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처지들 (4)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수적으로 유리한 정은수를 위시한 사람들은 나름 자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중한 노인의 모습에 말을 아꼈다.
그런 상대의 반응을 보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람은 앞에 있는 노인인 게 분명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꼬인 것 같군요."
"…."
"이대로 일을 마무리짓고 싶은데. 어떤가요?"
"그건 저 여자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존대를 하는 노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지만, 이 상황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타티아나라는 여자뿐이었다.
물론, 이미 적의를 드러낸 여자를 두고 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고, 강준우는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서 고심했다.
"후우."
딱딱한 강준우의 말과 굳은 표정에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너무 늦게 도착한 것 같았다.
대강이나마 강준우가 가진 힘을 눈치챈 노인은 무거운 마음을 뒤로하고 타티아나를 향해 물었다.
"타티아나. 파블로의 복수를 할 생각이냐?"
"예. 저는 혼자서라도 복수를 할 생각입니다."
"… 좋다. 네 뜻을 존중하겠다."
"…."
너무나 시원스러운 대답에 오히려 대꾸를 한 그녀가 당황했다.
타티아나뿐만 아니라 뒤에 있던 사람들도 의아해했지만, 노인은 개의치 않으며 남은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타티아나를 도울 사람은 지금 나서라."
노인의 말에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노인은 정은수와 함께 뒤로 물러나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 두 사람은 이 싸움에 끼지 않겠다."
"황 사부님?"
"도울 사람만 나서라. 괜한 사족은 그저 시간만 끌 뿐이다!"
단호한 그의 말에 함께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황 사부라고 불린 노인은 개의치 않으며 강준우를 향해 말했다.
"이후 상황은 당신의 판단에 맡기지요."
"내 판단에 맡긴다니요?"
"이 일로 우리에게 적의를 가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
노인의 말에 오히려 강준우는 그의 눈을 바라봤다.
그로서는 이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여자를 버린다는 건가?'
이렇게 쉽게 일행을 내버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어쩌면 이들과의 싸움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여겼지만, 큰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타티이나라는 여자와 함께 움직인 자들이 어떻게 나올지가 관건이었다.
저들이 모두 싸운다면 그저 지켜보겠다던 노인도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한 수작일 지도 몰랐다.
황 사부라는 노인의 말을 들은 권우철은 강준우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이 일은 내가 맡는 게 좋을 것 같아."
"괜찮겠어?"
"저 사람은 내가 쓰러뜨렸으니, 당연히 내가 상대하는 게 맞겠지. 형은 뒤에서 만약을 대비하고 있어."
권우철은 강준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결정은 강준우의 몫이었다.
싸움이 커진다면 도움을 주면 될 일이었다.
그 역시도 노인과 정은수라는 여자가 어떻게 움직일지 불안했다.
그런 그와 다르게 강준우는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노인의 말에 앞으로 나선 그는 타티아나라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
"그 개인적인 복수는 나한테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놈!"
타티아나는 강준우의 말에 흥분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가만히 선 강준우의 몸에서 흘러나온 강력한 기운에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크흡. 이 압박감은…'
순식간에 주변을 잠식하는 그의 살기에 타티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느껴지는 압박감을 이겨내려고 노력했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뒤에 있던 페데리코가 앞으로 나서려 했다.
하지만 그때, 그의 귓속으로 딱딱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 뒤에 있는 모두를 죽이고 싶으면 나서라.
"…."
- 네가 나서면 다른 놈들도 목숨을 걸어야 할 거다.
- 하지만 이대로 타티아나를 잃으라는 말씀입니까?
- 타티아나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그랬다면 네놈이 더 신중했어야 했다. 처음부터 타티아나가 적의를 드러내지 않도록 막았어야지!
"…."
노인의 꾸중에 페데리코는 말을 잇지 못했다.
황 사부라고 불린 노인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이 일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이미 타티아나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멍청한 것. 여기까지 오면서 뭘 느낀 것인지. 쯧쯧.'
상대에게 강한 적의를 드러낸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어렵사리 이 상황을 넘긴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게 분명했다.
남편이라고 생각하는 정인을 죽인 원수였다.
그녀가 마음을 달리 먹고 복수를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은 아니었다.
이미 죽이겠다면서 강한 적의를 확인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상대방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불안을 계속 안고 움직이느니 없애는 게 나았다.
더군다나 상대는 불안을 제거할 정도로 충분함 힘을 가지고 있었다.
힘이 우선 시되는 이곳에서라면 굳이 그런 불안을 떠안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타티아나를 내어주고 저들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가지고 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겠지.'
노인도 이런 상황을 떠올리는 스스로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이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같이 희생되는 것보다 오히려 그 사람을 내어주고 새로운 조력자를 끌어들이는 게 나았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타티아나는 뒤에 있는 일행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도 나서지 마세요! 이건 오롯이 내 판단이니까."
"타티아나?"
"미안해요.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
강준우의 힘을 접하고 나서야, 노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타티아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타티아나의 모습에 페데리코는 힘겹게 그녀를 외면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리를 비켰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나았다.
냉정한 그들의 반응이 모두에게는 너무나 낯설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노인은 물론이고, 정은수와 다른 사람들이 힘을 합친다면 그들에게 큰 위협이 될 정도였다.
