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6화
* * *
문이 닫힌 걸 확인한 제네비브는 톰슨의 사무실로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늘 신선한 방식으로 지랄 맞았지만 오늘따라 더 지랄 맞았다. 딱 하나, 이시스(Isis)를 이사이(Isi)로 잘못 썼을 뿐인데 톰슨은 그 문장을 백 번이나 베끼게 했다.
‘주먹이 운다, 주먹이 울어.’
제네비브는 얼굴에서 가식적인 웃음을 지웠다. 지쳤다.
“…….”
근데, 보이면 안 되는 사람이 보였다.
제네비브는 조금 전 추태를 에드워드가 못 봤길 바랐지만, 얄궂게도 에드워드의 눈은 이곳에 오면서 어둠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제네비브는 허공에 주먹질까지 하지 않았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여기엔 무슨 일이야?”
제네비브는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작게 속삭였다.
일주일 내내 톰슨과 같은 방에서 필사해 본 결과, 그는 벌을 받는 학생이 누군가를 데리고 오는 걸 싫어했다.
“선배 보려고요…….”
에드워드가 덩달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위험하니까, 일단 나가자.”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의 손목을 잡고는 그를 끌고 갔다. 그는 순순히 제네비브를 따라갔다.
“톰슨은 다른 학생이 오는 걸 싫어해서. 그제는 오웬도 걸려서 걔도 필사할 뻔한 거 있지. 물론, 도망갔지만.”
1층에 도착했을 무렵, 제네비브의 목소리는 점차 원래 크기로 돌아갔다.
“선배?”
“응?”
“……월요일 미사 때문에 그런 건가요?”
에드워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밝혀질 줄 몰랐다. 웬만해선 비밀로 남기려던 제네비브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맞아, 미안해.”
제네비브는 순순히 시인했다.
“사과는 제가 하는 게 맞지 않나요?”
에드워드는 도통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안경은 에드워드의 것이었고, 제네비브는 그 대신 벌을 받았으니.
제네비브는 아니라고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이건 우리가 서로 사과할 일이 아니야!”
그러고는 조금 격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안경을 그곳에 둔 사람이 잘못한 거지.”
생각을 좀 더 깊게 파 보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훈훈한 사과 현장을 만들어야 하는 건 에드워드와 제네비브의 몫이 아니었다. 그곳에 안경을 둔 사람이(제네비브는 그게 찰스라고 믿었다) 둘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다.
“진짜 사과해야 하는 놈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안 나타나고…….”
곱씹을수록 괘씸해졌다.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게 정상 아닌가? 제네비브는 고자질에 취미가 없었지만, 지금은 확증만 찾아낸다면 바로 톰슨에게 일러바칠 의향이 있었다.
“근데, 여긴 어떻게 찾아왔어?”
제네비브는 부글부글 끓는 화를 애써 식히며 물었다.
“선배 친구분들께 물었어요. 알려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에드워드가 조금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뭘?”
제네비브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했다.
“아…….”
에드워드가 잠시 뜸을 들였다.
“……저, 펜싱 클럽에 가입했어요.”
몇 초 전과 다르게 다소 힘 빠진 목소리였다.
에드워드가 고개를 떨궜다. 와중에 달빛을 받은 연갈색 눈은 죄인처럼 제네비브를 힐끔 보고 피하기를 반복했다.
“정말?”
제네비브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잘됐다!”
그녀는 문장 그대로 신이 난 나머지 에드워드의 손을 맞잡고는 위아래로 휘적거렸다. 그뿐 아니라 그의 손바닥을 펼치게 만들고 손뼉을 치는 등, 당사자보다 더 기뻐했다.
“그럼, 테스트를 다시 진행한 거야?”
“그건 아니고, 코치님이 그때 경기를 보셨나 봐요.”
제네비브는 1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매섭게 점수를 복구하던 에드워드의 실력을 떠올렸다.
“나였어도…….”
1분 만에 역전 직전까지 끌고 간 선수를 어떤 정신 나간 코치가 놓칠까. 제네비브는 그 코치를 백번 이해했다.
“네?”
“나였어도, 널 찾았을 거라고.”
제네비브는 담백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나 때문에 점심 경기 끝까지 못 해서 아쉽다.”
“아…… 아니에요. 알고 보니 콜린스가 골탕 먹인 거더라고요. 저를 생각해서 하신 건데, 점심땐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니야. 그래서, 이제 학교 대표라고 부르면 되나?”
생소한 호칭을 들었다는 듯 에드워드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제네비브는 두 눈을 빛내며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에드워드는 그녀의 바람대로 전부 읊어 줬다.
“그럼 훈련은 내일부터야?”
“오늘도 하다 왔어요. 주말은 새벽부터 오후까지 훈련이라고, 스미스 감독님께서…….”
“테레사 스미스?”
“아는 사이세요?”
“아는 사이는 아니고, 유명한 분이셔서 몇 번 들어 봤어. 40년 전에 황실 기사 단장을 임명 받으셨대. 심지어 최연소였다니까, 굉장한 실력자겠지?”
에드워드의 순진한 질문에 제네비브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륙 군대의 주 무기가 총기로 바뀌면서 기사단은 역사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전생에서부터 ‘기사’라는 소재를 좋아하던 제네비브는 이를 아쉽게 여기곤 했다.
“네. 무척 뛰어나세요.”
