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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21화 (21/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21화

문은 달칵, 소리를 내며 힘없이 열렸다.

제네비브는 들고 온 등불을 높게 들어 사무실 안을 비췄다. 때아닌 논란 때문에 정리할 겨를이 없었던 건지, 책상 위는 언젠가 봤을 때와 다르게 너저분했다.

책상 위에 바로 보이는 건 오웬이 몇 주 전에 제출한 과제였다. 제네비브는 제 사촌이 D+를 받았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책상을 뒤적였다.

종이끼리 스치는 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지금껏 그 소리가 크다고 생각한 적 없었는데, 왜 들키면 안 되는 지금은 기차 화통처럼 크게 들리는지.

에드워드의 과제는 가지고 퇴근한 건지 안 보였다. 책상 위 과제는 전부 3학년 것뿐이었다. 제네비브는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렸다.

“어? 편지가…….”

책상 가장자리에 편지 꾸러미가 있었다. 오데인 교수가 구독하는 신문사에서 온 공지문,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보낸 통지문이 있었다.

제네비브는 그다지 안 궁금한 공문서를 무시하며 편지 상자를 뒤적였다.

[마를레네 오데인

빌젠가 92B]

마침내 사적인 편지가 보였다.

제네비브는 편지를 보낸 ‘마를레네 오데인’이 교수의 부인이나 딸일 거라 짐작했다.

편지 봉투에 찍힌 날짜는 며칠 전이었다. 갑자기 이사한 게 아닌 이상, 주소가 바뀔 리는 없었다.

“빌젠가 92B.”

……92B, 92B.

주소를 몇 번 되뇌며, 제네비브는 편지를 원래 있었던 곳에 두고는 연구실을 나갔다.

* * *

마구간엔 마구간지기 한 명 없었다. 마구간 안은 퀴퀴한 건초와 배설물 냄새로 가득했다. 제네비브가 지나치자 말 몇 필이 소리를 냈다.

대부분 폴로 클럽과 승마 클럽 소속 학생들의 말로, 제네비브는 익숙한 말들을 하나둘 지나쳤다. 마구간 한편에 다른 말들보다 유독 아름다운 말 한 필이 있었다. 그녀가 찾던 말이기도 했다.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족보 있는 말 사기’ 유행을 돌게 한 그녀의 말은 다른 명마들이 초라하게 보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크림색 털은 반짝반짝 윤기가 났다.

제네비브의 아할 테케가 제 주인을 보자마자 반가운 소리를 냈다.

“에인젤, 산책하러 가자.”

제네비브는 말 갈퀴를 쓸며 말을 진정시켰다. 그러곤 마구간 한쪽에 배치된 재갈과 안장을 씌운 후, 에인젤의 등 위에 올라탔다.

제네비브는 세인트 존 칼리지 정문이 아닌, 학교 초원 쪽으로 말을 몰았다.

24시간 경비가 감시하는 교문과 다르게, 민간 지역과 이어지는 학교 초원은 낮은 담장 하나만 넘어가면 됐다.

초원을 지나면 얕은 개울이 흘렀고, 뒤로 이어지는 숲을 지나고 나서야 빌젠가가 있었다.

‘길을 알아서 망정이지.’

제네비브는 오웬을 따라 몰래 외출했던 과거의 자신을 칭찬했다.

* * *

낮은 담을 넘고 30분을 더 달려서야 빌젠가에 도착했다.

제네비브는 에인젤을 펜스 한편에 묶어 두곤 타운하우스를 찾아다녔다.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반듯한 건물들이 거리에 가득했다. 유일한 차이점이라고는 작은 정원에 핀 꽃 정도였다.

빌젠가 92B.

주소를 재차 확인한 다음에서야 제네비브는 문고리를 두들겼다. 몇 번 두들기니 어두웠던 타운하우스 창문이 밝아졌다.

문이 열리고, 붉은 로브를 걸친 오데인 교수가 나타났다.

“달링 학생? 여긴 무슨 일로…….”

그가 놀란 표정으로 제네비브를 보았다.

“……일단 들어오세요.”

놀랐을지언정 손님을 밖에 두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한 그는 들어오라는 듯 문을 활짝 열어 줬다. 그제야 제네비브는 자신이 저지른 무례를 실감하며 쭈뼛쭈뼛 들어갔다.

오데인 교수의 타운하우스는 테뉴어를 받은 사람의 집이라고 하기엔 소박한 축이었다.

내부는 엄한 그의 인상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분홍색 라일락이 입구를 아름답게 장식했고, 작은 테이블 위엔 환영 과자가 무수히 쌓여 있었다.

“요제프, 누구예요?”

위에서 졸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려다보자 푸근한 인상의 여인이 느린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칼리지 학생이오.”

“브리트니에게 차를 내오라 할까요?”

갑자기 들이닥쳐 불쾌감을 드러낼 법한데도 그녀가 친절하게 물었다.

“아…… 안녕하세요. 교수님 수업을 듣는 제네비브 달링입니다.”

“반가워요. 전 마를레네 오데인이에요.”

부인 또는 딸이리라 생각했는데, 부인이었나 보다.

“뒤렝에서 왔나요? 이럴 게 아니지, 차를 내올게요. 블랜디드?”

오데인 부인이 들뜬 뒤렝어로 「아본리아에서 뒤렝 사람을 만날 줄은…….」이라고 중얼거렸다.

