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5화
“……잠시만요.”
에드워드는 신호를 받자마자 책상 위에 올려 둔 교과서를 가방 안에 쓸어 담았다.
“키가 제법 크구나. 음음, 생각보다 더 좋군. 따라와라.”
남자는 교실 문이 닫히자마자 대뜸 에드워드의 몸을 구석구석 분석하고 평가했다. 에드워드는 찜찜한 기분과 함께 그를 따라갔다.
“난 메이슨 알렌이야. 펜싱 플뢰레 남자부 코치지. 코치님이라고 부르렴.”
그는 에드워드가 묻지도 않은 정보를 술술 알려 줬다.
에드워드는 클럽 소속이 아닌 자신에게 ‘코치님’이라는 호칭을 정해 준 남자를 보며 그가 여러모로 무례하다고 느꼈다.
“저를 왜 부르셨나요?”
“점심에 네 경기를 봤단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냐? 우리 팀에겐 딱 너 같은 인재가 필요해.”
“네? 아…… 감사합니다.”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하던 중, 알렌 코치가 싱글벙글 웃으며 본론을 꺼냈다.
“너, 펜싱 클럽에 들어올 생각 없니?”
“…….”
일순, 에드워드의 머릿속이 텅 비었다.
“전 떨어진 게 아닌가요? 점심 경기에서 이겨야 한다고 들었는데요.”
에드워드가 진지한 목소리로 묻자, 알렌 코치는 우스운 얘기를 들었다는 양 길게 웃었다. 한순간 바보가 된 기분을 느끼며 에드워드는 그의 웃음이 끝날 때를 기다렸다.
“웃어서 미안하구나. 몇 년간 들은 얘기 중에 가장 웃겨서 말이다……. 근데, 넌 네가 졌다고 생각하냐?”
“그렇지 않나요? 바운트 두 개를 졌으니까.”
“난 살면서 그런 경기를 본 적이 없어.”
알렌 코치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방어하면서 그렇게 빨리 공격 자세를 취하니? 정말 펜싱을 배워 본 적이 없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정말이지, 등잔 밑이 어두웠군. 너만 있으면 우승도 무리는 아니겠어.”
백 년이면 우승할 때도 됐지. 알렌 코치가 탐욕스럽게 중얼거리며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
에드워드는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그럴 새도 없이 알렌 코치가 한 문을 활짝 열었다.
“스미스 감독님! 데리고 왔습니다!”
그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렌 코치가 에드워드를 데리고 온 곳은 펜싱 훈련장이었다.
피스트와 테이블만 있는 경기장과 달리, 이곳엔 별별 물건이 다 있었다. 처음 보는 기구는 물론이고 훈련에서 이런 것까지 사용하나 싶을 만큼 보편적인 운동 기구들도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에드워드를 반긴 건 온갖 소음이었다. 펜싱화가 바닥에 마찰하는 소리, 검이 공기를 가로지르는 소리……. 에드워드는 처음 보는 광경에 머뭇거렸다.
그때, 알렌 코치의 외침으로 한 사람이 나왔다.
“네가 말한 천재가 이 아이인가?”
“네. 점심때 찰스와 맞붙은 학생입니다.”
알렌 코치는 마치 빼어난 상품을 자랑하는 것처럼 에드워드를 앞으로 밀었다.
“이름이?”
“에드워드입니다.”
알렌 코치가 에드워드 대신 대답했다.
“성씨는?”
감독이 휘청거리는 그를 보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평민입니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그런가. 난 테레사 스미스다. 스미스 감독이라고 불러. 난 네 친구가 아니란 걸 명심하고. 스미스 부인, 테레사, 그따위로 부르면 훈련 끝나고 운동장 열 바퀴다.”
스미스 감독이 에드워드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알렌의 안목은 믿을 만하니까 실력은 적당하겠지. 로렌스!”
스미스 감독의 호령에 키 큰 3학년이 급하게 달려왔다.
“실력을 파악하려면 실력자와 붙어야지. 얜 딜런 로렌스다. 5분 안에 갈아입고 나와.”
알렌 코치가 어리둥절한 에드워드에게 훈련복을 건넸다.
훈련복으로 갈아입고 돌아왔을 때, 에드워드는 찰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점심때와 마찬가지로 미미한 반응만 보였다.
앙가르드, 프렛, 알레.
펜싱 감독의 주도하에 경기가 이뤄졌다. 점심 경기와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공정한 심판과 합리적인 경기가 치러졌다.
“거기까지.”
첫 바우트는 동점으로 끝났다. 스미스 감독은 한 점 내기 승부 대신 경기를 중지했다.
“이런 애는 1학년 때부터 있어야 했는데! 아까워라.”
알렌 코치가 감명 받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세에 너무 힘이 들어갔어. 특히 어깨에. 나쁜 습관도 몇 개 있고.”
스미스 감독은 에드워드가 고쳐야 하는 부분을 읊었다.
3분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어떻게 알아챈 건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에드워드조차 몰랐던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 냈다. 같이 개선하자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감독님, 그래도 첫날인데 살살하는 게…….”
알렌 코치는 어렵게 찾아낸 인재가 도망갈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이언 제국에 데리고 가려면 이렇게 해야지.”
“…….”
“펜싱 클럽에 온 걸 환영한다.”
스미스 감독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콜린스!”
