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7화
“…….”
신이시여. 언제 즈음 아무렇지 않아질까요…….
“……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의 반응을 힐끗 보곤 소파 한쪽에 모아 둔 책 한 권을 꺼냈다. 당연히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기에 그저 목차의 꽃 그림만 뚫어져라 노려봤다.
오웬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이어 설명했다. 포가츠 아카데미의 폐교, 우드빌 대공 가문과의 약혼, 세인트 존 칼리지 입학 후 서로의 동의하에 파혼까지.
오웬은 장황한 이야기를 제법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를 막고 싶었지만, 쓸데없이 정확한 오웬의 발음과 발성이 귀에 똑똑히 박혔다.
제네비브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다들 약혼, 한 번씩 해 봤잖아?”
제네비브는 마치 약혼은 모든 귀족이라면 으레 겪는 경험처럼 말했다. 하지만, 오늘 처음 사정을 들은 에드워드조차 그게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인 걸 알았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다들 하루 만에 사랑에 빠지진 않잖아?”
“아악!”
제네비브는 결국 소파에 머리를 박았다.
상심하고 어린 마음에 치렀던 약혼은 상대가 지나칠 정도로 괜찮았다. 달링 부부가 고심하며 고른 딸의 짝이니 당연했다.
이곳에서 ‘사랑해’가 지니는 의미는 전생과 달리 크고 무거웠다. 이곳에서 연인 사이에 사랑을 고하는 건 관계를 한순간에 다음 단계로 진전시키는 거대한 한마디였다.
그러니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사람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3년 전의 제네비브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래서 얘가 그때 일을 지금까지도 창피하게 생각해서 우린 테오와 말도 못 섞어. 제네비브! 정말 괜찮다니까? 열다섯이면 그럴 수도 있지~.”
오랜만에 과거 얘기를 들으니 정신이 어지러웠다.
“다들 까먹었을 거야.”
제임스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를 정확하고 자세하게 묘사하는 오웬을 보면 아닌 것 같았다.
“아무튼! 테오가 매번 펜싱 대회를 우승해서 말이지……. 사촌과 사촌으로서 인터뷰를 하고 싶은데~.”
블랑카가 제네비브에게 달라붙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블랑카는 제네비브가 싫어한다면 하지 않았고, 제네비브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까, 꼭 우승해서 우리랑 인터뷰해 줘.”
블랑카가 두 손을 꼬옥 모으며 말했다. 흡사 신전에서 기도하는 신자 같았다.
“다른 학교에서 인터뷰 요청 들어오면 무시해. 특히, 렐타 사관 학교는 죽어도 안 돼!”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학교 기밀 샌다고 인터뷰 안 해 줘. 물론, 군사 학교이니 이해는 한다만! 그런데 하필이면 우승 팀은 많아서 다른 학교들은 전형적인 순위 기록만 하게 되지.”
이미 블랑카의 머릿속에 에드워드는 ‘세인트 존 칼리지가 몇십 년 만에 배출한 펜싱 우승자’가 되어 <더 칼리지>에 그에 관한 특집 기사가 나오고 있었다.
“……노력하겠습니다.”
“블랑카, 왜 부담을 줘. 스포츠는 즐기면서 하는 거잖아. 전쟁도 아니고.”
제네비브가 에드워드의 부담을 덜어 주고자 한 말은, 오히려 에드워드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 * *
시간은 흘러 어느덧 식사 시간이 되었다.
“금요일에 다 같이 먹는 것도 오랜만이네~.”
“제임스는 맨날 집으로 돌아가니까. 배신자.”
블랑카가 진심을 반 정도 담아 말했다.
“귀화해.”
제임스는 익숙하게 맞받아쳤다.
카터 공작령은 마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었다. 학생 대부분이 타운하우스에 머무는 것과 비교하면 대단한 호사였다.
“미안. 나는 우리나라가 좋아서.”
“나도 카르디르가…….”
제네비브가 에드워드를 힐끗 보곤 말했다.
“난 이미 아본리아 사람인데?”
“아버지께 새 아들을 들일 계획이 있는지 여쭤볼게.”
제임스가 억울한 목소리로 제 정체성을 상기시켜 주는 오웬을 가볍게 넘겼다.
에드워드는 네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무리에서 자연스럽게 빠질 순간을 살폈다. 식사까지 같이한다면 민폐일 게 분명했다.
“후배님~ 같이 앉기로 한 사람 있어?”
하지만 오웬이 빠지려는 에드워드를 귀신같이 붙잡았다.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는 에드워드에겐 조금 껄끄러운 질문이었지만, 오웬은 그가 그 사실을 깨닫기 전에 태연히 말을 이었다.
“없으면 같이 먹자고~.”
에드워드는 머뭇거렸다. 그러고는 허락을 구하는 눈으로 제네비브를 봤다.
“같이 먹으면 좋지!”
제네비브는 동조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에드워드의 낯선 합석이 시작되었다.
“와! 장학생이면 공부도 잘하겠네!”
어느새 오웬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에드워드의 조사를 끝냈다.
‘이상한 질문하면 죽는다.’
‘알지~ 나 못 믿어?’
‘애들아, 진정해.’
세인트 존 칼리지 내에 장학생이 어떤 위치인지 알기에 네 사람은 필사적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로드리게즈 교수님이 말하던 공용어 잘하는 2학년이 너구나!”
“……그렇게 잘하진 않아요.”
“그 교수님, 칭찬에 엄청 박하잖아. 겸손하기까지 하네.”
오웬의 주도로 넷은 불편한 질문은 되도록 삼가며 말하기 쉬운 주제로만 대화를 진행했다.
