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살아남은 자들
콰과과과과.
강력한 화염이 전방을 뒤덮었다.
거대한 입을 벌리며 앞에 있는 자들을 불태운 니드호그는 처참한 상황을 확인하며 얼굴을 구겼다.
그의 앞에는 까맣게 불탄 자들이 잔뜩 쓰러져 있었다.
불길이 사그라들자, 겨우 버티고 서 있던 자는 크게 비틀거리며 니드호그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눈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저히 범접할 수 없었던 로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끄윽. 많이 약해졌구려. 로드!"
[어리석구나. 베라티여.]
"나조차도 브레스를 견딜 수 있을 정도라니. 이것이 정녕 로드의 힘이오? 아니면 일부러 인정을 둔 것이오?"
[….]
"인간에게 패했다는 것이 정녕, 사실인 것이오?"
니드호그는 눈도 못 마주치던 놈의 물음에 말을 잇지 못했다.
베라티의 말마따나 지금의 그는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 상태였다.
가지고 있던 힘의 상당 부분이 사라졌다.
위력적인 공격은 여전했지만, 드래곤 하트가 줄어든 만큼 힘을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그마저도 모두에게는 위협적인 힘이었다.
하지만 그의 상태를 의심하는 자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따로 차원을 넘지 않았던 자들 중에 일부가 그를 급습한 것이다.
베라티는 스스로의 목숨을 담보로 그 힘을 시험했고, 니드호그의 상황을 확인하며 안타까워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무릎을 꿇어야 할 놈들이 반기를 들며 그를 위협했다.
결국, 그들은 모두 까만 재로 변하며 쓰러졌지만, 니드호그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클라우디오에게 모든 일을 일임한 것 자체가 이것 때문이었던가?"
마지막을 맞은 베라티의 실망스러운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니드호그는 그 말을 곱씹으며 침음을 흘렸다.
[흐음. 괜한 짓을 저질렀던가?]
차라리 그냥 죽었으면 이런 치욕도 없었을 게 분명했다.
뒤늦게 강준우와의 맹약을 후회했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에게 빼앗긴 2/3의 드래곤 하트.
다시 그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모든 게 부질없게 느껴졌다.
아무리 힘을 회복하고 차원을 넘는다고 하지만, 온전한 힘을 가지고 되돌아간 강준우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니드호그는 쓰러진 자들을 뒤로하고 다시 힘을 회복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 ★ ★
"등급을 나눈다고?"
"검기만 만들어낼 수 있어도 A등급은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거야."
"검기? 겨우 그 정도로?"
하찮아하는 그의 말에 김연희의 표정이 절로 구겨졌다.
그녀뿐만 아니라 권우철도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강준우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따로 기운을 뽑아내면 곧바로 검강이 일어나는 그에게는 오히려 검기를 뽑아내는 게 더 어렵게 느껴졌다.
"가진 놈이 할 수 있는 개소린가?"
"부족한 네가 내뱉는 투정이냐?"
"여전하네. 그 말투는."
"이게 싫으면 선빵이라도 날려 보시든가."
"미친…"
선빵이라는 말에 김연희는 말을 아꼈다.
선빵이랍시고 자해를 해놓고 상대방을 처리했던 강준우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다시 이곳에서 되살아난 그들이었지만, 당시의 기억은 가지고 있었다.
죽은 시기와 상관없이 그날의 기억을 모두 가진 채로 다시 차원을 넘어섰고, 그 기억을 토대로 힘을 키웠다.
당연히 높은 경지에 오르고, 많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권현수가 권우철에게 이전과 같은 태도를 취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권우철은 권현수보다 먼저 A등급에 올랐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희소성 때문에라도 더 빠르게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같이 했던 김연희는 물론이고, 군인이었던 임창현과도 연이 닿으면서 그들은 빠르게 성장했다.
몬스터라고 불리는 놈들을 나타나는 세상에서 힘이 곧 권력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권력의 상당한 부분을 손에 넣었다.
"임창현. 그 사람이랑 같이 움직이고 있다고?"
"차원을 넘는 놈들이 나타나서 난리를 피우니까 만나는 어렵지 않았어. 같이 드래곤을 상대했던 만큼 오히려 함께 움직이는 게 더 자연스러웠지. 그 사람 도움으로 너를 찾으려고 했으니까."
