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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6화 (6/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6화

“아빠, 이건 뭐예요?”

제네비브 달링이 이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된 건 열 살이 된 무렵이었다.

“우리 공주님, 아빠가 다녔던 칼리지의 졸업 앨범이란다.”

달링 후작은 딸아이의 부드러운 금발을 쓰다듬었다.

“브레들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군. 그때보단 머리가 조금 벗겨지긴 했지만. 이 사람은 말이다…….”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앨범 속 동창들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아.”

열심히 설명하는 달링 후작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제네비브는 그가 한 말을 하나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이 온통 표지에 새겨진 글자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게 뭐야.’

화려한 금박이 박힌 앨범 표지를 본 제네비브는 어느새 기억 속에 잊힌 제목 하나를 떠올렸다.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일어난 일>

그녀가 첫 번째 삶에서 읽은 책이었다.

출판사는 로맨스 판타지로 분류했지만, 사실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일어난 일>은 장르를 콕 짚기 어려웠다.

‘로맨스 판타지’의 공식에 따라 로맨스도 있었고, 배경은 제국이었으며, 황족도 존재했지만…… 반대로 하드코어 한 BL 요소는 물론 대량 학살도 일어났다.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일어난 일>은 여자 주인공이 세인트 존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며 시작된다.

여주는 귀족 출신 장학생인데, 이 점이 그녀를 소외되게 만들었다. 귀족이 장학생으로 선정되는 건 하나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가문이 빈곤하여 학비를 낼 돈이 없다는 뜻이다. 비록 한 학기 학비가 귀족들의 여름 별장과 맞먹는다고 하더라도 풍요로운 시대인 만큼, 귀족에게 그 정도 돈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러다 보니 여주는 동급생들에게 매일 무시를 받았고, 질 나쁜 범죄의 피해자가 될 뻔했다.

그런 여주를 도운 건 황태자였다.

황태자는 과거에 여주와 비슷한 처지였다고 서너 줄쯤 서술되었다. 짧게 서술된 내용에 따르면 황제와 황후궁의 하녀 사이에서 태어났고, 그 또한 책봉되기 전까지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동질감에서 시작된 동정이 사랑으로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남주의 상징인 흑발로 태어나지 못한 탓일까? 황태자는 이후 등장하는 검은 머리 남주를 이기지 못했다.

여주가 황태자의 마음을 거절하고 남주와 사귈 때 즈음, 칼리지에서 학생들이 하나둘 죽어 갔다. 익사, 추락사, 질식사, 과다 출혈……. 사인(死因)은 셀 수 없이 다양했다.

그러던 찰나, 다섯 번째 희생자가 될 뻔한 남학생이 황태자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황태자는 지위 덕분에 잡히지 않았지만, 자신의 살인 욕구를 잠재울 수 있는 사람은 여주밖에 없다며 그녀를 정신적으로 괴롭혔다.

여주는 그런 황태자를 ‘다정했던 예전처럼’ 돌려놓기 위해 그를 사랑하는 척했지만, 황태자는 또 ‘네게서 진심이 안 느껴진다’라며 완전히 돌아 버렸다.

황태자는 결국 학교를 없애기 위해 수면향으로 사람들을 재운 뒤 건물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수면향에 내성이 있던 여주는 잠들지 않았다.

여주는 제국의 안위를 위해서 황태자가 없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여 여주는 황태자를 죽인 뒤, 남주만을 깨우고 화재 현장을 벗어났다.

종합하면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일어난 일>은 로맨스가 1퍼센트 첨가된 19금 피폐 소설이었다. ‘엔딩에서 여주와 남주가 결혼했으니 어쨌든 로맨스’라는 작가의 뚝심이 돋보였던 작품이었다.

‘……그런데, 제네비브 달링이라는 사람이 있었던가?’

중요한 질문이었지만, 제네비브는 답하지 못했다.

대다수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 그렇듯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비슷하게 긴 덕분에 잘 기억이 안 났다. 게다가 흑막인 황태자는 이름이 아닌 성씨로 불리고 서술되었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이라 보니까 제네비브가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이름이 아닌, 주인공들의 외모였다.

여주는 분홍색 머리카락에 금색 눈동자, 남주는 흑발에 보랏빛 눈동자. 이마저도 표지가 아니었더라면 까먹었을 정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변 사람들 (정확히는 주연이 아닌 사람들) 의 머리카락과 눈 색이 평범하단 점이다.

제네비브는 자신이 소설 속 등장인물을 만난다면 피하기 쉬울 거라 여겼다.

‘독버섯 색이 화려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제네비브는 자신이 매우 평범한 금발과 지극히 현실적인 녹색 눈을 가졌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또, ‘달링(Darling)’처럼 친숙한 단어라면 흐릿하긴 해도 기억에 남긴 했을 테다. 그런 성씨가 등장한 적 없다는 걸 몇 번이고 확인한 제네비브는 최소한 자신이 단명하는 조연이나 패악질하다 죽어 버리는 악역이 아님을 확신했다.

애초에 제네비브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아본리아 제국이 아닌, 카르디르 왕국에서 태어났다.

‘접점도 없고, 원작에서 등장도 안 하는 모브 엑스트라에 빙의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네비브는 신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게다가, 다니는 학교도 달라!’

