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24화
“읽었구나.”
에드워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들고 있던 <더 칼리지> 끝이 조금 구겨졌다.
“미리 네 허락을 받았어야 했는데, 정신이 너무 없어서…… 말 못 해서 미안해.”
제네비브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이것부터 마셔요.”
에드워드가 따뜻한 꿀물을 건넸다.
급하게 꿀물을 한 모금 마신 제네비브는 마저 설명하려고 입을 뗐지만, 에드워드는 전부 다 마시고 얘기하길 바라는지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 표정에 결국 제네비브가 달콤한 액체를 꿀꺽꿀꺽 삼키자, 에드워드는 비로소 만족한 것처럼 얼굴을 폈다.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제네비브가 꿀물을 반 정도 마셨을 때, 에드워드가 담요를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덮어 줬다.
제네비브가 설명을 시작한 건, 컵이 바닥을 보이고 나서였다.
<더 칼리지>의 4월호가 발행되었다.
대부분 종이비행기 신세인 다른 달과 다르게 4월호는 독자가 많았다. 다음 달에 열리는 마이언 아카데미의 여름 대회와 관련된 정보가 담기기 때문이다.
1면에는 주로 선수 명단과 공개 훈련 시간이 적혔다. 학생들은 이를 참고하여 4월 말부터 진행되는 공개 훈련을 참관했다.
하지만, 이번 호는 달랐다.
지금까지 봐 온 <더 칼리지> 4월호와 다르게, 제목을 제외하면 1면이 빽빽한 문장으로 채워져 있었다.
[어느 게 진짜 만점일까?]
굵고 대문짝만한 제목이 이목을 끌었다. 며칠 전부터 소란스러웠던 오데인 교수 성적 조작 사건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제목 아래로 내용이 이어졌다.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오데인 교수가 1, 2학년에게 점수를 쩨쪠하게 준다는 사실을 모르는 학생이 있을까?
하지만 지난 18일(화)부터 퍼진 소문에 의하면 오데인 교수의 임용 이후 수십 년간 유지된 ‘1, 2학년은 만점을 못 받는다’는 법칙이 2학년 A학생에게 만점을 주며 깨졌다고 한다.
이로 인해 오데인 교수는 성적 조작 의혹을 받게 되었다.
아래는 신문부가 입수한 통치학 과제의 일부고, 다른 하나는 3학년 B학생이 작성한 과제의 일부다. 두 학생 모두 아이흘러의 책을 참고하여 통치학 과제를 작성했고, 두 사람 모두 만점을 받았다.
하지만 이 중 하나만이 ‘논란’이 된 과제이다.
과연, 어떤 게 조작이 아닌 정말 만점을 받은 과제일까?
※이하 오타와 오류는 그대로 옮겼음을 밝힙니다.]
처음엔 안 궁금하다며 공개 훈련 일정을 찾아보려던 학생들조차 곧 글에 빠져들었다.
두 과제 모두 첫 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다음 줄을 찾게 됐다. 높은 가독성과 흥미로운 구성은 아이흘러라는 낯선 사상가를 다루고 있음에도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
글이 별로거나 여느 과제와 다를 것 없이 평범했더라면 자연스럽게 <더 칼리지> 3면에 있는 선수 정보와 공개 훈련 시간을 찾아봤겠지만, 첨부된 과제는 빼어날 정도로 수려했다.
‘그래서 어떤 게 가짜인데?’
자신은 2학년이 쓴 과제를 바로 찾아낼 수 있다고 자신감 있게 말한 이들 모두 백기를 들었다.
[진짜 만점은 점심시간, 신문부 게시판에서 공개합니다.]
궁금한 마음에 마지막 줄까지 읽었더니, 사람을 약 올리는 문장이 그들을 기다렸다.
“어떻게 된 건진 알겠어요.”
에드워드가 천천히 말했다.
“근데, 이건…….”
“맞아. 두 개 다 네 과제지.”
제네비브가 신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읽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면, 두 글 모두 에드워드의 과제라는 점이다.
제네비브는 어젯밤, 오웬이 건넸던 제안을 다시 상기했다.