"그 사람도 A등급이야?"
"응. 우리들 팀장이야. 지금 따로 독립된 팀을 꾸리고 있어."
"다행이네. 다행히 살아 있어서."
그 역시도 임창현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했던 말을 잊을 수 없었다.
'나한테 먹힐 것을 두려워해서 일부러 다른 길을 택했다던…'
자신에게 힘을주고 죽었던 그가 여기에서 대우를 받는다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를 떠올린 강준우는 씁쓸해했다.
'내가 운이 좋았던 건가?'
그를 통해서 천마신공을 얻지 못했다면 여기에 있을 수 없었다.
천마신공을 손에 넣은 것부터가 천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겪었던 일들 대부분이 운이 좋았던 것 같았다.
강준우는 전체적으로 운이 좋아서 여기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쓰게 웃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감탄과 탄성에 상념을 떨쳐냈다.
"우와! 연예인이잖아?"
"백선화! 백선화야!"
"엄청 예뻐!"
그녀의 등장과 함께 레스토랑이 소란스러워졌다.
오랜만에 만난 강준우가 가장 원한 것은 제대로 된 음식이었다.
그동안 무한의 식량 주머니에서 나온 빵만으로 배를 채웠던 그에게 다양한 음식만큼 그리운 것은 없었다.
열심히 음식에만 집중하던 그는 크게 동요하는 기운을 확인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반가운 사람과 마주했다.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조금 낯선 모습이었다.
화려한 옷과 화사한 메이크업을 한 채로 나타난 사람은 바로 백선화였다.
"맞아. 너 연예인이었지?"
"강준우!"
그녀의 모습도 반가웠다.
강준우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반겼고, 백선화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갔다.
"흐윽."
백선화는 곧바로 그에게 안겨들었고, 강준우는 말없이 그녀를 토닥였다.
많은 팬을 거느린 여배우가 내보일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갑자기 강준우에게 안기는 그녀의 모습에 모두가 놀라워했다.
뒤에 있던 매니저가 깜짝 놀라며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어느새 뒤틀린 바닥이 그의 발을 붙잡았다.
노움이었다.
이 시간을 방해받지 않으려는 듯이 백선화는 노움을 불러내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가로막았다.
"너 뭐하는 거야?"
갑자기 펼치는 능력에 오히려 옆에 있는 권우철과 김연희가 당황했다. 하지만 지금 백선화에게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흐윽."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서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강준우는 말을 아꼈다.
한 곳으로 쏠린 모두의 시선이 부담이었다.
살면서 이런 시선을 받아본 적이 많지 않았다.
적대적인 자들 중에 일부를 처리하면서 살기 가득한 눈빛은 많았지만, 부러움과 질시 어린 시선은 처음이었다.
"괜찮겠어? 넌 연예인이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나저나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갠차나? 다친 곳은 업떠? 어우, 저 여우!"
"뭐라고?"
"그동안 내가 부를 때는 전화할 시간도 없다면서! 그동안 코빼기도 비추지도 않던 년이 이렇게 빨리 와?"
"그, 그거야… 준우가 걱정되니까."
"그 인간이 다칠 인간이냐?"
황당해하는 김연희의 말에 백선화는 얼굴을 붉혔다.
뒤늦게 자신에게 쏠려있는 시선을 확인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강준우를 끌어안은 팔을 풀었다.
그만큼 그의 모습이 반가웠지만, 뒤늦게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진정이 된 거냐?"
"그래."
"그럼, 나 이거 마저 먹어도 되냐?"
"다, 당연하지."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진정됐다.
나름 잘 나가는 백선화의 등장과 함께 그들은 자리를 옮겼고, 따로 방을 잡은 그들은 다시 회포를 풀었다.
실상은 김연희와 백선화의 수다가 이어졌지만, 강준우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는 많은 음식을 입에 집어넣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낀 권우철이 곤욕이었지만, 그는 모든 것을 감내하며 자리를 지켰다.
따로 불편한 기색을 내보인다고 해도 당분간은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걸신 들렸냐? 천천히 먹어! 누가 안 뺏어먹어!"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내, 내가 뭘?"
"뷔페를 거덜 낸 년이 누구더라?"