“아뇨, 카르디르인입니다. 차는 괜찮아요.”

제네비브는 고개를 저었다.

“학생과 이야기 좀 나누겠소.”

오데인 교수가 제네비브를 서재로 안내했다.

오데인 교수의 개인 서재는 그를 쏙 빼닮았다. 천장까지 닿는 흑단 나무 책장엔 두꺼운 책이 빼곡하게 꽂혔다. 조금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던 건지 벽난로는 활활 타올랐다. 책상 위는 종이와 빈 접시로 어수선했다.

오데인 교수는 칼리지 사무실과 비슷한, 아니, 어쩌면 더 딱딱한 의자에 앉으라 권했다.

의자에 앉은 오데인 교수는 이미 개봉된 샤르도네를 크리스털 잔에 따랐다. 알싸하고 달콤한 백포도주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한잔할 건가요?”

오데인 교수가 다소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아뇨, 괜찮아요.”

“농입니다. 그래서…… 이 밤에 제집은 어떻게, 아니. 무슨 일로 찾아왔죠?”

그가 벽난로 위 시계에 시선을 두며 물었다.

“늦은 시간 방문해서 죄송합니다.”

제네비브는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들이 <더 칼리지>를…… 그러니까, 학교 신문을 담당하는데 이번 1면에 에드워드가 쓴 과제를 인쇄해서 분위기를 전환해 보려고 해요.”

제네비브는 ‘어떻게 찾아왔는지’에 대한 질문을 자연스럽게 넘겼다. 오데인 교수가 그걸 짚지 않기를 바랐다.

“블라이스 학생과 보아르네 학생을 말하는군요.”

“네.”

제네비브는 학교에서 떠올린 계획을 설명했다. 두 번째 설명이라 그런지 더 정돈된 동시에 유창하게 나왔다.

“교수님께서 공개하실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일 것 같아서요.”

“확실히 그렇겠군요.”

“또한, 교수님의 오명도 씻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 근데, 이거 어떡하죠. 전 이번 달까지만 하고 칼리지를 그만둡니다.”

“……네?”

갑작스러운 정보에 제네비브는 당황했다.

“너무 놀랄 필요 없어요. 이 일 전에 결정된 일입니다. 원래 이번 학기까지 근무하는 거였지만…… 상황이 이렇게 보니 칼리지에선 되도록 빨리 나가길 바라더군요.”

일석이조로 기대하던 효과가 그의 퇴임과 함께 사라졌다.

에드워드의 과제를 제공해 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오데인 교수가 안 된다고 하면 방법은 없었다.

“그, 그래도…… 도와주신다면 교수님께서 누려 마땅한 존경이 가능할 거라…….”

예상하지 못한 정보 때문에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나왔다. 아첨에 재능이 없는 간신이 된 기분에 제네비브는 망했음을 직감했다.

조심스럽게 그를 보자, 오데인 교수가 흔치 않게 미소를 띠었다.

“달링 학생은 에드워드 학생을 몹시 아끼나 봅니다.”

“……네?”

제네비브는 바보처럼 물었다.

“보통 친구를 돕겠다고 야밤에 이렇게 찾아오지 않아요.”

오데인 교수가 부드럽게 일렀다.

그녀가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테이블 위 종이를 정리하며 말을 계속했다.

“에드워드 학생이 쓴 과제입니다. 주제는 <군주가 가져선 안 되는 자질> 참고 서적은…… 아이흘러의 <군주의 책임감>. 읽어 보면 훌륭한 글인 걸 알 거예요.”

“감사합니다.”

“에드워드 학생의 성적을 받아들이지 못한 학생이 많다는 건, 그만큼 제 성적 시스템에 불만을 느낀 이가 많다는 뜻이겠죠.”

“…….”

“달링 학생도 아이흘러의 책을 기반으로 과제를 제출했었죠. <권력의 시간>이었나요?”

“아…… 네.”

제네비브는 작년에 제출한 과제를 지금까지 기억하는 오데인 교수의 기억력에 감탄했다.

오데인 교수는 옅게 웃으며 정리한 에드워드의 과제를 봉투에 담아 제네비브에게 건넸다.

“조심히 들어가요. 톰슨에게 걸리지 말고.”

“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늦게 방문해서 죄송해요.”

다시 한번 무례에 사과한 다음에야 제네비브는 세인트 존 칼리지로 돌아갔다.

* * *

마구간에 에인젤을 돌려놓고 기숙사로 돌아오니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넘겼다. 제네비브는 제 방에서 오데인 교수가 알려 준 제 과제를 찾았다.

3학년 1학기에 제네비브는 딱 한 번 통치학에서 만점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가 귀띔해 준 대로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와 똑같이 아이흘러의 책을 기반으로 과제를 썼다.

‘그걸로 오데인 교수님이 아이흘러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지.’

제네비브는 과제 아래에 오데인 교수가 길게 쓴 피드백을 보며 당시를 회상했다.

평소엔 지적하기 바쁜 피드백이 ‘나도 네 해석에 동의한다’에 그치지 않고, ‘아이흘러의 이 책도 추천한다’라며 처음 들어 보는 제목을 나열하는 한편, 더 나아가 ‘이런 시각으로 읽으면 더 풍부해질 거다’라는 문장이 종이 끝까지 적혔다.

그때 제네비브는 아무 고민 없이 좋아하고, 기쁜 마음에 주변에 자랑하기도 했다.

에드워드도 그런 경험을 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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