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14화 (14/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4화

‘이 정도면 되겠지.’

제네비브는 그제야 한시름 놓곤 피스트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남학생은 부심과 대화를 나눴고, 부심은 아까 남학생처럼 찰스 무리 쪽으로 허둥지둥 달려가 그들에게 말을 전했다. 그러자 무리에서 한 사람이 튀어나와 주심에게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그냥 주심한테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

비효율적인 대화 방식을 의아하게 여기던 중, 주심이 타임아웃을 멈췄다.

경기가 멈췄다.

“…….”

그런데 피스트 위 선수들의 자세가 다소 이상했다.

찰스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검을 피하고자 했고, 에드워드의 검은 찰스의 가슴 부근을 찌르고 있었다. 아까와 상황이 달랐다.

그 순간, 주심이 피스트 위의 찰스를 불렀다. 에드워드는 그대로 검을 거뒀다.

엉거주춤 일어난 찰스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하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주심이 그 곁으로 다가가 상황을 설명했다.

곧, 찰스가 제네비브를 노려봤다. 이어 욕설을 내뱉곤 마스크를 소리 나게 집어 던졌다.

“경기는 여기서 종료합니다! 더 보고 싶다면 다음 주부터 진행되는 공개 훈련에 와 주세요!”

찰스에게 향하는 학생들의 시선을 돌리려는 주심과 성난 그를 달래 주는 패거리들이 보였다.

대부분 같은 학년이라 그런지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데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제네비브는 지금까지 한 건 ‘공개 훈련의 맛보기’라는 듯 임기응변을 펼치는 주심의 순발력에 놀랐다.

학생들이 하나둘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에드워드와 찰스는 피스트 양 끝에서 장비를 벗었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에게 다가갔다. 그는 마스크를 벗고 땀을 닦아 내고 있었다. 그의 펜싱복 군데군데엔 찰스가 득점한 붉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

그런데 제네비브를 본 에드워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먼저 말했다.

“……안 도우셔도 됐어요.”

“…….”

마스크를 든 에드워드가 다소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 건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죄송해요.”

제네비브의 표정이 안 좋아진 걸 본 에드워드가 움찔하더니 제 얼굴을 연거푸 쓸어 냈다.

“……그래도 전, 선배가 저를 더 믿어 주길 바랐어요. 죄송해요.”

그다음, 에드워드는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었다.

‘아…….’

그 말을 들은 제네비브는 피스트 옆에 있던, 그녀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테이블을 봤다.

13대12.

짧은 시간 동안 에드워드는 오로지 한 점만을 허용하며 찰스를 압도했다. 경기 후반부는 에드워드가 리드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네비브는 그 순간을 망친 사람이었다.

“……미안해.”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네비브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장비, 정리해야 해서요.”

그 말만을 남긴 채 에드워드가 피스트 아래로 내려갔다.

* * *

에드워드는 마이언 제국에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무턱대고 펜싱 클럽 소속인 찰스에게 가입 의사를 밝혔다.

“에드너드, 네가 미쳤구나.”

찰스는 비웃었지만, 에드워드가 진심인 걸 알아채곤 머리를 굴렸다.

“가입하려면 우리가 아니라…….”

찰스는 눈치 없이 자신들이 아닌 담당 교수에게 가야 한다고 말하려는 크리스토퍼의 발등을 콱 밟았다.

그렇게 에드워드는 눈 깜빡하는 사이에 수십 명에게 둘러싸여 제 편 하나 없는 경기를 진행해야 했다.

“이건 에페(Épée)가 아니라 플뢰레(Fleuret)인데.”

에드워드는 인상을 썼다.

플뢰레는 몸통만 찔러야 하지만, 찰스는 제 검이 닿는 곳이라면 전부 찌르고 베었다. 보호 장비를 입고 있음에도 아픔은 느껴졌다.

“그래서 점수에 안 들어가잖아.”

찰스가 히죽 웃었다.

그는 계속해서 규칙을 위반하고 에드워드를 공격했다. 큰 덩치와 어울리는 힘은 스치기만 해도 굉장한 아픔을 가져다줬다.

만약 찰스가 규칙대로 진행한다면 공격하기 어렵지 않으나, 어디를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모든 신경을 방어에 집중해야 했다.

그렇게 에드워드는 무력해진 기분과 함께 첫 번째 바우트를 그대로 날렸다.

찰스는 세 바우트 중 한 번만 이기면 가입할 수 있다고 했지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안 가고 싶었다.

두 번째 바우트를 진행하던 에드워드는 결국 타임아웃을 외치고 기권 의사를 밝히려고 했다. 하지만 찰스가 먼저 타임아웃을 외쳤다. 이유는 늘 그렇듯 자신을 조롱하기 위함이었다.

찰스를 무시하고 기권하려던 차―.

“……선배?”

반대편에 제네비브가 보였다.

그녀의 얼굴엔 짜증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제네비브는 피스트 중간 테이블을 가는 동안,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표정을 풀었다.

이후, 제네비브는 기록원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등지고 있었기에 에드워드는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대신, 하나는 확실했다.

‘이기고 싶다.’

