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8화
* * *
제네비브는 간만에 혼자만의 주말을 즐겼다. 친구들은 이른 아침부터 기숙사 건물을 떠났다.
새벽부터 훈련이 시작되는 제임스나 <더 칼리지>의 막바지 작업을 위해 온종일 별관에서 나오지 않는 오웬과 블랑카까지.
본가로 편지를 보낸 제네비브는 학생 휴게실에서 다른 친구들과 시간을 때우다가 저녁 시간에 맞춰 식당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오웬과 블랑카가 얼굴을 비추긴 했지만, 채 5분도 되지 않았다. 둘은 피폐해진 모습으로 주머니에 간단한 음식을 집어넣고는 바삐 식당을 나갔다.
덕분에 제네비브는 ‘에드워드 도와주기 계획’에 살을 붙일 수 있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세인트 존 칼리지에 입학하게 되었으나, 천만다행으로 원작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빗겨 갔다.
그리고 처음, 에드워드의 정체를 알게 됐을 땐 안전하게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소설에서 보지 못한 그의 모습에 안타까움이 들었다.
하여, 제네비브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에드워드를 돕기로 했다.
물론 자신이 많은 걸 바꾸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소설 속에서 성의 없게 느껴질 만큼 짧게 서술된 그의 불우한 과거를 조금이라도 밝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의 기억 속에 세인트 존 칼리지가 끔찍하게만 남지 않길 바랐다.
‘펜싱 대회에서 우승하면 학교생활이 좀 편해질 것 같긴 한데…….’
트로피를 갖고 돌아오면 남은 학기는 편하게 보낼 수 있을 만큼 학생들은 우승한 학생에게 호의적이었다.
물론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면 잊히긴 하나, 지금 에드워드에게 필요한 건 한 학기 정도 유지되는 호감이었다.
‘원작대로라면 이번 여름에 황태자로 책봉될 테니까.’
에드워드라면 유의미한 성과를 낼 거라고 믿었지만, 제네비브는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에드워드나 제임스 같은 스포츠 클럽 학생들은 식당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새 한 달 앞으로 성큼 다가온 여름 대회를 위해 식단 관리에 들어간 탓이었다.
4월 훈련이 가장 고된 만큼 4월호와 5월호 신문 또한 바쁘다는 걸 알기에 제네비브는 친구들을 위해 간단한 야식을 준비하고자 결심했다.
야식이라고 해 봤자 홍차는 지나치게 우린 탓에 텁텁했고, 주방에 마련된 기성품 과자는 고급 디저트에 익숙해진 이들의 입엔 싸구려와 다를 게 없었다.
제네비브가 준비한 야식을 먹을 때마다 오웬은 ‘언제나 차를 처음 우린 하녀가 만든 맛이 난다’라는 악평과 달리 그런대로 맛있게 먹었고, 블랑카는 ‘과하게 달콤한 디저트를 쓴 차가 잡아 줘서 두 맛의 조화가 의외로 잘 어울린다’라고 후하게 평가하며 남김없이 먹었다.
또 제임스는 ‘노력에 점수를 주겠다’라며 맛에는 말을 아끼는 편이었고, 제네비브는 ‘내가 만들었지만 맛이 참 쓰레기 같다’라고 박한 평가를 내렸다.
그렇게 야식 준비가 끝난 순간에 맞춰 들어온 친구들은 아니나 다를까 배고픈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제네비브. 넌 정말 귀족으로 태어난 걸 감사하게 여겨야 해.”
첫 모금을 마신 오웬이 말했다.
벽난로에 앉은 넷은 쓰레기처럼 텁텁한 향이 나는 홍차와 얼얼할 만큼 달콤한 쿠키를 먹으며 하루를 공유했다. 제네비브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후배 하나가 기사 순서를 아예 잘못 뒀더라고. 수습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니까?”
“그래도 오늘 끝낸 게 기적이지. 여태 마감일까지 글 쓰느라 바빴는데.”
오웬이 나흘 전에 마감을 끝낸 자신의 어깨를 자랑스럽게 두들겼다.
“4월 호는 이걸로 정말 끝! 다시 쓰라고 하면 신문이고 뭐고 그만둘 거야.”
블랑카는 자축의 의미로 제네비브가 만든 홍차를 마치 술처럼 들이켰다.
“나 5월호 폴로랑 조정 기사는 미리 써 놨는데. 제임스, 우승할 자신 있어?”
“네 기사 제목에 따라 다르지.”
제임스의 눈빛에 긴장이 서렸다.
“<세인트 존 칼리지의 왕자들이 또 해냈다!>인데, 어때. 우승하고 싶지 않아?”
“……기권하고 싶은데.”
제임스가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학교 내 유명 인사인 제임스는 특히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는데, 블랑카는 독자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제임스를 열심히 이용했다.
보기만 해도 오글거리는 제임스 특집을 만들거나, 제목은 <세인트 존 칼리지를 떠나는 제임스, 그에게 아름다운 이별을>이라고 해 놓고 막상 읽어 보면 제임스 카터가 아니라 제임스 콕스 교수의 정년 퇴임 소식을 전하거나 했다.
더욱이 아본리아 제국에선 결혼을 전제로 제임스를 노리는 가문이 많았기에, 제임스의 기사가 나오는 <더 칼리지>는 암암리에 거래가 자주 성사되었다.