그녀가 익숙한 이름을 목청껏 부르자, 찰스가 튀어나왔다.
“네.”
“넌 예비 선수로 빠져야겠다.”
“싫습니다.”
찰스의 즉각적인 거절에 스미스 감독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콜린스 군은 단체전에 나가잖습니까. 내년에 출전하면 됩니다.”
알렌 코치가 찰스를 달래 줬다. 에드워드가 상황 파악을 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에드워드. 갑자기 주전이 되어 당황스러울 건 알아. 하지만, 난 네가 해낼 거라고 믿는다. 마이언 제국 방문 신청은 했지?”
찰스 달래기를 알렌 코치에게 떠넘긴 스미스 감독이 물었다.
“아, 아뇨.”
떨떠름했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은 3분 만에 주전을 따낸 거다. 그것도 찰스를 밀어내고.
“그래? 뭐, 괜찮아. 클럽은 주전 등록만 하면 참가가 자동 확정되니까 오히려 더 수월하겠어. 훈련이 끝나고 남아서 서류 몇 개만 작성하면 된다.”
제네비브가 말한 대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첫날이었지만 스미스 감독은 에드워드를 기존 선수들과 똑같이 훈련시켰다. 결국, 에드워드는 오후 수업을 전부 빼먹어야 했다.
알렌 코치는 허락만 떨어진다면 에드워드를 사브르와 에페, 그리고 단체전까지 출전시킬 기세였다.
처음엔 체력 관리를 위해 안 된다고 거절하려던 스미스 감독은 고된 훈련을 군말 없이 따르는 에드워드를 보며 출전 종목을 늘려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훈련을 끝낸 에드워드는 조금 지친 몸으로 선수 등록을 했다.
“이제 사고만 안 치면 된다!”
알렌 코치가 에드워드의 어깨를 팡팡 치면서 말했다.
* * *
기숙사로 돌아간 에드워드는 자연스럽게 제네비브를 찾았다.
제네비브는 누구와도 잘 어울렸다. 어제는 이 사람과 어울리다가도 다른 날에는 저 사람과 어울렸다. 적당한 무리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거의 모든 학생이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런 제네비브에게도 고정된 무리가 존재했다.
제네비브 달링, 제임스 카터, 오웬 블라이스, 블랑카 보아르네.
그들은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유명한 무리였다. 넷은 가문의 이름을 남용하지 않았고, 학생들은 그 점을 좋아했다.
에드워드는 찰스 패거리에게 시달려 모르는 일이었지만, 칼리지 학생들은 가문의 이름 아래에서 비교적 겸손한 편이었다. 대귀족 자제들도 겸손한 상황에 저들이 권력을 남용하면 꼴값인 걸 알았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이 듣는다면 질색하며 ‘우리 앞으로 모르는 사이로 지내자’라고 말하며 절연을 선언하겠지만, 다른 학생들이 ‘그들(Them)’이라고 하면 보통 그 네 명을 의미했다. 그걸 모르는 에드워드는 그들을 ‘포커 모임’이라고 불렀다.
포커 모임은 벽난로 앞 소파에 자주 앉았는데, 적당히 따뜻한 자리와 푹신한 의자가 일품이었다.
무리에서 어느 누구도 앉으면 안 된다고 한 적 없었지만, 학생들은 그곳이 포커 모임의 자리라고(넷은 그저 갈 때마다 마침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다) 여겼다.
에드워드는 기숙사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훈련이 시작되어 선수 대다수가 기숙사에 남아, 평소보다 복작거렸다.
역시나 벽난로 앞 소파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 하나, 붉은 머리 하나, 금발 머리 하나. 하지만 제네비브는 없었다. 소파 오른쪽 끝에 있는 금색 머리는 제네비브의 것보다 짧고 색이 진했다.
‘언제 오시지.’
에드워드는 점심 일을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십여 분을 기다려도 제네비브는 나타나지 않았다. 궁금함에 결국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어? 제네비브랑 친한 후배잖아.”
블랑카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에드워드를 보곤 아는 체했다.
“안녕? 제네비브 찾아?”
“안녕하세요. 선배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실 수…….”
“제네비브? 쟤 토미한테 잡혔잖아.”
에드워드는 세인트 존 칼리지에 ‘토미’라는 사람이 있는지 생각했다.
“톰슨 씨한테 붙잡혔을 거야. 네가 찾는다고 전해 줄까?”
에드워드가 ‘토미’가 누군지 모른다는 걸 눈치챈 제임스가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했다.
“……톰슨 씨요?”
톰슨이라면 신전 관리인이었다. 제아무리 소문에 어두운 에드워드여도 그가 교칙을 위반하는 학생들을 잡는다는 것쯤은 알았다.
“…….”
짐작되는 일이 있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깐 사색에 잠긴 에드워드는 짧은 인사와 함께 빠르게 톰슨의 사무실 건물로 향했다.
해가 져서 가는 길목은 어두웠다.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선 에드워드는 다급한 마음에 넓은 보폭으로 계단을 두 개씩 뛰어갔다.
“들어가겠습니다.”
문틈 사이로 공손하게 인사하는 제네비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끼익.
녹슨 소리가 고막을 할퀴었다.
문이 열리면서 제네비브가 보였다.
“하…….”
문이 닫히는 소리 뒤로 들리는 한숨이 에드워드의 귓속에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