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26화
그에겐 평균 속도일지 몰라도 넓은 보폭이 반복되니 따라가기 벅찼다.
숨을 너무 크게 헉헉거린 건지, 에드워드가 뒤를 돌아봤다.
“허억……. 운동 부족이야…….”
“맞춰 걸을게요.”
“흐억, 고마워…….”
에드워드는 얘기한 대로 속도를 줄였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진정할 때 즈음, 에드워드가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가 제네비브를 데리고 온 곳은 호수 주변의 언덕이었다. 연두색으로 자란 잔디는 햇빛을 받아 따뜻했다. 언덕 중간에 자란 나무는 서늘한 그늘을 제공해 줬다.
왜 여태까지 이런 곳을 몰랐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평화로운 곳이었다. 다만, 경사가 조금 가팔랐던 탓에 에드워드처럼 쉽게 올라오기 어렵긴 했다.
지친 제네비브가 무릎에 손을 대고 가쁜 숨을 고르자, 시야에 큰 손이 보였다.
에드워드가 마치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여기가 잘 보여요.”
제네비브가 에드워드의 손을 맞잡았고, 그는 손쉽게 그녀를 제 쪽으로 당겼다.
햇빛을 받은 호수는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호수 위로는 기다란 흰색 배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잔상처럼 들리는 환호성은 세상과 동떨어진 평온한 기분을 안겨다 주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볍게 간지럽혔다.
“예쁘다.”
제네비브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말했다.
“그러네요.”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아침마다 조깅 하는 곳이 이 주변이야?”
제네비브가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눈에 담은 채 물었다.
“네. 숲 주변이라 공기가 맑아서 좋아요.”
“매일 조깅 하는 것도 대단해. 나는 상상만 해도 힘들어서 못 하겠던데. 대체 어떻게 아침마다 하는 거야?”
칭찬을 들은 에드워드의 귀가 붉게 타올랐다. 그가 귀 끝을 붉힌 채 겸손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네.’
소설 속에서 자신을 칭송하는 타인의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그 남자가 맞나 싶다.
제네비브는 다시금 시선을 호수로 돌렸다.
“어, 저기 제임스다.”
“어디에요?”
“저기 맨 앞에…… 보여?”
제네비브가 꿀벌색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제임스! 잘해라!”
제임스가 있는 방향으로 손을 흔들었다. 이 거리에서 보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제네비브는 가까이서 호응하는 것처럼 추임새를 넣었다.
이후 공개 훈련이 시작되었는데, 무슨 일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속도를 내던 배들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봐요.”
“그러게.”
곧 시작하리라는 예상과 다르게 시간이 걸리자, 제네비브는 잡담을 시작했다.
“마이언 아카데미는 기대돼?”
역시 대화하기 가장 편한 주제는 마이언 아카데미였다. 제네비브는 무난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에드워드는 그 질문에 골머리를 앓는 눈치였다.
“……출전은 처음이라 잘 모르겠어요.”
고르고 골라 내놓은 답은 투박했지만, 그의 목소리 때문인지 섬세하게 와닿았다.
“별건 없어. 마이언 아카데미도 결국엔 학교잖아. 네 말대로 첫 출전이니까,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 가는 데 열차로 사흘 정도 걸리고…… 역에서 내릴 수 있을 때 웬만하면 내리는 게 좋아. 열차 안에만 있는 것도 은근 스트레스 받거든. 취미 생활 하나 챙기는 것도 좋고. 참고로 난 독서야.”
그걸 시작으로 제네비브는 타국 역에서 기차를 놓친 졸업생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그랜드 익스프레스에 대한 사소한 정보들까지 알려 줬다.
“이미 알고 있는 얘기일까?”
“몰랐어요.”
아는 체하는 것처럼 들리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에드워드는 고맙게도 걱정을 덜어 줬다. 그간 열차를 타도 방 밖으로 나가지 않은 모양이다.
“식당 칸 음식은 다 맛있어. 근데, 귀찮을 수 있으니까 트롤리 직원께 주문해도 괜찮아. 음…… 또 뭐가 있지…….”
“괜찮다면…… 선배가 안내해 주세요.”
“아, 그러면 되겠다! 메뉴 선정은 나한테 맡겨.”
제네비브는 흔쾌히 수락했다.
때마침 경기가 재개되었다. 제네비브는 유독 이번 공개 훈련이 빨리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느낀 대로, 조정 팀은 새로운 신기록을 세워 트로피를 향한 기대를 높였다.
“카터 선배와 대화는 안 하세요?”
에드워드가 그냥 지나치는 제네비브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추종자들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제네비브는 끝날 때를 맞춰 제임스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가 사랑에 빠진 여학생들 사이에 둘러싸인 걸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덧, 마이언 아카데미로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 * *
아본리아 제국엔 기차역이 두 개다.
하나는 종착역인 리스톨(아본리아 제국 수도)에 있고, 다른 하나는 빌젠가 부근에 있다. 덕분에 몇몇 칼리지 학생은 주말마다 일반 열차를 타고 수도에 다녀오곤 했다.
