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찾아온 자들 (5)
이 와중에도 뭔가를 바라는 강준우의 말에 대장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남은 셋도 황당한 눈으로 강준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결국에는 그에게도 나쁘지 않을만한 제안이었지만, 또 다른 뭔가를 바란다는 게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가라니?"
"그 말에 따르면 나한테도 뭔가 떨어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어. 듣지 않았나? 우리를 적으로 돌린다면 그대들 세상에 좋을 게 없…"
"그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 마찬가지라니?"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도 못했다.
강준우의 태도는 너무나 뻔뻔하게 느껴졌다.
"제가 적으로 돌아선다면 그쪽도 좋을 게 없는 건 마찬가지잖습니까?"
"인간의 욕심이란!"
"그래서? 아무 것도 없이 그 뜻에 따르라는 겁니까? 뻔뻔하군요."
"누가 할 소릴!"
"드워프는 싸우겠다? 나도 피할 생각은 없…"
"뭘 원하는 거죠?"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던 구미호는 드워프와 언쟁을 벌이는 강준우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뭘 원하는 거죠?"
"뭘 줄 수 있는지 말하는 게 먼저 아닐까요?"
"… 그쪽이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떻게 돼도 아무 상관이 없나요?"
"어차피 내가 여기에서 죽는다면 끝 아닙니까? 가지도 못할 곳의 평화가 무슨 상관일까요? 상황을 보니까 그쪽도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 같지는 않은데."
말 속에 뼈가 있었다.
강준우의 말처럼 그들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길을 내어주는 게 전부였다.
어차피 그들이 개입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은 이들의 개입과 상관없이 움직일 게 분명했다.
강준우의 질문에 고심하던 구미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 여성은 그쪽 동료인 것 같은데. 맞나요?"
"…."
"저 여자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더군요. 저주 받은 기운에 온 몸이 잠식당했어요."
"그래서요?"
"저 여자를 치료할 방법을 알려주죠."
"치료?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저 여자가 가지고 있는 기운이 폭주하고 있어요. 그 상태가 계속 지속되고 있는 거죠. 이 상황이 계속 유지된다면 얼마 가지 못할 거예요."
유키코의 육체가 활성화 된 힘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이야 겨우 버티고 있었지만, 이 상황이 지속되면 결국 파탄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강준우도 어렴풋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도우면서 성취를 끌어 올리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조만간 기맥이 터져서 죽을 거예요."
"이 여자를 살릴 방법을 알려주겠다?"
"어렵지 않을 거예요. 보아하니 당신은… 이미 우리 일족의 힘을 가지고 있군요."
"일족의 힘? 그게 무슨 소리죠?"
처음 듣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구미호라는 존재는 만나본 적이 없었다.
만난 짐승이라고 해봐야 웨어 울프가 전부였다.
낯선 말에 의아해하며 묻자, 구미호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설마, 모르는 건가요? 냄새가 나요. 아주 옅은! 당신은 우리 일족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게 확실해요."
"그 일족의 힘이라는 게 뭐죠?"
"… 무공? 무공이라는 이름으로 전수되고 있는 게 있을 거예요."
무공이라는 말에 강준우는 가진 능력을 살폈다. 하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종잡을 수 없었다.
가진 힘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지만, 구미호는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그 힘을 더 강력하게 만들어주죠. 아마 제가 주는 도움으로 힘을 키운다면 앞에 있는 여성도 정상으로 돌아올 거예요. 오히려 서로에게 더 좋은 기회가 되겠죠."
"…."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유키코를 되돌리고 힘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이 남았다.
"그게 전부인 겁니까?"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좋습니다. 그쪽은 그것만으로 충분하겠군요. 그럼, 다른 분들은 뭘 줄 수 있죠?"
"미쳤군! 우리 모두에게 다 받을 생각이라고?"
"세상에 공짜는 없죠."
"이 탐욕스러운 놈이!"
"그쪽과 뜻을 달리하는 자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까지 포함하면 좋겠군요."
"처음부터 이걸 원했던 건가?"
"…."
강준우는 대장로의 물음에 말을 아꼈다.
이들과의 관계도 중요했지만, 앞으로 상대할 놈들이 더 큰 문제였다.
'칸스로프 같은 놈이 더 있다면… 지금 힘만으로는 부족해.'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힘을 키워야만 했다.
어찌 됐든 이곳에 떨어진 인간들은 다른 생명체를 상대하면서 힘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이들과 싸우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힘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
당연히 그 대안이 필요했고, 그것은 다른 자들을 잡으면서 채워야만 했다.
"어차피 라미아라는 놈과는 적대적이었지 않습니까?"
"그건…"
"이곳 역시 하나의 세상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아무리 뜻이 다르지만 그들의 위치를 알려서 넘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옆에 있던 미노타우로스는 반대 의사를 밝혔다.
다른 셋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요. 아무리 그래도 그것까지는 힘들 것 같군요."
"이대로라면 굳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제안을 했던 것은 그저 길을 내어주고 우리를 공격하지 않은 조건이네."
"그럼 타락한 존재들을 상대하는 건 괜찮다는 겁니까?"
"… 이미 밝히지 않았나?"
대장로의 지적에 일전의 상황을 곱씹던 강준우는 다시 앞에 있는 자들을 바라봤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대충 이들의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먼저 공격을 당한다면 죽여도 좋다라.'