이후 대화는 자연스럽게 기사에 관해 흘러갔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소드 마스터니 검기니 하는 허황된 질문에도 에드워드는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두 사람은 어느새 기숙사 건물에 도착했다.
“여어~ 제네비브랑, 아까 그 후배?”
계단 위에서 오웬이 두 사람을 불렀다.
오웬은 눈웃음을 지으며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본인에겐 재밌지만, 타인에겐 처리하기 힘든 장난을 꾸밀 때 그가 종종 짓는 웃음이었다.
제네비브는 그 미소를 보자마자 걱정이 태산으로 늘어났다.
“이것도 인연인데, 후배님도 같이 올래? 혼자는 심심하잖아.”
에드워드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오웬의 폭풍 같은 설득으로 결국 무리를 따라가게 되었다.
“오웬, 왜 이렇게 오래 걸렸— 진저!”
“만났구나.”
소파에 앉은 블랑카와 제임스가 예고 없이 나타난 둘을 반갑게 봤다.
블랑카와 제임스는 미리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바닥에 놓인 티 트레이 위엔 쿠키와 스콘이 있었고 소파엔 갖가지 책이 널브러졌다.
일행이 한 사람 더 생겼기에 블랑카와 제임스는 책을 한쪽으로 밀어 자리를 만들었다.
“야, 차 흘렸잖아.”
과정에서 펜 한 자루가 찻잔에 떨어졌다. 블랑카는 잽싸게 펜을 건져 내곤 냅킨으로 닦았다. 덕분에 소파는 빠르게 난장판이 되었다.
“이제 앉아도 돼.”
제임스가 쟁반을 소파 옆 탁자에 올려놓는 걸로 상황은 얼추 정리가 되었다.
제네비브는 그런 친구들을 익숙한 시선으로 훑어보곤 통성명을 도왔다.
“오웬은 저번에 만났지? 얘는 에드워드야. 우리보다 한 학년 후배. 에드워드, 얘넨 제임스랑 블랑카.”
제네비브는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걸 확인한 다음,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댔다.
오웬은 친구들이 앉던 소파가 아닌, 그 옆에 있던 1인용 안락의자에 앉았다. 원래 앉으려던 의자를 빼앗긴 에드워드는 엉거주춤 제임스 옆에 앉았다.
“에드워드라면…… 펜싱?”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라며 생각에 골똘히 잠겼던 블랑카가 갑자기 물었다.
“펜싱이라니?”
이어 오웬이 되물었다.
“아까 프란츠를 만났는데, 오늘 새로 들어온 애가 천재라 하더라고. 점심에 2학년들이 경기장을 몰래 써서 코치가 혼내려고 들어갔는데 되레 눈이 회까닥 돌아—.”
블랑카는 이곳에 후배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는 고상한 단어를 선정했다.
“아니. 한눈에 반한 선수가 있다고 해서 꼭 가입을 시켜야 한다고 감독한테 애걸복걸했다는데, 이름이 에드워드라고 했어. 그래서, 네가 펜싱 천재 에드워드야?”
블랑카는 ‘천재’나 ‘코치가 한눈에 반한 선수’와 같은 낯간지러운 단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았다.
“너, 프란츠 알아? 프란츠 로렌스.”
블랑카가 두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후배 잡아먹겠다. 겁먹게 왜 그래? 대신 사과할게. 얘가 지금 <더 칼리지> 5월호 특집 기사 때문에 학교 대표라고 하면 앞뒤를 안 가려.”
제임스가 블랑카를 진정시켰다.
그의 말대로 블랑카는 일반 신문 클럽 부원처럼 발로 뛰어서 기사 쓰기를 싫어했다.
하여 그녀는 미리 트로피를 받아 올 것 같은 학생들을 섭외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현재까진 조정 클럽과 여자 폴로 클럽만이 섭외 리스트에 있었다.
“하……. 내가 왜 그때 대회를 나가서. 우리 오웬 씨는 친구가 과로로 죽어 가는데 관심도 없지?”
“네 개 빠진 거 하나로 봐주는데, 그게 힘들어?”
“네 개가 아니라, 세 개란다.”
사냥 대회 두 개, 겨울 대회 하나. 블랑카는 친절하게 손가락 3개를 펼쳤다.
“진저. 정말 테오는 안 돼?”
“아서라, 얘가 허락하겠어?”
오웬이 제네비브가 할 말을 대신해 줬다.
“그건 그렇지만……. 다른 학교 승자 인터뷰 하나만 있어도 구성이 알찰 텐데.”
블랑카는 여전히 미련이 남는 듯 입맛을 다셨다.
“테오가 누군가요?”
“쿨럭!”
에드워드의 입에서 ‘테오’가 나오자, 제네비브는 사레가 들어 기침을 했다.
“저, 저기. 홍차 좀…….”
그녀가 퀭해진 얼굴로 제임스에게 말했다.
“……안 알려 주셔도 괜찮아요.”
홍차를 꿀꺽꿀꺽 삼키는 제네비브를 보자니,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워드가 당황한 듯 제 말을 수습했다.
“말해도 돼?”
“어차피 알 사람은 다 아는데, 뭐. 숨길 일도 아니고…….”
격했던 반응과 상반되게 제네비브는 선뜻 허락했다. 물론, 표정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일단, 테오가 아니라 테오도르 우드빌이야.”
오랜만에 듣는 풀 네임에 제네비브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네비브의 전 약혼자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