말수가 적은 에드워드를 대신하여 빈 음성을 채운 건 오웬과 블랑카였다. 에드워드는 네 사람의 배려라는 걸 금방 눈치챘다.
“왜 사람을 밀어?”
“너 때문에 못 들어가고 있잖아. 빨리 앉아.”
식당에 도착한 제네비브와 오웬은 티격태격 말다툼을 했다. 달링 후작부인과 블라이스 백작이 본다면 어릴 때와 변한 게 없다고 고개를 저을 상황이었다.
“참을성 없기는.”
제네비브는 입술을 쌜쭉대는 오웬을 무시한 후, 에드워드의 옆에 앉았다.
“마이언 아카데미는 처음이야?”
포크 끝으로 구운 양송이버섯을 쿡쿡 찌르던 블랑카가 물었다.
“아뇨, 작년에 가 봤어요.”
“그럼 올해는 왜 신청 안 했어? 마음에 안 들었어?”
“아……. 기한을 놓쳤습니다.”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흐름을 탄 대화는 자연스럽게 여름 대회로 흘러갔다.
“폴로 경기장 주변에서 가든파티가 열리거든.”
제네비브는 다른 이들에겐 상식일지 몰라도 에드워드는 모를 법한 지식을 알려 줬다.
“제네비브가 폴로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하지. 1학년 때 주전으로 나가서 이기고 오니까, 달링 후작님이 에인젤을 선물해 줬잖아.”
블랑카의 말대로 제네비브의 폴로 실력은 달링 후작의 자랑거리였다.
일반적으로 폴로 경기 때 선수들은 햇빛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귀족들은 그 주변에서 고상하게 가든파티를 즐겼다. 아는 선수가 소속된 팀이 공을 넣으면 예의상 손뼉을 쳐 주고, 그 뒤로는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하지만 제네비브가 경기할 때면 적어도 카르디르 왕국의 귀족들은 경기에 집중해야 했다. 달링 후작의 입김이 들어간 덕분이었다.
“에인젤이요?”
달링 후작은 딸이 저렇게 말을 잘 타는데 족보도 없는 말을 타선 안 된다며 그녀에게 아할 테케를 선물했다고 한다.
“내 말 이름이야.”
그리고 이는 유행처럼 번져, 본래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제공하는 말을 타던 이들도 덩달아 품종마로 바꾸기 시작했다.
이에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낀 제네비브는 도살장으로 향할 예정이었던 말들을 달링 가문 아래로 입양했다고.
명마를 받은 걸 자랑거리로 생각한 적 없다는 듯, 제네비브는 설명을 한 문장으로 짧게 끝냈다.
“올해는 안 나가나요?”
에드워드가 물었다. 제네비브가 폴로를 한다는 건 처음 듣는 일이었다.
“작년에 낙마해서 후유증이 좀 남았어.”
“……아.”
제네비브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지금은 괜찮으신 건가요?”
“걱정 받는 게 민망할 정도로 멀쩡해.”
제네비브는 한 달 만에 회복했다. 살면서 한 번쯤 겪는 가벼운 부상이건만, 그녀의 부친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에인젤을 쏘려고 했다.
안 좋은 기억이었는지, 제네비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선배.”
“어?”
“나?”
“누구?”
“왜?”
에드워드는 제네비브를 부른 건데, 졸지에 눈동자 네 쌍이 에드워드를 향했다. 참고로 제네비브는 ‘누구?’라고 되물은 사람이었다.
“호칭 정리 좀 해야겠다.”
제임스가 마치 계속 볼 사이처럼 호칭 정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나는 이름으로 불러도 돼. 선배는 딱딱하잖아. 블랑카라고 불러. 이름이 싫으면 보아르네도 괜찮아! 에디라고 불러도 돼?”
에디라니.
갑작스레 별명이 생긴 에드워드는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별명이라고는 ‘에드너드’밖에 없었던지라 새로 생긴 별명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블랑카의 성은 발음하기 어려웠다. 에드워드는 최선을 다해 발음하려고 했지만, ‘보와르네’나 ‘보왁르네’가 최선이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저기 오웬은 아직도 발음 못 해.”
블랑카가 들고 있던 포크로 대각선에 앉은 오웬을 정확하게 가리켰다.
“할 수 있거든? 보아르내잖아.”
“보아르내가 아니라, 보아르네.”
억울해진 오웬은 비슷하게 발음하는 덴 성공했지만, 블랑카는 아주 작은 어감 차이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오웬은 그 뒤로 몇 번 더 시도했으나 번번이 퇴짜가 놓였다.
다행스럽게도 같은 제국 출신인 오웬과 제임스의 성씨를 말하는 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오웬은 성씨만 부르면 딱딱하단 이유로 이름을 부르라고 했고, 제임스도 비슷한 이유로 이름을 권했다(하지만, 에드워드는 둘을 성씨로 부를 생각이었다).
“그럼 나는 선배라고 부르면 되겠네.”
“그럴까요.”
제네비브의 말을 에드워드는 고민 없이 바로 승낙했다.
그 둘의 대화를 들은 세 사람은 ‘둘이 제일 친하면서 딱딱하게 그게 뭐냐?’라고 야유 비슷한 걸 보냈지만 에드워드는 이편을 선호했다. 아무래도 제네비브의 성이 ‘달링’인지라 낯간지러운 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름을 부르기에도 좀…….’
에드워드는 제네비브의 이름을 처음 발음했을 때 목에 남은 감각을 지금까지도 기억했다. 그때를 생각하니 나비를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목 근처가 간지러워졌다.
그러니, 매번 그런 기분에 휩싸일 바엔 ‘선배’라는 호칭으로 뭉뚱그리는 게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