그런 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녀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말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했지만, 여기 있는 자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게 달갑지는 않았다.
"좋습니다. 그 제안에 따르죠."
"잘 생각했네."
"저는 따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요. 다 같은 생각이 아니라서요."
"그대라도 우리들의 뜻에 응해줬다는 게 다행이겠지."
대장로의 말을 끝으로 구미호가 무언가를 건넸다.
고운 손바닥 위에 올려진 것은 푸른빛을 띠고 있는 구슬이었다.
"이게 뭡니까?"
"그 힘을 흡수하세요. 조금 전에 말했던 힘을 키울 수 있을 거예요."
작지 않은 기운을 가진 물건에 선뜻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흡수하라는 말이 내키지 않았지만, 유키코를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탈마경에 오르면서 만독불침으로 변한 상황이었다.
이게 독이든,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이든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있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그것을 흡수할 생각은 없었다.
강준우는 허공섭물을 이용해서 푸른 구슬을 손에 넣었다.
"귀한 물건이에요. 그 약속은 지키길 바라죠."
"저는 잘 따를 생각입니다. 다른 인간들은 모르겠지만."
"그들을 설득하는 건 우리들 몫이겠죠."
말을 끝낸 그들은 다시 물러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에 강준우는 뒤늦게 안도했다.
'저만한 자들도 꺼릴 정도로 상대하는 놈들이 대단하다는 건가?'
이렇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만 봐서는 만만한 놈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었지만, 이 모든 게 꿈은 아니었다.
가만히 손에 쥔 구슬을 확인한 강준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걸 흡수하라고?'
작지 않은 힘을 가진 귀물이었다.
구미호의 말처럼 중요한 물건인 것은 분명했지만, 그만큼 쉽게 흡수할 수가 없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옆에서 눈치를 살피는 유키코를 바라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선택의 여지가 없네."
"…."
낮게 뇌까린 그는 유키코의 혈을 점하며 그녀를 옆구리에 낀 채 움직였다.
우선 안전한 장소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힘을 흡수하고 유키코의 상태를 살피는 게 먼저였다.
★ ★ ★
아무 생명체도 없는 곳.
산맥을 넘은 그는 적당히 모습을 감출 수 있을만한 장소에 자리 잡은 채 손에 놓인 구슬을 바라봤다.
'이걸 복용하면 되는 건가?'
딱딱한 구슬을 삼킬 수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깐 혀를 대봤지만, 영약처럼 부드럽게 녹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구슬을 손에 쥐면서 천마흡기공을 펼쳤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다면 천마신공의 공능으로 이후의 상황을 대처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복용해서 흡수하는 거나, 천마흡기공으로 기운을 흡수하는 거나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파츠츠츠.
천마흡기공을 사용하기 무섭게 낯선 기운이 몰려들었다.
생각보다 흡수되는 기운이 많았다.
작지 않은 기운이 빠르게 그의 몸에 퍼져나갔고, 강준우는 조심스럽게 이어질 변화를 지켜봤다.
'흐음.'
이미 개방된 상단전으로 몰려드는 힘이 불안한 생각이 스쳤지만, 이미 기호지세였다.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었다.
어떻게 되든 이 힘을 모두 흡수하는 게 나으리라는 판단이었다.
파지직. 파삭.
모든 힘을 흡수하기 무섭게 손에 쥔 구슬이 깨져나갔다.
이미 신묘한 빛을 잃은 구슬은 작은 가루로 변하며 흩어졌고, 이어진 변화를 확인한 강준우의 눈이 커다래졌다.
[여우 구슬의 힘을 흡수하였습니다.]
[탈심색혼공(奪心色魂功)의 힘이 크게 상승합니다.]
[탈심색혼공(奪心色魂功)이 11성으로 올라섭니다.]
[조화심공과 음양신공의 영향으로 탈심색혼공의 성질이 변합니다.]
'탈심색혼공?'
구미호가 줬던 힘을 흡수하자 탈심색혼공의 성취가 가파르게 올랐다.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무공이 순식간에 11성으로 오르자 강준우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유키코의 상태를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이 이 무공을 사용하는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일족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게 이걸 말했던 건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무공의 성취가 높아진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유키코를 다시 되돌리는 방법이 너무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그로서는 그 자리에 앉아서 한참을 고민했다.
"흐음. 그냥 천마흡기공으로는 상태를 호전시킬 수 없는 건가?"
이미 실험을 해봤던 그인지라 그게 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정신이 없는 유키코에게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흐읍! 끄으으으."
"…."
하지만 그런 고민도 길지만은 않았다.
점혈을 해놓은 채로 옆에 뒀던 유키코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괴로워하며 신음을 흘리는 그녀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이마뿐만 아니라 몸 전체의 피부가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폭주하는 기운을 계속 감당하던 육체에 결국 무리가 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대로 터져버릴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강준우는 마음을 정했다.
'어쩔 수 없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곧바로 기운을 끌어 올리며 주변을 살폈다.
무방비가 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가 나타난다면 그만큼 위험해질 수밖에 없었다.
강준우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적을 대비해서 꼼꼼하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으으으으!"
주저하는 그는 여전히 괴로워하는 유키코의 모습에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아무래도 너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밖에 없는 것 같다."
"끄으으으."
괴로워하는 유키코의 모습에 그는 생소한 기운을 끌어 올렸다.
온 몸에 탈심색혼공의 힘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강준우의 손길이 과감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