“전부 해서 11루오르 2운트입니다.”
“수고하세요.”
제네비브는 기차역 주변 서점에서 통속 소설 몇 권을 준비했다. 점원에게서 책을 받자마자 누가 볼세라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에드워드에겐 고상하게 ‘독서’라고 소개했지만, 그녀가 읽는 건 철학서나 고전 소설이 아닌 각종 막장 전개를 자랑하는 통속 소설이었다.
들고 온 자그만 가방 안엔 옷 몇 벌과 책이 전부였다. 여름 대회가 열리는 일주일 동안 필요한 건 보아르네 가문이 준비해 줬기에 어떻게 본다면 당연했다.
이처럼 평민 출신과 귀족 출신 학생들은 들고 있는 짐의 부피만으로 분별할 수 있었다. 하여 학생들은 제 것보다 큰 가방이 지나갈 때마다 미묘한 눈빛을 교환했다. 직접 언급하진 않으나, 그렇다고 옳은 건 아니었다.
‘귀족식 따돌림은 이쪽에 더 가깝지.’
어찌 보면 나서서 에드워드를 괴롭히는 찰스 무리가 신기할 정도다.
대다수 귀족은 애매함을 무릅쓰고 상대가 따진다면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라고 무안을 줄 수 있는 은근한 무시 방법을 선호했다.
이번에도 찝찝한 분위기를 읽은 제네비브는 그게 누군지 알아보려 했지만, 혼잡한 역에서 모두의 시선을 받아 내는 주인공을 알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랜드 익스프레스의 앞부분과 뒷부분은 침실 칸이다. 교수진과 3학년은 앞 칸 특실에, 1학년과 2학년은 뒤 칸 특실에 머물렀다. 일반 열차보다 가로 폭이 넓은 덕에 객실은 여느 호텔 못지않은 시설을 자랑했다.
제네비브는 객실을 둘러보았다. 3학년이 되며 방이 훨씬 고풍스러워졌다.
바닥에는 두꺼운 연갈색 러그가 깔렸다. 입구엔 제 발에 꼭 맞는 실내화가 준비되어 있었다. 작은 테이블 사이에 진한 녹색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대리석 테이블 위엔 환영 카드와 함께 달콤한 초콜릿이 든 상자가 있었다.
제네비브는 초콜릿 한 알을 입안에 넣어 녹이며 창밖을 구경했다.
길게 자란 나뭇가지가 창문에 달라붙었다. 넓은 창문 맞은편에는 바깥 경치를 구경할 수 있는 흰색 카우치가 있었다.
두 명이 누워도 자리가 남을 법한 커다란 침대 위엔 푹신한 베개들이 가지런히 놓였다. 객실 입구 왼편엔 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제네비브는 그곳이 욕실인 걸 쉬이 알아챘다.
객실 배치도도 괜찮았다.
제네비브의 맞은편엔 블랑카가 머물렀고, 왼쪽 객실은 이제는 폴로 클럽 주장이 된 캐럴이 지냈다. 오른쪽 객실의 레일라가 조금 껄끄러웠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카우치에 앉은 제네비브는 가방에서 귀마개를 꺼냈다. 긴 기차 여행을 버티게 해 주는 그녀만의 멀미약이었다.
제네비브는 열차에 적응하지 못하는 축에 속했다. 호화로운 열차에 걸려 있는 방음 마법은 이상하게도 그녀에겐 영 효과를 내지 못했다. 때문에, 제네비브는 사흘간 열차가 내는 소음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귀마개를 한 제네비브는 이제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바퀴 굴러가는 소리는 한 시간가량 들으면 적응이 되지만, 출발할 때마다 울리는 기적 소리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기적 소리가 운행의 시작을 알렸다. 아무리 차단해도 틈 사이로 들어오는 소음이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나아가는 열차에 맞춰 창문의 풍경은 서서히 바뀌었다. 인상을 찌푸린 제네비브는 기적 소리가 끝난 걸 확인하고서야 귀마개를 뺐다.
“이번에도 소용이 없어?”
어느새 객실 안으로 들어온 블랑카가 큰 소리로 물었다.
“깜짝이야. 언제 들어온 거야?”
“노크했는데도 대답이 없길래, 또 방음 마법이 소용이 없나 보다~ 싶었지.”
“정말 슬프게도 제대로 추측했어.”
제네비브는 한숨을 쉬었다.
다른 친구들은 호텔 라운지만큼 고요한 열차를 홀로 시끄럽게 여기는 제네비브를 온전히 공감하진 못했지만, 그들 나름대로 신경을 써 줬다.
“책 보러 왔어?”
제네비브가 물었다.
“책이라니. 또 산 거야?”
책을 피해 소파에 앉으며 블랑카가 물었다. 타박하는 어투와 달리, 그녀는 상당히 신중하게 책 한 권을 골라 펼쳤다.
“읽으면 시간이 빨리 가잖아.”
제네비브가 어깨를 으쓱였고, 블랑카는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네비브의 객실에 자주 방문하며 블랑카 역시 통속 소설의 맛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