‘……전부 에드워드의 과제를 싣자고?’
‘응. 마침 10페이지부터 중점이 달라지니까, 이러면 다른 사람이 쓴 글이라고 하면 속을 거 같은데.’
‘하지만, 의도한 게 걸리면?’
제네비브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실수인 척해야지.’
오웬의 계획을 파악한 블랑카가 대신 설명했다.
‘의도한 게 아니라, 실수한 것처럼 말하는 거야. 원래는 정말 A학생의 과제를 실을 예정이었는데 급하게 마감하느라 실수로 두 개 다 에드워드의 글을 실었다고 말이지.’
제네비브는 이 계획을 간추려 설명했다. 물론, 원본을 받기 위해 오데인 교수를 찾아 빌젠가까지 갔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아꼈다.
“……정말 효과가 있을까요?”
에드워드의 물음에 제네비브는 잠깐 침묵을 유지했다.
솔직히 말해서 여론을 조작해 보는 건 그녀로서도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제네비브가 무작정 실행한 이유는―.
“응.”
“…….”
“너를 믿으니까.”
에드워드의 글이라면 모두가 인정할 거라고 믿었고, 무엇보다 그가 조작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사람이 아니란 걸 믿었다.
“점심 지났으니까 볼 사람은 다들 봤을 테니, 한번 보러 갈래?”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제네비브가 꿀물을 다 마셨을 때 즈음, 그녀의 얼굴에 다시 혈색이 돌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오길 바랐는데, 그녀는 30분도 채 되지 않아서 휴게실로 내려왔다. 여전히 조금 창백한 제네비브를 보며 에드워드는 꿀물을 미리 준비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제네비브는 설명하면서도 자신의 눈치를 보았다. 말 중간마다 ‘미안’이라고 말했으니까. 언질 없이 이용한 건 당황스럽지만, 이렇게까지 미안할 필요는 없는데.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부분은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찰스와의 펜싱 이후 자신이 내뱉었던 반응이 지금까지 남은 게 아닐까.
이후, 에드워드는 제네비브를 따라 기숙사 건물을 나왔다. 다들 교복 차림인 상태에서 사복을 입은 둘이 복도를 걸으니 이목이 집중되었다.
사실 에드워드는 이 일에 회의적이었다. 정말 잘 해결될까? 그저 자신을 위해 준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얻을 뿐이다.
“과제, 정말 잘 썼더라.”
“상대가 오데인 교수잖아. 그 정도는 써야 2학년이 만점을 받을 수 있구나…….”
“…….”
그랬기에, 이런 뜻밖의 반응을 듣자니 얼떨떨했다.
벌써 몇 번째 듣는 말인지 모르겠다. 지나치는 사람마다 그를 힐끔 쳐다보며 말을 얹었다. 혐의가 씻겨진 건 물론이고, 오히려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
에드워드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날아갈 듯 기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몰랐다.
어안이 벙벙해진 에드워드는 앞장선 제네비브를 바라보았다. 신문부실 앞 게시판엔 거대한 글씨로 <정정문>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었다.
내용은 이랬다.
급하게 A학생의 과제 원본을 입수하고, 마감 시간에 맞춰 급하게 편집한 나머지 과제가 섞인 줄 모르고 두 개 다 A학생의 글을 싣게 되었다. 더불어 첫 번째 줄에 ‘쩨쩨하게’를 ‘쩨쪠하게’로 오타를 내서 정말 죄송하다…….
뒤집어 말하면 ‘A학생이 과제를 너무 잘 써서 진짜 만점인 줄 알았다’가 된다. 그리고 그 암시를 위해 세 사람은 이틀 내내 머리를 맞댔다.
“잘됐지?”
제네비브가 뿌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대체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돕는 걸까.
“제네비브~ 봤어?”
끼익.
그때, 신문부실 문이 열리고 오웬이 나왔다.
“오. 후배님도 왔네? 일 진짜 잘 풀렸지? 아직 분위기 잘 모르려나?”