이기고 싶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제 편이 아니어도, 이곳에 제네비브가 있으니까.

경기가 재개되었다.

찰스의 온갖 공격을 받은 덕에 에드워드는 그의 패턴을 얼추 파악했다. 큰 체격을 믿고 내지르는 공격은 위협적이었지만, 그 덕에 허점도 보였다.

주심이 찰스의 사람인 이상, 에드워드가 할 일은 하나였다.

“…….”

“…….”

압도적으로 그를 이기는 것.

찰스는 에드워드가 예상한 대로 검을 휘둘렀다. 이전 바우트에서 자신이 가진 기술을 전부 보여 준 덕분에 이후는 수월했다. 에드워드는 그가 손쓸 새도 없이 연이어 득점했다. 8점 차가 나던 점수는 어느새 2점으로 좁혀졌다.

에드워드는 잠시 경기장 왼쪽을 보았다. 제네비브는 여전히 기록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디를 보는 거야.”

찰스가 사납게 말했다. 옆구리를 찔러 기분이 좋기라도 한 건지 웃음소리가 들렸다.

에드워드는 인상을 썼다.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데, 그 원인이 되는 사람의 목소리까지 들으니 불쾌감이 배로 커졌다.

‘황자님. 살고 싶으시면 눈에 띄지 마십시오.’

또, 귓가에선 또다시 밀포드 씨의 말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보호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눈에 띄어 버렸는데, 좀 더 날뛴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다.

‘이기면…… 좋아해 주지 않을까?’

대신, 어수룩한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후 경기는 에드워드가 주도했다. 방금 내준 점수가 실수라는 걸 친히 가르쳐 주듯, 에드워드는 피스트 위를 그야말로 날아다녔다.

경기를 보는 학생들도 어렵지 않게 그가 이기기라 생각했다. 승리까지 단 3점. 에드워드는 채 1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무려 8점을 획득했다.

“타임!”

그때, 주심이 돌연 타임아웃을 외쳤다. 에드워드는 찰스의 가슴팍에 찌른 검을 거두었다.

그렇게 경기는 허무한 끝을 맺었다.

경기를 끝낸 건 주심이었지만, 그 판단을 내리는 데 제네비브가 관여한 건 분명했다.

“…….”

에드워드는 경기장을 나가는 제네비브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좋은 뜻으로 그랬다는 건 당연히 안다. 제네비브만큼 선의로 이뤄진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 선의가 아무런 악의 없이 저를 무너트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에드워드는 찰스가 찌른 어깨 부근을 매만졌다. 붉은 가루가 손바닥에 묻어났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에게 선의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 행동은 분명 옳다.

‘그래도.’

그래도.

에드워드는 속으로 한 번 더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고.

* * *

오후 1교시는 공용어였다.

귀족들이 타국 귀족들과 대화할 때 사용하는 언어로, 에드워드는 몇 가지 복잡한 문법을 제외하면 공용어를 제법 자유롭게 구사했다.

“에드워드 학생? 108페이지 다섯 번째 줄을 해석해 보겠나?”

덕분에 수업에 조금 집중하지 않더라도, 수수께끼 같은 고문(古文)이라 하더라도 쉽게 번역할 수 있었다.

“훌륭하게 해석했군. 하지만, 수업엔 좀 더 집중하도록.”

로드리게즈 교수가 가볍게 눈치를 주고는 수업을 이어 갔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교수의 바람대로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의 정신은 여전히 점심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만약 제네비브에게 화를 내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경기에 진심으로 임했더라면?

의미 없는 가정들이 쌓여 후회를 불러왔다.

에드워드가 점심때 제 행동을 생각하며 자책하고 있을 때, 강의실 앞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수업 흐름이 깨진 바람에 로드리게즈 교수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문을 열어 줬다.

“수업 중에 죄송합니다. 에드먼드, 아니, 에드워드라는 학생을 찾고 있습니다.”

수업 중 찾아온 땅딸막한 남자가 손에 쥔 종이를 읽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기억이 맞다면 그는 펜싱 클럽의 코치일 거다. 그는 지금처럼 공용어 수업 때마다 들어와 펜싱 클럽 소속 학생들을 찾곤 했다. 덕분에 로드리게즈 교수는 그를 굉장히 싫어했다.

코치의 입에서 에드워드의 이름이 언급되자, 교실에 앉아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한곳에 쏠렸다. 갑작스러운 관심에 에드워드는 주눅이 들었다.

로드리게즈 교수가 움츠러든 에드워드를 보고는 대답했다.

“있다네.”

“잘됐군요! 잠깐 에드워드 학생 좀 빌리겠습니다. 여기, 확인서요.”

남자가 로드리게즈 교수에게 종이를 건넸다.

“확인했네. 하지만 알렌, 앞으로 수업 중에 들어오는 건 자제해 주게나.”

“주의하겠습니다.”

하지만 학생들도 로드리게즈 교수도 그가 계속 올 것임을 알았다. 이미 몇 번이고 반복한 대화였으니.

로드리게즈 교수가 머리를 까딱였다. 수업을 진행하게 빨리 가라는 신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