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7화
“레베카. 여기에 들어오려고 얼마를 썼는지 알잖소.”
달링 후작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하지만 아서, 여기는 너무 칙칙해요. 오, 로스 가문이 그딴 짓만 안 했더라도……. 불필요한 지출이었어요. 제네비브는 그런 거 없이도 합격했을 거라고요.”
“레베카.”
두 사람은 딸이 이 이야기를 듣지 않길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제네비브는 두 사람의 대화를 쏙쏙 알아들었다.
포가츠 아카데미가 폐교하며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성적 조작과 관련 없는 학생들이었다. 포가츠 아카데미 재학생들과 태어나자마자 입학 명부에 이름을 올린 예비 신입생들은 다닐 학교를 미친 듯이 찾았다.
그리고 달링 부부는 하나뿐인 딸아이를 세인트 존 칼리지에 보내기 위해, 소유한 다이아몬드 광산의 일 년치 수입을 이곳에 기부했다.
‘흔히들 말하는 기부 입학이지.’
카르디르 왕국 출신이 대부분 포가츠 아카데미에 다닐 예정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는 이상, 되도록 얌전하게 다녀야 했다.
‘제발. 무사히 졸업하고, 등장인물들과 엮이지 않고 가문 물려받게 해 주세요! 제발!’
제네비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신에게 기도했다.
세인트 존 칼리지에 입학한 후, 제네비브는 오웬 블라이스와 그의 친구들과 어울렸다.
오웬 블라이스는 외숙의 아들이었다.
제네비브는 아본리아 제국 출신이 아닌 덕분에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그나마 제약이(학생들이 형성하는 무리를 유심히 살펴보면 가문의 파벌에 따라 어울렸다) 없었다.
고루고루 친하게 지내서 제네비브는 발이 넓은 편이었다. 입학하자마자 등장인물을 찾기 위해 막무가내로 말을 걸어 댄 덕분이었다.
하지만 특이한 머리 색이나 눈 색을 가진 사람은 안 보였다. 검은 머리, 금색 머리, 갈색 머리. 이따금 보이는 붉은 머리가 가장 특이한 축에 속했다.
시간이 지나며 근심을 뒤로한 제네비브는 1학년을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2학년이 되었을 때,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심정으로 다시금 주인공들을 찾아봤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안을 떨치지 못한 제네비브는 일주일 동안 1학년을 쥐잡듯 샅샅이 살폈다. 그럼에도 등장인물로 추정되는 인물은 없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3학년이 된 제네비브는 늘 그랬던 것처럼 일주일 동안 주인공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분홍 머리 여학생과 검은 머리에 보라색 눈을 가진 남학생은 아무리 수소문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가능성은 하나였다.
‘내가 원작이 시작되는 시점보다 일찍 빙의했나 봐!’
그제야 제네비브는 소설 전개와 등장인물들을 피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대신 어떤 과제부터 손봐야 하나, 평범한 학생으로서 현실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이제 제네비브는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 모브 엑스트라에 빙의한 사람답게 완전히 타인의 시선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았다. 원작이 19금 피폐 로판 소설이든 뭐든, 제 삶이 조용하고 평범하면 됐다.
먼 훗날 달링 후작이 되고, 신문에서 <불타 버린 세인트 존 칼리지…… 파인트리 서클은 이제 어떻게 되나?> 따위의 헤드라인을 보는 것으로 소설이 끝났음을 깨닫는 게 그녀가 그리는 이상적인 미래였다.
그렇게 제네비브는 착실하게 학교에 다녔다. 꾸준한 성적 관리는 그녀를 학년 차석으로 만들어 줬고, 틈틈이 하는 클럽 활동은 학교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덧.
3학년 마지막 학기가 되었다.
* * *
세인트 존 칼리지의 월요일 다이닝 홀은 다른 때보다 조용했다. 한 주의 시작을 따분한 미사로부터 활기를 빼앗겼기 때문에 어린 학생들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미사 내내 졸음을 참았던 제네비브는 하품과 함께 과제를 검토했다. 얼마나 빠져들었는지, 그녀는 자신이 포크로 수프를 떠먹고 있다는 사실을 다섯 입에서야 깨달았다.
과제를 완벽하게 작성했다는 사실에 작은 성취감을 느끼고서야 제네비브는 내내 붙잡았던 과제를 내려놓았다.
“오웬. 너, 책 다 썼어?”
제네비브가 대각선에 앉은 오웬에게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책?”
“<군주의 책임감>. 네가 다 보면 내가 쓰기로 했잖아.”
“응?”
느릿느릿하게 빵을 뜯던 오웬이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2주 전에 네가 가져간 책 말이야.”
“…….”
까맣게 잊은 건지 오웬이 설명을 바란다는 눈으로 제네비브를 멍청하게 쳐다봤다. 보아하니 과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까먹은 것 같았다.
“헤더스 교수님 행정학 과제!”
“아~!”
그제야 기억이 난 듯 오웬이 작게 외쳤다.
“아직 다 안 썼는데……. 그냥 내일 주면—.”
“그 말을 저번 주에도 한 건 알아?”
“아, 알았어. 그럼 네가 갖고 있어.”
오웬은 딱딱해진 제네비브의 목소리를 듣고는 급히 말을 바꿨다.
“가방 어딘가에 있을 거야. 보자…… 책이…… 어! 여기에 있다.”