강준우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저들이 이런 식으로 꼬리를 내리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도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었다.
"하압!"
타티아나는 커다란 기합과 함께 검을 앞세우며 강준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모든 힘을 다하고 있었다.
이미 상대가 강자라는 사실을 인지한 만큼, 후회를 남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쉬이익.
빠르게 휘두르는 검격이 전방을 가득 채웠다.
수많은 검영이 강준우의 눈을 어지럽혔고,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결연한 각오에 강준우도 힘을 끌어 올렸다.
그런 그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 최대한 고통이 없었으면 고맙겠군요.
황 사부라고 불리는 노인의 전음이었다.
그 역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부탁을 했고, 근접한 타티아나를 확인한 강준우는 일양지를 쏘아내며 어지럽게 휘둘러지는 검을 쳐냈다.
채앵.
단 일격에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바람이 멈췄다.
그리고 검신을 통해 느껴지는 강한 충격에 타티아나는 이를 악물었다.
'크윽. 내 검법을 이렇게 간단하게?'
그녀가 익힌 검술 역시 뛰어난 상승의 절기였다.
어지럽게 휘둘러지는 검격이 바람을 나눌 정도로 엄청난 분검이었지만, 강력한 충격과 함께 검술이 깨졌다.
"난피풍검법(亂披風劍法)이 저렇게 쉽게?"
"그만큼 상대와의 실력 차가 크다는 뜻이겠지."
"그래도 아미의 절기인데!"
그 모습을 지켜본 정은수는 강준우의 힘에 경악했다.
어느 정도 간극은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지금 강준우의 모습은 도저히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 보였다.
아미파를 대표하는 난피풍검법.
자신하던 검법이 고작 지력에 막혔다는 사실에 타티아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광경에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흐읍. 이게 검으로?'
튕겨져 나간 지력이 검으로 변하면서 다시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빠르게 쏘아진 검격은 쉽게 반응을 하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질겁한 그녀는 한매보(寒梅步)를 펼치며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우선 거리를 벌리고, 공격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낯선 기운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크흑.'
기맥을 파고들며 내기의 흐름을 방해하는 낯선 기운.
천마군림보였다.
강준우는 되도록 자중하던 힘을 사용했고, 이질적인 힘에 타티아나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그 머뭇거림이 이어지는 공격을 피할 기회를 빼앗아갔다.
"하아압!"
그래도 포기할 수 없던 그녀는 남은 기운을 끌어 모으며 기검을 쳐냈다.
채앵.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받아냈지만, 그 순간 은밀하게 쏘아진 또 다른 지력이 그녀의 미간을 파고들었다.
[야생의 감각을 획득하였습니다. 가지고 있는 동일한 능력으로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야생의 감각이 10성으로 올라섰습니다.]
[상대가 가지고 있던 포인트를 강탈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승부는 순식간에 갈렸고,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노인은 뒤로 넘어가는 타티아나를 받아냈다.
힘없이 넘어지던 그녀의 몸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대로 쓰러진 파블로의 옆에 놓이는 그 모습에 남은 사람들도 놀라워했다.
'허공섭물이잖아? 저 여자를 들어 올릴 정도라면… 저 노인도 어마어마한 고수라는 건가?'
'저 인간이 성질을 보이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나?'
노인도 상당한 고수였다.
능숙하게 허공섭물을 펼치는 모습에 남은 사람들은 절로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타티아나를 바닥에 무사히 내려놓은 노인은 오히려 강준우에게 고마워했다.
"배려해 줘서 고맙군요."
"…."
"잠깐만 시간을 내어줄 수 있을까요? 우선 이 두 사람을 묻고… 대화를 좀 나눴으면 하는데요?"
"그렇게 하시죠."
노인은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따로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를 붙잡았고, 강준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이미 이곳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어쩌면 대화가 쉬울 지도 모르겠군.'
좋지 않은 상황에서 마주한 만큼 대화를 얼마나 진전시킬 수 있을 지가 관건이었다.
그전에 우선 두 사람을 묻는 게 먼저였다.
페데리코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는 것보다는 안 보는 게 나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황 노인은 강준우를 향해 양해를 구했다.
"잠깐 땅을 좀 파야겠으니,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
천천히 기운을 끌어 올리는 노인은 오해의 소지를 남기지 않으려는 듯이 신중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앞에 무엇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노인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이어지는 광경에 그는 한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맙군요."
"아니에요. 고맙기는요."
백선화가 정령을 움직였다.
굳이 힘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지만, 그녀 역시 노인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뒤로 물러난 다른 사람들이 이 모습을 봐서 좋을 건 없다고 여겼다.
곧장 두 사람을 감추는 노움의 도움에 수고를 던 노인은 다시 강준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혹시,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습니까?"
"…."
생각지도 못한 말에 모두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도 어렵게 알아낸 정보였지만, 노인은 마치 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노인의 말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을 접한 황 노인은 쓰게 웃었다.
'벌써 알고 있는 눈친가?'
생각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당연히 격한 반응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들의 반응은 마치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저 단순히 힘만 강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건가?'
직접적인 답은 없었지만, 그 질문과 함께 드러난 표정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색한 적막이 내려 앉았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살폈지만, 강준우가 적막을 깼다.
그는 어색하게 웃고 있는 노인을 향해 물었다.
"뭔가를 알고 있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