티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은 결심을 한 듯한 그녀의 모습에 주변에 있던 일행이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타티아나!"
"놔. 모두… 비켜 줘."
"타티아나. 진정해! 조금만 흥분을 가라앉혀."
"저 모습을 보고… 참을 수 있겠어?"
눈물을 훔치며 내뱉는 그녀의 말에 페데리코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어떤 심정인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부딪친다면 모두에게 피해가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개의치 않으며 그들을 밀어냈다.
"여기 죽은 사람은… 내 소중한 연인이야. 아니, 내 남편이었어!"
"…."
"이 사람이 어떤 상태였는지 잘 알고 있지만, 이런 처참한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단호한 말투에 권우철이 곤란한 표정을 보였다.
그래도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지만, 결국에는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그는 침음을 삼켰다.
'후우. 이대로라면 저 사람들 모두와 싸워야 할 판인데.'
굳은 그의 표정에 페데리코는 타티아나를 일깨웠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이건 내 일이야. 너희들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거야."
"타티아나!"
"미안해. 페데리코. 이대로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 아니, 견딜 수 없어!"
"후우."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그녀의 말에 페데리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상치 않은 이들의 모습에 남아 있던 여섯 명이 긴장하며 말을 이어갔다.
"페데리코? 어쩌자는 거야? 설마, 이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지?"
"저들과 싸운다고 하더라도 그분이 이 상황을 용납하지는 않을 거야."
"…."
모두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말투였다.
페데리코 역시 그 말에 멈칫거리며 다시 타티아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타티아나가 먼저 권우철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일은 이 사람들과는 무관하다!"
"타티아나!"
"내 개인적인 일이다. 너희들 모두가 덤벼도 상관없다! 나는 혼자서 복수를 할 테니까."
통보를 하듯 외치며 기운을 끌어올리는 그녀의 모습에 권우철은 방패를 다잡았다.
저렇게 외쳤다고 하지만, 일행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상황에 그는 방패를 들어 올렸고, 방어를 준비하기 무섭게 타티아나라는 여자가 바닥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어느새 검을 뽑아든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권우철에게 맞닿았다.
"하압!"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시린 검광이 그의 방패를 두드렸다.
터엉.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다.
작지 않은 힘이었지만, 권우철은 어렵지 않게 그녀의 공격을 받아냈다.
터엉. 터엉.
곧 수많은 검광이 전방을 가득 채웠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행들이 권우철을 돕기 위해서 기운을 움직였다.
그 모습에 페데리코를 위시한 다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힘을 내보였다.
이대로 일행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나서기 전에 커다란 외침과 함께 두 사람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짓이냐!"
"멈추세요!"
한 명의 노인과 젊은 여자가 그들을 막았다.
혹시라도 싸움이 커질 것을 우려하며 다급히 사이로 끼어들었고, 그들의 모습에 페데리코와 일행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
뒤에서 움직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강준우는 이미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익숙한 얼굴의 한 사람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저 여자는?'
다이스케 역시 강준우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놀란 눈으로 나타난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 저 여자!"
"… 뭐야? 알고 있는 사람이야?"
"강 상! 저 여자. 그 여자 아니야?"
"준우도 알고 있는 거야?"
"따로 움직였을 때, 이상한 검을 사용하고, 금을 튕기던… 그 여자! 음공의 고수!"
"음공의 고수?"
일행들 역시 다이스케를 통해서 그때의 일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정은수를 향했고, 그 시선을 접한 정은수는 굳은 얼굴로 강준우를 바라봤다.
"… 오랜만이네요."
"매번 이런 식으로 만나는 것 같군."
"…."
"그때도 그쪽 일행이 우리를 공격했던 것 같은데?"
"일행이 아니었다고 말했을 텐데요?"
"지금도 아니라는 건가?"
"지금은…"
리단양과의 일을 언급하는 그의 말에 정은수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봐왔던 강준우라면 더 강한 힘을 키웠을 게 분명했다.
당시에도 요르문을 처리하면서 그 힘을 독식한 강준우는 그녀와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격차를 벌렸다.
'여기까지 살아있는 걸보면… 더 큰 힘을 키웠겠지?'
그 사실이 걱정이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불리하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사람과 힘을 합친다면 오히려 강준우는 물론이고,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도 몰아붙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다만,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의 성정으로 봐서 저들과 부딪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그래도 막약의 경우를 대비해야만 했다.
정은수는 가장 걸림돌이 되는 사람을 바라봤다.
'저놈이 문젠데.'
그녀에게는 사일런스를 사용하는 마법사가 가장 큰 문제였다.
다이스케는 그녀의 힘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싸늘한 시선을 느낀 다이스케는 움찔거렸지만, 앞에 있는 강준우를 떠올리며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당당한 그 시선에 정은수는 굳은 얼굴로 강준우를 바라봤다.
정은수와 가볍게 시선을 마주한 강준우는 그녀를 뒤로하고, 옆에 있는 노인을 향해 눈을 돌렸다.
'나와 비슷한 경지에 오른 사람인가?'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조금 전에 쓰러진 파블로라는 남자에 필적할 힘이 느껴졌다.
멀쩡해 보이는 노인의 상태에 강준우는 그를 주시했고, 노인 역시 조금 놀란 듯 크게 뜬 눈으로 강준우를 바라봤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