그러니만큼 제임스의 의사가 어떻든, 그는 블랑카의 좋은 소재였다.
* * *
“달링 양, 이제 그만 오세요. 이만하면 됐습니다.”
월요일 미사가 시작되기 전, 톰슨이 제네비브에게 말했다.
“화요일에 올까요?”
“못 알아들었나요? 그만 오세요.”
“네.”
제네비브는 예의 바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톰슨의 기분 나쁜 화법보다 필사가 끝난 기쁨이 더 컸다. 그녀는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오랜만에 미사를 집중하면서 들었다.
이후, 하루는 매끄럽게 흘러갔다.
지난 2주간 의욕만 꺾이던 정치 철학 수업은 그동안 고생했다고 그녀를 위로하듯 술술 풀렸다. 브라이언 교수는 제네비브가 지각한 과제에 B를 주며, 아래로 만점을 주지 못해 아쉽다는 소감을 남겼다.
다음 수업이 없던 제네비브는 제임스를 보낸 후, 책을 느리게 정리했다.
강의실을 나가자, 에드워드가 있었다.
“여긴 무슨 일이야?”
수업이 끝나자마자 달려온 건지 앞머리가 살짝 뻗쳐 있었다. 그의 몸 또한 위아래로 작게 들썩였다.
제네비브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앞머리를 정돈해 줬다.
“……아, 미안.”
뒤늦게 무례를 깨닫곤 곧장 사과했다.
“……괜찮아요.”
잠깐 멍하니 있던 에드워드가 그녀의 사과를 받아 줬다.
“선배. 저, 통치학 과제에서 만점을 받았어요.”
이어 에드워드가 한 말은 제네비브를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정말? 너무 잘됐다!”
“선배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아니야, 네가 잘해서 받은 건데.”
제네비브가 한 일이라고는 책을 보여 준 것밖에 없었다.
“다른 책을 썼다면 그 점수가 안 나왔을 거예요.”
“네가 잘했으니까 만점을 받은 거래도. 진짜 너무 잘됐다! 오데인 교수님이 2학년한테 만점을 준 건 네가 최초일걸?”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축하해 줬다.
그게, 폭풍 전 고요인 것도 모르고.
다음 날.
세인트 존 칼리지가 뒤집혔다.
오데인 교수가 성적 조작 논란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적 수혜자는 2학년의 에드워드였다.
* * *
언제나 그렇듯 논란은 작은 의혹에서 시작됐다.
1, 2학년이 통치학에서 만점을 받은 경우는 없었다. 이는 오데인 교수가 세인트 존 칼리지에 임용되고 30년 동안 바뀌지 않은 불변의 법칙이었다.
때문에 세인트 존 칼리지를 졸업한 이들이 재학생들을 만날 때면 ‘오데인 교수는 아직도 점수를 짜게 주나?’라고 물으며 은근슬쩍 공통점을 드러내곤 했다.
학생들은 오데인 교수는 융통성이 없다거나, 팍팍하다거나, 만점을 주기 싫어서 자잘한 부분을 트집 잡는다고 욕하면서도 그가 주는 피드백을 읽으면 금방 점수에 수긍했다.
길게 이어진 밑줄과 그 아래 서너 줄의 문장은 비논리적인 부분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수용한 학생들이 3학년이 될 때 즈음, 한 해에 만점은 열 명 남짓하게 나왔다.
그러니 2학년이 통치학 과제에서 만점을 받았다는 명제는 조작한 게 아니냐는 의심의 씨앗을 심어 주기 충분했다.
처음엔 대체 과제를 얼마나 잘했으면, 하는 부러움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조작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주를 이루었다.
“정말 조작이야?”
“설마 아니겠어? 오데인 교수님이 2학년한테 만점을 줄 리 없잖아.”
소문은 입을 타고 점차 진실이 되었다.
그렇게 세인트 존 칼리지는 점차 안 좋은 방향으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군사학 수업이 끝난 제네비브가 책상을 정리할 때였다.
콕콕.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녀의 등을 누군가 펜으로 찔렀다.
“무슨 일이야?”
따끔한 감각은 제네비브를 당황스럽게 만들기 충분했으나, 그녀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친절하게 물었다.
대화를 몇 번 나눠 본 적 없는 여학생, 레일라가 친근한 장난을 친 것처럼 생글생글 미소를 지었다.
“달링, 그게 사실이야?”
“뭐가?”
“너랑 친한 2학년 말이야!”
자신과 친한 2학년이라고 하면 에드워드 하나였다. 하지만, 제네비브는 왜 레일라의 입에서 에드워드의 이름이 나오는지 알 턱이 없었다.
“설마, 모르는 건 아니지? 지금 그 일!”
레일라가 두 눈을 빛냈다. 그녀의 상기된 목소리에서 무언가 엄청난 걸 듣길 바라는 기대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제네비브는 전혀 모르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래?”
보다 못한 남학생마저 거들었다.
이름이 프레드릭이었나, 그레고리였나. 제네비브는 남학생의 이름을 기억하려 애썼다.
“무슨 소리야?”
도통 모르겠다는 어조로 되묻자, 레일라가 아쉬웠는지 입맛을 다셨다.
“뭐야, 안 알려 줬어? 창피한 건 아나 보네……. 에드윈인가? 아무튼, 걔가 오데인 교수 수업에서 만점을 받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