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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10화 (10/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0화

기숙사 휴게실은 학생들로 가득했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저들끼리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 조용히 책을 읽거나 채커 또는 스크래블 따위의 정적이 활동을 즐겼지만, 가장 즐겨 하는 건 단연 카드 게임이었다.

그중에서도 인기가 많은 건 제네비브의 테이블이었다.

트럼프라면 평생 블랙잭이나 포커처럼 머리 쓰는 게임이나 정신 소모만 되는 카드 탑 쌓기를 하던 이곳에서 제네비브가 가져온 게임은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더욱이 소액의 판돈이 오고 갔기에 학생들이 ‘어른의 세계’를 맛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능숙하게 카드를 섞는 제네비브의 모습은 세인트 존 칼리지 학생들에게 ‘카르디르 왕국 사람들은 카드 게임을 잘한다’라는 편견을 심어 주기 충분했다.

“A, 8, 5.”

“이게 진짜 정신이 나갔나 봐. 저리 가.”

“야……!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제네비브가 쥔 패를 소리 내 읊은 오웬은 곧바로 퇴장당했다.

“오웬, 안타깝구나.”

블랑카는 상큼한 미소를 지어 주며 그를 밀어냈다. 오웬은 제 뒤로 순서를 기다리고자 줄을 선 서너 명을 바라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제네비브, 난 이러다가 네가 도박에 중독될까 두려워.”

오웬은 제네비브의 드높은 도덕적 기준을 생각하면 그녀가 도박 중독자가 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 말했다.

“4루오르로 잘도 중독되겠어.”

“그래, 제네비브는 1루오르 이상 못 걸게 하잖아. 진저, 우리 이번엔 2루오르로…….”

블랑카가 테이블에 1루오르를 더 올리며 제네비브를 향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욱.”

“호호, 우리 오웬이 드디어 미쳤구나.”

블랑카는 배배 꼬던 몸을 펴고는 조신하게 웃으며 오웬의 팔을 꼬집었다. 토하는 시늉을 하던 소리는 곧 아픈 신음으로 바뀌었다.

“판돈 올리는 건 안 돼.”

“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블랑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실제로 판돈을 올리리란 기대를 한 건 아니었는지, 제네비브를 더 설득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와, 말도 안 돼. 조작 아니야?”

“조작이라니. 블랑카, 나의 결백을 의심하는 거야?”

제네비브는 친구들이 건네는 돈을 받으며 억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확실히 판돈이 오가니까 집중하기 쉬웠다. 본인은 모르지만, 제네비브는 직시하기 싫은 문제들을 외면하고 싶을 때 가벼운 내기를 즐겼다. 그때만큼은 문제에 대해 생각을 안 해도 되니까.

그렇게 승리를 만끽하며 고개를 든 찰나, ‘외면하고 싶은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새 안경을 사러 간다고 한 말이 무색하게 에드워드는 아침과 똑같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안경은?’

‘못 샀어요.’

그의 담백한 대답은 그녀의 마음을 되레 무겁게 했다. 제네비브는 왠지 모르게 그게 제 책임처럼 느껴졌다.

* * *

“달링 양. 실망, 실망, 또 실망했습니다.”

교리대로 신전에선 화를 낼 수 없었기에 톰슨은 신전을 빠져나와서야 성을 내기 시작했다.

제네비브는 화내는 톰슨을 구경했다. 친구들과 학비 날강도 직원을 골랐을 때 만장일치로 선정된 사람다웠다.

왜 있는지 모를 신전 사람.

세인트 존 칼리지는 그를 애써 신전 관리인으로 포장해 줬지만, 신전 관리를 한다기엔 이미 사제들이 그 일을 도맡고 있었다. 대체 신전 뒷방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사무실에 비서까지 있었다.

제네비브는 속으로 열심히 씹는 것과 다르게 표정만큼은 반성하는 척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눈에는 미안함을 담아 톰슨을 바라보았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기까지 했다.

“감히 신전에서 거짓말을 하다니! 이시스 여신님이 두렵지도 않은가요!”

톰슨의 이마에 핏대가 불긋 솟아났다. 그가 광신도에 가깝다는 걸 아는 제네비브는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각오하긴 했다.

“정말 실망했습니다. 신 앞에서 겸손해지지는 못할망정 신전에서 거짓말을 하다니. 쯔쯧, 반성도 제대로 안 하고……. 이시스 여신님께서 달링 양을 용서하지 않겠다 하셔도 이해합니다! 이런 신자라니!”

하지만 똑같은 톤으로 똑같은 문장을 읊는 모습을 스무 번 정도 보고 있으니 지루해졌다.

못마땅함이 2할 정도 섞인 제네비브의 표정을 기민하게 알아챈 톰슨이 다시 한번 ‘실망했습니다’를 서너 번 중얼거렸다.

“달링 양은 아직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나 봅니다. 이렇게는 안 되겠어요. 달링 양은 구제 불능입니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수업이 끝나면 제 사무실로 오세요. 성전 필사로 마음의 악과— 오만함을! 물리쳐야 합니다.”

의식할 새도 없이 턱이 떠억 벌어졌다.

이미 톰슨의 머릿속에서 자신은 회개가 시급한 악독한 학생이었다. 제네비브는 왜 오웬이 제 어깨를 두들겨 줬는지 그제야 이해가 됐다.

“왜 안 가는 거죠? 오늘 달링 양이 얼마나 최악이었는지를 더 듣고 싶으신가요?”