오웬이 유독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분위기가 사라진 걸 느끼긴 했지만, 에드워드는 오웬이 말한 ‘진짜 잘 풀렸지?’를 아직 실감하지 못했다.
“너, 수업은?”
“제임스가 나랑 너랑 블랑카, 병결 처리해 줬어.”
제네비브가 대답을 듣곤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신에게 ‘계획’을 설명하다가도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는데, 출석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오웬은 두 사람을 반기며 신문부실 소파에 앉았다. 신문부실은 본래의 모습을 유추할 수 없을 만큼 어질러져 있었다.
제네비브와 앉은 소파 맞은편엔 한 사람이 등진 채 자고 있었는데, 에드워드는 뒤늦게 그 사람이 블랑카라는 걸 알아챘다.
긴 테이블은 깨끗한 곳 하나 없이 온통 너저분했다.
동그랗게 구긴 종이 뭉치가 있는가 하면 잉크로 축축하게 젖은 노트도 보였다. 북북 찢은 종이가 아무렇지 않게 굴러다녔다. 그리고 종이는 대부분 맨 위에 <정정문>이라 적혀 있었다.
에드워드는 가장 가까운 종이 하나를 펼쳐 읽었다. 제목은 정정문. 내용은 게시판에 붙은 것과 비슷했지만, 크고 작은 어감 차이가 존재했다.
“……아, 그거. 밖에 있는 거랑 얘 사이에서 엄청 고민했지. 결국, 최종본은 밖에 붙인 거지만.”
오웬이 지금 에드워드가 읽은 게 후보 시안 중 하나라고 얘기했다.
“그건 제임스가 너무 가르치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그런가요.”
“학생들이 틀렸다고 말해선 안 되니까. ‘우리’가 틀린 데 사과하면서 학생들 스스로가 틀린 걸 깨닫게 해야 했거든.”
오웬이 귀족들의 드높은 자존심을 설명해 줬지만 깊게 와닿진 못했다. 에드워드는 그저 귀족들은 참 복잡하게 산다는 감상과 함께 주변을 둘러봤다.
책상 옆에 폐지처럼 묶인 <더 칼리지> 4월호가 있었다. 하지만, 기숙사 휴게실에서 본 것과 달랐다. 에드워드의 과제 옆에는 정말 다른 사람이 쓴 과제가 인쇄되었다.
“그건 잠깐 시험 삼아서 인쇄한 거야. 누구누구 씨 덕분에—.”
제네비브가 오웬 쪽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이어 갔다.
“—40부가 인쇄됐지 뭐야? 그리고, 옆에 있는 건 내가 쓴 과제야.”
제네비브가 작은 미소를 띠며 오른쪽 글을 가리켰다.
에드워드가 읽으려 하자, 제네비브가 부끄러운 듯 그를 막으려 했다. 몰래 읽은 첫 번째 단락은 제네비브가 왜 못 읽게 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나무랄 곳 없이 깔끔하게 잘 쓴 글이었다.
노끈으로 묶인 <더 칼리지> 옆에는 또 다른 버전의 4월호가 있었다. 제목은 <어느 게 진짜 만점일까?>가 아닌 <세인트 존 칼리지를 빛낸 학생들>이었다. 에드워드는 그게 최종본 3면에 있는 제목과 같다는 걸 눈치챘다.
“일단, 반응이 좋아. 우리가 바라던 것보다 훨씬.”
오웬은 이를 보이며 웃었다.
웃기지도 않은 ‘논란’이 살이 붙어 과장된 것처럼 에드워드의 ‘결백함’도 살이 붙었다고 한다.
“소문이 시작된 출처를 찾는 애들도 있다더라. 뭐 눈엔 뭐밖에 안 보인다나 뭐라나? 알고 보니 소문을 퍼트린 사람이 수혜를 받은 게 아니냐며—.”
하지만 세인트 존 칼리지는 새로운 소문이 퍼지는 걸 막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중잣대는 어쩌면 제 신분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어찌 되었든, 에드워드는 고마웠다.
그동안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 준 사람은 없었다. 최상의 결과를 위해 그들이 겪은 노력과 시행착오를 두 눈으로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