"그건 너도 마찬가지…"
쿠구구구.
언제 사이가 좋았냐는 듯이 다투기 시작하는 두 사람의 행동과 함께 살을 에는 듯한 살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순식간에 달라진 분위기에 김연희와 백선와의 눈이 커다래졌다.
"밥 좀 먹자."
"아, 알았어."
그들 역시 내로라하는 헌터들이었다.
김연희도 A급 헌터였고, 백선화도 B급에 오른 헌터였다.
물론, 지금은 헌터 일보다는 배우 일에 힘을 쏟고 있었지만, 그녀가 가진 힘도 작지 않았다.
하지만 짜증 섞인 강준우의 반응에 누구 토를 달 수 없었다.
김연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진 기운을 끌어올리며 저항을 해봤지만, 마주한 것은 가소롭다는 듯한 강준우의 비웃음이었다.
"우, 웃어?"
"왜? 선빵이라도 날리게?"
"말을 말아야지! 선배! 어떻게 좀 해봐."
"크흠."
권우철이라고 뾰족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강준우 본인이 기운을 풀기 전까지는 그저 버티는 게 최선이었다.
주변을 옥죄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그들은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여전한 강준우의 모습에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불안함이 씻기는 것 같았다.
조용해진 세 사람의 모습에 만족한 그는 다시 먹는 것에 집중했다.
끊임없이 들어가는 그의 위가 대단하게 느껴질 지경이었지만, 그 시간도 길지 않았다.
드르륵.
갑자기 문이 열렸다.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열린 문으로 향하자, 익숙한 얼굴이 놀란 눈으로 강준우를 바라봤다.
유키코와 다이스케였다.
"강 상?"
"흐윽. 준우!"
유키코 역시 백선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강준우에게 안겨왔고, 그는 다시 그녀의 응석을 받아줘야만 했다.
유키코에게는 처음 순결을 준 강준우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강준우 역시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그녀를 달래면서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쉽게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그녀를 겨우 진정시키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다이스케가 그에게 달려왔다.
그 역시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지만, 다가오던 다이스케의 목에 강한 압박이 전해졌다.
"크흡."
"무슨 짓이냐?"
숨이 턱 막혀오는 우악스러운 손길은 여전했다.
앞에 있는 인간은 그가 알고 있던 인간이 확실했지만, 더 강하게 옥죄는 손길에 다이스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뭐라는 거야?"
"손 좀 치워줘."
이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강준우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유키코가 유창한 한국말로 말을 이어갔다.
"너무 반가웠대. 손 좀 치워달래."
"뭐야? 유키코. 한국말 할 줄 알았어? 그동안 아무런 내색도 없었잖아?"
"배웠어. 3년 동안."
"배워? 왜?"
"그야… 준우를 만나려고!"
애틋한 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생각지도 못한 라이벌의 등장에 백선화는 위기의식을 느끼며 강준우 옆에 바짝 붙었지만, 유키코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이해할 수 있어."
"이해하다니? 뭘?"
"영웅은 삼사 첩도 거느릴 수 있다는 말."
"삼사 첩?"
"선화정도면… 첩으로도 부끄럽지 않아. 난 이해심이 넓은 여자거든."
황당한 소리에 모두는 말을 이을 수 없었지만, 유키코는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준우를 보러 전용기를 타고 바로 달려왔어!"
"전용기?"
"이젠 내가 힘이 돼 줄게. 준우, 하고 싶은 거 다 하도록."
명문가의 무남독녀라는 유키코였다.
그녀의 자신만만한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 말을 듣던 권우철은 뒤늦게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우리랑 같이 몬스터를 잡을래?"
"글쎄. 여기서도 그 짓을 계속 하라고?"
"그럼 어떡하려고? 따로 생각해 둔 거라도 있어?"
"글쎄. 세계정복이나 한 번 해 볼까?"
"…."
그의 말과 함께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세계정복이라는 터무니없는 말.
하지만 강준우가 그 말을 하자 느껴지는 무게가 달랐다.
갑자기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에 강준우는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농담이야."
"미친! 농담이 농담처럼 들려야 말이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그는 다시 먹는 것에 집중했다.
당분간은 그동안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하면서 소소한 행복을 찾을 생각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