똑같은 말을 또 듣는 건 사양이다.

“……안경은 주셔야죠.”

제네비브는 톰슨이 책상 위에 올려 둔 안경을 눈짓했다.

“제가 눈이 안 좋아서요.”

그러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했다.

벙찐 그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제네비브는 안경을 들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아침의 선택 하나로 하루 일정은 완전히 꼬여 버렸다.

“제네비브 학생. 사정은 알겠지만, 수업에 늦으면 수업을 들을 수 없습니다.”

원칙을 사랑하는 브라이언 교수는 제네비브를 문전 박대했다.

꼬르륵—.

심지어 아침도 못 먹고 나온 터라 배가 울렸다.

‘이참에 에드워드 물건이나 가져와야겠다.’

일주일 동안 제 방에 있던 손수건을 챙긴 제네비브는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나서야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다.

“네 덕분에 내가 산다…….”

“그동안 네가 보여 준 과제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여기, 오늘 수업 자료.”

같이 정치 철학 수업을 듣는 제임스가 제네비브에게 교과서와 수업 자료를 건넸다.

“와, 그럼 톰슨이 잔소리를 한 시간 동안이나 한 거야?”

“정확히 40분. 일주일 동안 성전 베끼래.”

“아…… 그거 전통이지. 너도 드디어 겪는구나.”

안 좋은 기억이 되살아난 듯 제임스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마음에 안 드는 학생을 잡아다 성전 필사를 시키는 건 톰슨의 고약한 취미 중 하나인데, 1학년 시절의 제임스는 그러한 톰슨이 좋아하던 표적이었다.

“글자를 하나라도 틀리면 다시 쓰라고 해. 그리고 하루가 더 추가되지. 가끔은 이유도 안 알려 주고 기간을 늘릴 때가 있어.”

제네비브는 벌써 일주일이 2주로 늘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필사한 걸 다 읽어?”

“어. 근데 오류 없이 잘 쓰면 사흘 정도에 보내 주기도 하더라.”

이는 제임스가 어렵게 배운 정보였다.

“오랜만에 톰슨 생각하니까 머리가 다 아프네. 대체 언제 그만둔대?”

“글쎄, 우리 졸업하고 나서?”

제네비브가 바람 빠진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겠지. ……아, 맞다. 이거.”

“뭐야?”

제임스가 제네비브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아침 못 먹었을 거 아니야.”

포장을 풀자, 클로티드 크림과 딸기잼이 가득 있는 스콘이 나왔다.

“넌 정말 내 구세주야.”

제네비브는 스콘을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퍽퍽한 빵과 부드러운 크림의 조화가 환상적이었다.

“나, 다음 수업 있어서 먼저 간다.”

“그래, 수업 잘 듣고.”

제네비브는 스콘을 한 입 더 먹은 뒤, 다시 포장지에 감쌌다.

건조한 빵을 음미하며 오물거리던 중, 에드워드가 보였다. 뛰어온 걸 숨기려는 것처럼 그가 침을 삼켰다.

“징계는요?”

“너도 참. 나 안경 안 쓰는 거, 톰슨 씨도 알고 계셔.”

알아서 더 화내긴 했지만.

그러나 굳이 얘기해서 부담을 줄 필요는 없었다. 둘은 그 이후로 짧게 말을 주고받았다.

멀쩡한 안경으로 갈아 끼운 에드워드는 조금 빤히 제네비브를 바라보았다. 제네비브가 뻘쭘하게 웃자, 그가 우왕좌왕 설명했다.

“아. 제가, 선배를 제대로 본 건 처음이어서요……. 그게, 그러니까…….”

“그동안 깨진 안경 쓰느라 고생했어.”

그 뒤로 이어지는 대화는 그럭저럭 합격점이었다. 과할까 걱정하던 자수 역시 다행스럽게도 마음에 들어 한 것 같았다.

* * *

마지막 수업은 역사였다.

제네비브는 타이드 교수가 수업을 두 시간 정도 늦게 끝내 주길 바랐다.

“진저, 내가 널 사랑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

그 생각을 블랑카에게 얘기하자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타이드 교수는 늦긴커녕 수업을 30분 일찍 끝냈다.

기뻐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오로지 제네비브만이 음울했다. 성전 필사를 위해 톰슨의 사무실을 방문한 지도 사흘째였다.

‘완벽하게 쓰면 톰슨의 기분이 풀어져 사흘쯤 보내 준다’라고 제임스가 한 말이 무색해지게 제네비브는 목요일인 지금까지 성전을 베껴야 했다. 월요일에 허락 없이 안경을 가지고 도망간 게 밉보인 탓이었다.

“블랑카…… 네가 대신 가 주면 안 될까? 가발은 내가 어떻게든 구해 올게. 제발!”

“걸려서 일주일 더 늘어나면 어떡하게. 나, 토미 얼굴 못생겨서 1초도 보기 싫단 말이야.”

토미는 오웬이 지은 톰슨의 별명이었다. 톰슨이 하는 짓이 애보다도 못하다며 지어 준 건데, 어떻게 퍼진 건지 세인트 존 칼리지 학생 모두 그를 토미라고 불렀다.

제네비브는 아무리 그래도 그를 토미라고 부르는 데 동조하지 않는 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였지만, 그간 톰슨에게 시달린 걸 떠올리면 ‘토미’라는 별명도 지나치게 깜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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