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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4화 (4/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4화

제네비브가 다시 본론에 진입할 때 즈음, 에드워드는 과제를 마무리 지었다.

부끄러움 모르는 가슴 한구석은 제네비브가 제 과제를 한번 검토해 주길 바랐다. 그는 뻔뻔스러운 생각을 한 자신을 비난하며 입을 다물었다.

“책은 잘 썼습니다. 과제와 옷은 정말 죄송해요. 옷값은 알려 주시면 최대한 마련해 보겠습니다.”

가격을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무리 허물없이 대해도 명문가 아가씨다. 어떤 정신 나간 집안이 자식에게 싼 옷을 입히겠는가. 이걸 밀포드 씨에게 어떻게 전해야 하나. 에드워드는 인상을 썼다.

“음……. 알았어.”

제네비브가 손가락 사이로 펜을 굴렸다. 에드워드는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켰다.

“손수건.”

“……네?”

하지만 제네비브의 입에서 나온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내가 네 손수건 망가트렸잖아. 그거랑 교환한 거라고 생각해.”

제네비브가 다정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하지만 싸구려 원단으로 만든 손수건과 귀족 아가씨가 입는 옷의 가치가 같을 리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거절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심을 내세우기엔 지금의 그는 터무니없이 작았다.

“뭘 그런 거 갖고. 그럼, 과제는 다 한 거야?”

“네, 덕분에 잘 끝냈어요. 폐만 끼쳐서 죄송합니다.”

“신경 안 써도 된다니까. 그럼, 들어가 봐.”

“……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에드워드는 도망치듯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창피함, 무력함, 미안함. 여태 느낀 적 없는 감정이 그의 온몸을 지배했다.

머리가 복잡했다.

* * *

그 이후, 제네비브와 교류가 있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애초에 학년이 달랐기에 만나는 일은 식당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마주치더라도 대화를 나누는 일은 없다시피 했다.

“저기…….”

“…….”

왜냐하면 에드워드가 제네비브를 피했기 때문이다.

간혹 옆을 지나갈 때마다 폐를 끼치는 기분이었다. 인사를 받으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찰스가 보여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원체 정이 많은 사람인지 제네비브는 한동안 에드워드를 볼 때마다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가 대화를 원치 않다는 걸 눈치챈 이후로부턴 눈인사로 대신했다.

한 번은 뻣뻣하게 인사를 받아 주자, 제네비브는 기쁜 티를 최대한 숨기며(하지만 좋아한다는 게 눈에 보였다) 그 뒤로 마주칠 때마다 조용하고도 요란스럽게 인사를 했다.

그렇게 에드워드가 첫 인간관계에 익숙해진 지도 며칠이 된 시점이었다.

“에드워드 학생, 잠시만요.”

통치학 수업이 끝난 뒤, 오데인 교수가 강의실을 나가려는 에드워드를 불렀다.

강의가 끝난 뒤 교수에게 따로 호명되는 건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짐작되는 구석이 없었던 에드워드는 긴장한 기색을 애써 지우며 오데인 교수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진지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의 종이 더미를 뒤적이던 오데인 교수가 종이 묶음 하나를 꺼냈다. 익숙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에드워드의 과제였다.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수준이 떨어져서 교수님이 자신을 부른 건가, 하는 생각이 에드워드의 머리를 스쳤다.

“2학년이 아이흘러를, 그것도 <군주의 책임감>을 고른 건 드문 일이어서 흥미롭게 읽었답니다. 해석도 무척 좋더군요. 세 번째 문단의 시점이 유독 신선했어요.”

힐난을 각오한 게 무색할 정도로 오데인 교수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아이흘러를 좋아한다는 제네비브의 말이 사실이란 걸 증명하듯 그는 피드백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아쉬운 부분이 전혀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전반적으로 훌륭했습니다. 2학년에겐 만점을 안 주지만, 이건 예외로 두고 싶을 정도군요. 에드워드 학생, 이대로만 한다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드워드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내리며 평온한 얼굴을 꾸며 냈다.

마음이 벅차 당장 누구에게 이 소식을 공유하고 싶은데 마땅히 그럴 사람은 없었다.

뒤늦게나마 떠올린 인물이 있다면.

“……내가 미쳤지.”

제네비브였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날 이후 제네비브와 교류하지 못한 건 자신이었다. 어제 도서관에서 <군주의 책임감>이 제자리에 꽂혀 있는 걸로 보아, 그녀도 과제를 잘 마무리 지은 것 같았다.

책이 아니었다면 만날 일 없던 사람.

어쩌다가 과제를 같이하게 된 학교 선배.

그 정도 거리감을 유지하는 게 맞는 일이었다.

무료하게 반복되는 하루와 이따금 녹색 눈과 마주칠 때면 조용히 인사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주말이 되었다.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던 빗줄기는 이제 제법 가늘어졌다.

에드워드는 이른 시간에 일어나 몸에 밴 습관대로 교내를 한 바퀴 달렸다.

새벽의 세인트 존 칼리지는 평화로웠다. 가벼운 비가 머리를 간지럽혔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니 정신이 맑아졌다.

이후, 기숙사로 돌아온 에드워드는 머리를 가볍게 털어 냈다. 비를 맞아 몸이 차가워졌다. 에드워드는 작게 떨리는 몸을 이끌고 기숙사 주방으로 갔다.

기숙사 주방은 그야말로 과시용이었다. 시설은 훌륭했지만 이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주방에 다가갈수록 들려오는 소리는 뜻밖의 일이었다.

“…….”

심지어 주방을 이용하는 사람이 아는 사람인 건 더더욱 의외였다.

움직일 때마다 ‘나 피곤해요’라고 외치듯 제네비브가 비척대며 들어왔다. 그녀 또한 부엌에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잠옷에 숄을 대충 두른 채 코코아 가루를 덜어 내고 있었다.

