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27화
제네비브가 <루젠 부인의 비밀>을, 블랑카가 <은밀한 트로이의 사생활>의 도입부를 읽기 시작할 때쯤 누군가 객실 문을 두들겼다.
방음 마법이 안 듣는 탓에 소리를 못 들은 제네비브는, 블랑카가 침대를 향해 서둘러 책을 내던지는 걸 보며 제 책을 소파 아래에 숨겼다.
소파 아래로 보이는 책 끄트머리를 발로 집어넣으며 제네비브는 문을 열었다. 객실 문이 열리자 에드워드가 보였다. 사복 차림인 저들과 달리, 그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어머, 에디~!”
그를 가장 먼저 반긴 건 블랑카였다.
오웬이나 할 법한 과장된 환영과 늘어지는 말꼬리를 들으며 제네비브는 질색하는 눈으로 친구를 쳐다봤다.
“둘이 선약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내가 끼어들었네.”
문장 자체는 이상한 게 없었지만, 은근 긁는 말투가 거듭 오웬을 연상시켰다.
자신을 놀리는 주제가 ‘테오도르’에서 ‘에드워드’로 넘어가자 제네비브는 곤란했다. 친구들끼리야 서로 놀려 먹는 게 일상이 되어 아무렇지 않다고 해도, 에드워드는 제삼자 아닌가.
“블랑카. 혹시, 오웬이랑 연애하는 거야?”
흐뭇한 미소로 에드워드를 반기는 블랑카를 촉촉한 눈으로 보며 제네비브가 물었다.
한동안 지나치게 우려먹어 꺼낼 일이 없다고 생각한 소재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
제네비브는 호쾌한 미소가 걸린 블랑카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지는 진귀한 모습을 보았다.
“오웬이랑 연애라니!”
경악한 목소리를 시작으로 블랑카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아깝지 않아? 진저, 내가 정말 오웬이랑 연애하길 바라는 거야?”
“……이따가 올까요?”
에드워드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제네비브는 고개를 저어 에드워드의 걱정을 덜어 줬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같이 클럽 활동하다 마음도 맞고 그러는 거지. 원래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잖아? 난 에드워드 열차 투어 시켜 주고 올게.”
오웬과 자신이 연애하는 걸 상상한 건지 블랑카가 작게 ‘우욱’ 하며 토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곤 빨리 나가라는 것처럼 손사래를 쳤다.
제네비브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후, 에드워드를 데리고 객실 밖으로 갔다.
“……찮을까요?”
에드워드가 걱정하는 어조로 무언가를 말했다.
“응? 뭐라고?”
하지만, 제네비브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에 묻혀, 소리가 뭉개져 들렸다.
에드워드가 제 상황을 모른다는 걸 떠올린 제네비브가 급하게 덧붙였다.
“내가 방음 마법이 잘 안 듣는 체질이라— 잘 안 들려. 그래서 열차에선 좀 크게 말해 줘야 들을 수 있어.”
“네!”
에드워드가 우렁차게 외쳤다.
전과 비교하면 뚜렷하게 잘 들렸지만, 문제가 있다면 기차 소리에 묻혀 다른 소리가 잘 안 들리는 제네비브의 귀마저도 먹먹해질 정도로 소리가 컸다는 거다. 큰 소리에 놀란 캐롤 객실 문을 열고 뛰쳐나왔을 만큼.
“……소리를 조금 줄여도 괜찮을 것 같아.”
다시 객실 안으로 들어가는 캐롤을 보며 제네비브가 말했다. 에드워드가 민망하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요?”
“…….”
음량을 줄일 거라는 생각과 달리, 에드워드가 귓속말하듯 가까이 다가왔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갑자기 좁혀진 거리에 제네비브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보통은…… 아니야, 너 편한 대로 해.”
제네비브는 목소리를 지금보단 더 키워도 된다고 말하려다가, 아까 같은 상황이 반복될까 봐 에드워드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의 숨결이 닿은 제 목을 몇 번 쓸었다.
* * *
열차 투어는 평범했다. 솔직히 말해서 투어라고 할 만한 일도 없었다.
그랜드 익스프레스는 일반 열차와 다르게 파인트리 서클 전용 기차였기에 일등석과 일반석 사이를 오가며 비교하는 재미가 없는 편이었다.
제네비브는 학년에 상관없이 섞여 드는 공용 칸에 들어가 보려 했지만, 찰스 패거리가 공용 칸을 차지한 걸 보고는 미련 없이 지나쳤다.
그나마 볼만했던 건 천장 전체가 유리로 된 온실 칸이었다.
보기 드문 열대 식물이 즐비한 이곳은 겨울엔 발 디딜 곳이 없을 만큼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따뜻한 햇볕이 쬐는 5월엔 찜통 속을 걷는 경험을 선사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호화로워지는 방도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3년 내내 같은 열차만 열 번 넘게 탄 제네비브는 이마저도 지루했다.
그나마 재미를 느낀 부분은 열차 칸을 지나갈 때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기차 이곳저곳을 바라보는 에드워드의 반응이었다.
에드워드는 이 모든 게 마냥 즐거워 보였지만, 제네비브는 자신이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휴게실 칸이야.”
둘은 결국 휴게실 칸에 앉았다.
푹신한 소파와 낮은 테이블이 즐비한 칸 한가운데엔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고, 앞쪽으론 음식을 주문하는 곳이 있었다.