바닥에 내팽개쳐 둔 가방을 뒤적거리던 오웬이 묵직한 책 한 권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쿵!
아니, 던졌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책이 떨어지자 테이블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그 여파로 테이블 위의 접시와 잔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이는 작은 소동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웬의 옆에서 졸던 블랑카가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놀라서 일어난 바람에 무릎을 테이블에 찧었다. 테이블은 더 세게 흔들렸고, 결국 잔이 엎어졌다.
“으악!”
제네비브는 짧게 비명을 질렀다. <군주의 책임감>을 구해 내는 덴 성공했지만, 간발의 차로 과제는 물에 축축하게 젖었다.
“아야……. 내 무릎…….”
맞은편, 블랑카가 내는 앓는 소리를 들으며 제네비브는 일주일간 공들인 과제가 공중 분해되는 참사를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내…… 내 과제가…….”
제네비브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잉크가 번져 가는 과제를 봤다. 눅눅해진 종이는 과제보단 이제 행주에 가까웠다.
“맙소사! 진저, 정말 미안해. 무슨 과제야?”
블랑카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무릎을 다친 고통 때문에 운 거였다) 제네비브를 애칭으로 부르며 사과했다.
“브라이언 교수님 과제……. 오늘 1교시인데…….”
‘브라이언 교수’는 많은 걸 함축했다.
그의 수업은 유익했지만, 문제가 있다면 그가 앞뒤가 꽉 막힌 원칙 주의자라는 점이었다. 지각한 날은 수업을 들을 수 없었고, 수업 중 과제를 쓰는 일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식사 시간 얼마나 남았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제네비브가 물었다.
“20분.”
제임스가 대답했다.
‘가방 안에 넣을걸!’
제네비브는 해 봤자 소용없는 후회를 했다.
10페이지 가까이 되는 분량을 20분 안에 쓴다는 건 불가능했다. 다른 교사였다면 조금 늦게 제출하는 걸로 타협할 수 있지만, 브라이언 교수는 변명 따윈 용납하지 않았다.
“제임스, 브라이언 교수님 지각 제출은 최고점이 뭐였지? A-?”
“A-면 소원이 없겠다……. B야.”
“……B라고?”
제네비브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녀는 남는 시간 동안 뭘 어떻게 해야 브라이언 교수를 설득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하지만, 제네비브는 제 상상 속에서도 브라이언 교수를 이기지 못했다.
교실 안으로 들어가며 교수의 책상 위에 과제를 제출하는 친구들이 오늘만큼 부러운 적이 없었다. 과제의 질이 어떻든 시간만큼은 칼 같이 지키던 제네비브는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제네비브는 수업이 끝나고 브라이언 교수에게 다가갔다. 때마침 그는 과제 무더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 달링 학생. 수업에 관련하여 질문이 있나요?”
군데군데 머리가 센 브라이언 교수가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은 어려운 부분이 없습니다. 근데, 제가 이번 과제가…….”
제네비브는 천천히 본론을 꺼냈다. 단 한 번도 과제를 늦게 제출한 적이 없었기에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했다.
“……해서, 과제를 내일 제출해도 괜찮을까요?”
“사정은 안타깝지만…… 늦은 제출은 감점 사유입니다. 아시다시피 지각한 학생에게 제가 줄 수 있는 최고 성적은 B예요.”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가슴이 아팠다. 제네비브는 불합리하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다.
‘오늘 왜 이렇게 일진이 안 좋지?’
한 주의 시작이 이토록 정신이 없었던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제네비브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함을 애써 떨쳐 내며 강의실을 나갔다.
* * *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 빨리 과제 해야지.”
“브라이언 교수님도 너무하시다니까. 솔직히 한 번 정도는 받아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래도 진저, 아침 일은 정말 미안해. 다음에 경제학 과제라도 도와줄게.”
“아니야. 오웬이 약속한 대로 저번 주에 책만 줬으면 이런 일도 없었어.”
제네비브는 원망을 조금 담아 오웬을 향해 말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소원이라도 들어줄까?”
“됐어. C 하나 받는다고 망하는 것도 아닌데. 지금 과제나 잘해야지.”
제네비브는 해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너희 신문 일 해야 하지 않아? 또 마감일에 밤새우겠어.”
“<더 칼리지>에 너만 있다면 마감 걱정은 없을 텐데. 진저, 정말 가입할 생각 없어?”
블랑카가 그녀만을 위해 공석을 남겨 뒀다며 <더 칼리지> 가입을 권유했다.
“없어. 선배들이 일해야지. 빨리 가.”
가볍게 두 사람을 보낸 제네비브는 곧바로 학생 휴게실로 갔다.
어느새 해가 거뭇거뭇 지고 있었다. 들어오는 햇빛을 피하고자 제네비브는 휴게실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책장 뒤의 그늘진 테이블은 제네비브가 애용하는 자리였다.
오웬에게 받은 <군주의 책임감>을 옆에 둔 채 제네비브는 과제를 시작했다.
가장 급한 정치 철학 과제부터 끝낼 생각이었다.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 동안 어느 정도 복구했으므로, 이제 정갈하게 옮겨 적을 일만 남았다.
‘브라이언 교수님……. 저한테 왜 이러시나요.’
제네비브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단순하고도 끝없는 노동을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선배.”
언제부터 있었는지, 책상 앞에 웬 남학생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