여유롭게 목을 몇 번 굴리던 그녀는 예상치 못한 사람의 등장에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다 숄 끝자락이 주석 통과 부딪혀 코코아 가루가 주방에 요란스럽게 흩날렸다. 갈색 연기를 들이마시니 혀끝에서 초콜릿 맛이 났다.

“도와드릴게요.”

“아…… 고마워. 정리하는 동안 뚜껑 좀 닫아 줄래?”

제네비브가 주석 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벼운 부탁은 그에게 다소 충격으로 와닿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귀족 학생들은 당연하다는 듯 허드렛일을 에드워드에게 떠넘겼다. 노골적으로 청소 도구를 건네는 게 아니더라도, 하기 싫은 일이 있을 때면 은근한 눈빛을 보내곤 했다.

하여 저 나름대로 어지러워진 걸 치우겠다는 의미로 도움을 권한 건데, 에드워드가 한 일이라고는 제네비브가 바닥을 청소하는 걸 구경하며 주석 통 뚜껑을 닫는 일이었다.

“여기엔 어쩐 일이세요?”

“춥길래 코코아 좀 마시려고 했지……. 너는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저도 나가기 전에 커피 좀 마시려고요.”

“외출하게?”

“네, 안경 사려고요.”

“근데, 이 이른 시간에 뭐 하고 있었어?”

“조깅이요.”

“지금 비 오지 않아? 춥겠다…….”

제네비브가 에드워드의 촉촉한 머리카락을 걱정 어린 눈으로 보며 말했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다짐한 것처럼 스토브에 불을 켰다.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나 때문에 고생했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고생한 게 고작 뚜껑을 닫는 거라니.

에드워드는 고생에 대한 제네비브의 기준이 굉장히 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기준을 그녀에게 적용한다면 방금 제네비브는 흑마법의 고통을 이겨 낸 용사나 다름없었다.

“내가 커피 하나는 잘 타거든. 오웬한테 시달려서 배운 거라 맛은 괜찮을 거야.”

“잘 마실게요.”

에드워드는 제네비브가 건넨 머그잔을 받았다. 손에 닿은 온도는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게 딱 적당했다.

“주말 아침부터 고생하네. 조심히 다녀와.”

“……네.”

아직 커피에 입을 대지 않았음에도 몸이 따뜻해진 기분이었다.

“그럼, 나는 먼저 올라갈게. 커피 잘 마셔!”

이후, 제네비브는 자신이 만든 코코아를 들고 주방을 벗어났다.

‘……같이 마시자고 얘기해 볼걸.’

에드워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했다.

커피 맛은 그런대로 맛있고, 또 씁쓸했다.

* * *

마차를 타고 한 시간을 달려서야 시내가 보였다. 속도 마법이 걸려 있는 마차라면 20분 만에 도착했겠지만, 아카데미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마차는 평범한 속도로 달렸다.

에드워드는 마차에서 내려, 익숙한 길을 지나쳤다. 잦으면 달에 한 번, 적으면 석 달에 한 번씩 걷는 길이었다.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안경을 여러 개 준비해 놓는 에드워드의 철저함 덕분이었다.

[폐업]

하지만, 그를 반긴 건 안경점 입구에 붙어 있는 종이였다.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시내라 해도 도심과 비교하면 사는 사람이 적은 지역이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안경을 새로 맞춘들 일 년에 한 번이 일반적이었다. 에드워드만큼 안경을 자주 맞추는 사람은 없었다.

적자만 가득한 장사는 빠르게 접을수록 이득이었다. 경영학 수업을 들은 에드워드도 이 사실을 잘 알았다.

단골이니 그래도 남은 게 있으면 팔아 주지 않을까? 내심 희망을 품으며 가게 안을 바라보았지만, 폐업하고 시간이 꽤 흐른 건지 내부는 텅 비었다.

“벤자민? 그 양반, 3주 전에 떠났지!”

안경점 옆에 있는 골동품집 주인이 말했다.

에드워드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잘 세운 계획이 망가지는 것보다 불쾌한 일은 없었다.

아쉬운 대로 적당히 가까운 곳에서 안경점을 찾아야 했는데, 미처 다 알아보기도 전에 귀가 시간에 다다랐다.

“……밀포드 씨께 부탁해야 할까.”

가장 편한 선택지였지만, 편한 것과 별개로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

결국, 에드워드는 아무 소득 없이 기숙사로 돌아왔다.

“……조작 아니야?”

“조작이라니. 블랑카, 나의 결백을 의심하는 거야?”

학교로 돌아와 기숙사 휴게실을 지나던 찰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주로 공부하는 분위기인 본관 휴게실과 다르게 기숙사 휴게실은 주로 학생들이 노는 곳에 가까웠다. 그리고 에드워드는 휴게실을 이용한 적이 거의 없었다.

휴게실 안쪽을 바라보니 제네비브가 뿌듯한 표정으로 손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테이블에 카드를 늘어트린 걸로 보아 포커라도 한판 한 것 같았다. 승자는 제네비브였던 건지, 같이 게임을 한 사람들이 툴툴거리며 돈을 건넸다.

제네비브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돈을 셌다. 다 더해도 책값조차 안 나올 것 같은 푼돈이었지만, 제네비브의 표정은 마치 복권에라도 당첨된 사람 같았다.

제네비브는 꼬깃꼬깃한 지폐 서너 장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감상했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휴게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에드워드는 휴게실 입구를 벗어나지 못했다.

‘안경은?’

에드워드를 발견한 제네비브는 인사하는 대신, 아직도 바뀌지 않은 안경을 보며 무슨 일이냐고 벙끗거렸다.

‘못 샀어요.’

에드워드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휴게실을 지나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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