만약 방음 마법이 제네비브에게도 제 역할을 해냈더라면 그녀는 간식을 주문하고, 1학년 여학생이 자랑스럽게 연주하는 피아노의 감미로운 선율을 배경 음악 삼아서 에드워드와 도란도란 담소를 나눴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짜증 나리만큼 반복되는 소음은 그런 생각을 방해했다.
‘에드워드…… 미안하다.’
처참한 투어 수준에 제네비브는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선배, 저기 좀 봐요.”
에드워드가 창밖을 가리켰다. 제네비브는 그가 가리킨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
창밖으로 붉은 튤립밭이 넓게 펼쳐졌다. 바람에 따라 좌우로 흔들리는 튤립은,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열차 소음과 제법 어울렸다.
덜컹, 덜컹.
바깥바람이 거세게 분 건지 붉은 꽃잎이 허공 사이로 살랑거렸다.
제네비브는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얼굴과 가볍게 부딪혔다. 숨을 깊게 쉬자 싱그러운 튤립 향이 났다. 미소가 절로 나왔다.
덜컹, 덜컹.
연주되는 줄 몰랐던 피아노 선율 소리가 들렸다. 바람을 충분히 맞고서야 제네비브는 창문을 닫았다.
소리가 어느 정도 줄어들었을 때, 에드워드가 입을 열었다.
“예쁘죠?”
덜컹, 덜컹.
창문에 붉은 꽃잎이 달라붙었다. 제네비브가 창문에 붙은 꽃잎을 콕 찌르자, 꽃잎이 하늘로 날아갔다.
제네비브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튤립밭을 감상하던 제네비브의 시선은 이제 에드워드에게 향했다. 갈색 눈이 차분하게 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저에게 꽂힌 시선을 눈치챈 연갈색 눈이 천천히 움직여 제네비브를 보았다.
덜컹, 덜컹.
그렇게, 열차는 튤립밭을 벗어났다.
* * *
그 뒤로도 에드워드는 중간중간 제네비브에게 창밖을 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할 때면 제네비브는 지난 3년간 놓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역할이 바뀌었다. 열차를 설명하는 사람이 에드워드, 그의 설명을 들으며 구경하는 사람이 제네비브가 됐다.
한 번은 전에도 봤었을 풍경임에도 감회가 남달랐다. 그게 어떤 의미로든.
제네비브는 열차 소음 때문에 그동안 바깥 풍경을 감상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과 이전은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열차는 매한가지로 덜컹거렸고, 방음 마법은 여전히 들지 않아 소리는 여전히 그녀의 신경을 살살 긁었다.
“왜요?”
“그냥. 고마워서.”
하지만 달라진 부분은 확연히 보였다. 제네비브는 고개를 저은 후,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푸르렀던 하늘은 이제 조금씩 주황색으로 물들어 갔다. 해는 만년설로 뒤덮인 봉우리 뒤로 빛을 거두고 있었다. 이것도 에드워드가 알려 주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풍경이다.
“이런 건 어떻게 알았어?”
제네비브가 물었다.
잠깐 우물쭈물하던 에드워드가 주머니에서 책자를 꺼냈다.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의 첫 장엔 낯선 로고가 찍혀 있었다. 표지엔 <드레이먼 열차를 탑승하기 전에 알아 두면 좋은 명소들>이라고 적혔다.
“역 주변에 있길래 가져와 봤어요. 내일 점심엔 사파이어 숲이 보인다고……. 근데, 그랜드 익스프레스가 드레이먼 열차보다 빨라서 새벽에 지나칠 것 같아요.”
에드워드가 일반 상업용 열차의 회사명을 느리게 읽는 제네비브를 보며 말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휴게실 칸에 있던 둘에게 다가온 건 열차 승무원이었다.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중년 남자가 모자를 살짝 내리고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제네비브 달링 양과 에드워드 군이 맞으실까요?”
“네.”
제네비브가 대답했다.
“대화 중에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는 마커스입니다. 객실 안에 안 계셔서 부득이하게 찾아왔습니다. 저녁 식사는 언제로 하실 건가요? 시간은 여섯 시, 여덟 시, 아홉 시 반이 있습니다.”
승무원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친구분들과 같이 드실 건가요?”
에드워드가 물었다.
“아니. 블랑카는 여덟 시에 먹고, 오웬이랑 제임스는 좀 더 늦게 먹는 편이야. 나는 일찍 먹긴 하는데…… 솔직히 몇 시든 상관없어. 에드워드, 너는 언제가 편해?”
“저는…… 여섯 시요.”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그래? 그럼 나도 여섯 시에 먹어야겠다! 여섯 시에 두 개 주세요.”
제네비브가 대답하자, 직원은 펜으로 자그만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은 뒤 두 사람에게 건넸다.
작은 갈색 종이 위에 펀치 홀이 뚫렸고, 그 사이로 얇은 끈이 팔찌처럼 매듭이 지어졌다. 종이 위엔 둘의 이름과 시간이 (G. 달링, 6시) 휘갈겨 적혔다.
에드워드는 제네비브가 식권을 손목에 거는 걸 보며 그녀를 따라 했다. 손쉽게 식권을 손목에 건 제네비브와 다르게, 에드워드는 식권을 걸려고 낑낑댔다.
“그건 이렇게 하면 돼.”
제네비브가 끈 한쪽을 당기자, 길이가 조절되었다.
“식당 칸은 이용 안 해 봤어?”
에드워드는 제 손목에 달랑거리는 식권을 어색하게 바라보며 끄덕였다. 제네비브는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