세인트 존 칼리지는 명문으로 유명했지만, 달링 부부는 외동딸을 외국으로 보내는 걸 꺼렸다.

해서 제네비브는 카르디르 남동부 지역에 있는 포가츠 아카데미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제네비브가 원작에 개입할 확률은 0에 수렴했다.

그리하여 제네비브는 마음 놓고 6년이란 세월을 걱정 없이 보냈다.

이후 그녀는 귀족 영애로서 부족함 없이 살았고, 어느덧 포가츠 아카데미에 입학하기까지 석 달 남짓 남았을 때였다.

<횔덜린 교수의 양심 고백

“포가츠 아카데미에서 성적 조작을 안 하는 학생은 없다. 작년에 졸업한 리처드 왕세자는…….”>

포가츠 아카데미가 문을 닫았다.

무려 30여 년간 포가츠 아카데미에 몸담은 횔덜린 교수의 양심 고백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횔덜린 교수는 포가츠 아카데미가 조직적으로 귀족들에게 뇌물을 받아 학생들의 점수를 조작했고, 이는 점점 체계적으로 변해 성적 조작과 더불어 귀족들이 탈세를 일삼는 범죄 소굴이 되었다고 밝혔다.

양심 고백의 여파는 대단히 컸다. 우선, 귀족 절반 이상이 작위를 박탈당했다.

카르디르 왕국에서 무학력자는 가문을 물려받지 못했다. 학력이 없는 이가 가문을 물려받고 싶다면 학력을 취득한 사람과 결혼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또한, 카르디르 왕국은 타국의 학력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특정 학교를 제외한 곳에서 졸업한 이들이 학력을 인정받고 싶으면 국가시험을 봐야 했는데, 일 년에 합격자가 열 명도 안 될 정도로 끔찍한 난도를 자랑했다.

그렇기에 카르디르 왕국의 귀족들이 쉽게 학력을 얻고자 포가츠 아카데미에 뇌물을 줬다는 게 교수의 이야기였다.

이에 노한 카르디르 국왕은 본인이 직접 나서서 부정부패를 뿌리 뽑았다.

그간 카르디르 국왕은 본인의 모교인 포가츠 아카데미를 대륙의 명문 칼리지 모임, ‘파인트리 서클’에 입성시키려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는데 가입되기 직전에 이러한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수십 년간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제네비브는 또래보다 영특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국가시험은 악마도 울고 갈 수준이었다. 기출 문제를 몇 번 푼 제네비브는 학교 졸업장의 필요성을 느꼈다.

제네비브의 꿈은 간단했다.

달링 후작이 되어 가문의 재산으로 풍요롭게 먹고사는 것. 그 꿈을 위해 온전하게 가문을 물려받기 위해선 학력 취득이 첫 번째 관문이었다.

카르디르 왕국이 인정하는 외국 학력은 ‘세인트 존 칼리지’와 ‘마이언 아카데미’ 두 곳이었다. 파인트리 서클의 양대 산맥인 만큼, 이미 꽉 찬 입학 명단에 들어가는 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제네비브가 들어가고 싶은 학교는 당연히 마이언 아카데미였다. 원작과 부딪힐 위험이 있는 세인트 존 칼리지와 비교하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후, 달링 가문의 모든 인력은 일주일 동안 제네비브의 지원서와 추천서를 작성하는 데 열과 성을 쏟았다.

하지만 마이언 아카데미는 제네비브의 입학을 거절했다. 그리고 마이언 아카데미에서의 불합격은 세인트 존 칼리지가 주는 거절이나 다름없었다.

“제네비브. 정 불안하다면 약혼을 하는 게 어떻겠니? 우드빌 가문의 차남이 너와 나이도 같고, 인물도 괜찮더구나.”

그 무렵, 달링 후작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가문 중 가장 조건이 좋은 남자를 골라 약혼을 제안했다. 가문을 물려받고 싶었던 제네비브는 부친의 제안을 승낙했고, 약혼식은 그해 여름에 거행되었다.

하지만, 약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제네비브가 세인트 존 칼리지에 입학하게 되어 두 달 만에 파혼했기 때문이다.

* * *

집행 당일의 사형수가 이런 기분일까?

세인트 존 칼리지에 가까워질수록 제네비브는 속이 울렁거렸다.

활짝 열린 게이트 안으로 마차가 들어서자 마부는 자욱하게 깔린 안개 때문에 속도를 줄여야 했다. 짙은 안개 너머로 간신히 보이는 고성은 세월의 흐름을 고고하게 담아냈다.

‘여기구나. 훗날 그 참극이 벌어지는 곳이…….’

마차에서 내린 제네비브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건물을 눈에 담기 무섭게 이젠 기억에서조차 희미한 세인트 존 칼리지의 교정 묘사가 저절로 떠올랐다.

“……호호. 학교에 전통미가 넘치는구나.”

달링 후작부인은 남편이 졸업한 학교를 에둘러 포장했다.

그녀의 말대로 학교는 전통이 넘쳐흘렀다. 수 세기 전에 지은 각진 고딕풍 건물은 보는 이의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잿빛 분위기는 학교 입학식이라기보단 장례식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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