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30화
* * *
철로에서 하루가 더 지나갔다.
그동안 그랜드 익스프레스는 중간에 두 번 정차했고, 제네비브는 그때마다 땅이 주는 고요함을 만끽했다.
열차에 다시 발을 들이고 싶지 않다고 말하자, 블랑카는 ‘열차를 놓친 학생’을 새로 갱신하고 싶냐며(참고로 마지막으로 열차를 놓친 사람은 16년 전에 졸업한 ‘로만 코즐로프’라는 외국인 학생이었다) 그녀를 나무랐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기차에 탄 제네비브는 지루할 때면 에드워드가 준 책자를 참고하며 밖을 구경했다.
창문 밖에 펼쳐지는 자연 경관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제네비브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에드워드와 함께 본 튤립밭이었다.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 제네비브는 신께 감사 인사를 올렸다. 아침을 먹고선 객실로 돌아가 재빨리 가방을 정리했다.
―그랜드 익스프레스의 기장, 네이선이었습니다.
중후한 기장의 목소리가 여행의 끝과 시작을 알렸다.
기차역은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담장을 타고 올라온 덩굴에 화이트 심포니가 피었다. 향긋한 꽃내음에는 마법이라도 걸린 건지, 향을 맡기만 해도 여행으로 무거워진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화사한 환영은 누구에게나 좋은 인상을 심어 주는 법. 학생들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마이언의 풍경에 넋을 잃었다.
물론 아름다운 것을 봐도 처음 본 티를 내선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자란 학생들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매년 마이언 제국에 방문하는 제네비브가 보아도 풍경은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이언 아카데미에서 준비한 마차는 조금 달려,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와…….”
기차역에선 어떻게서든 감탄을 참던 이들마저도 마이언 아카데미의 교정을 보자마자 속절없이 찬탄했다.
마이언 아카데미는 모든 면에서 세인트 존 칼리지와 상반되었다. 묵직하고 고풍스러운 세인트 존 칼리지와 다르게, 마이언 아카데미는 우아하고 섬세했다.
‘볼 때마다 적응 안 되네.’
제네비브는 몇 세기 전에 지어진 신전 계단을 올라가며 생각했다.
신전 앞 정원은 기차역과 똑같이 아름다운 흰색 장미가 한가득 피었다. 계획이라도 한 것처럼 하늘엔 새가 지저귀고, 이곳저곳 나비가 살랑거리며 날갯짓을 한다.
하지만, 마이언 아카데미를 마냥 밝고 아름답게만 볼 순 없었다. 한때 신을 모신 장소가 주는 위압감은 지나칠 정도로 컸다. 없는 신앙심을 샘솟게 하는 외관은 몸가짐마저 조심하게 만들었다.
말해도 괜찮은 건가?
신성 모독으로 잡혀가지는 않을까?
모두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짧은 감탄 뒤로 고요함이 찾아왔다.
“저기 위에 있네.”
“애~ 들아~.”
물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다.
침묵을 깨트리다 못해 박살 낸 건 오웬과 제임스였다. 그 옆엔 어쩌다 합류한 건지 모를 에드워드도 있었다.
오웬은 당당하게 인파를 파고들며 앞으로 나아갔고, 제임스는 옆으로 물러서는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듯 연신 고갯짓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아직 상황 파악을 끝내지 못한 에드워드는 의아한 눈으로 트렁크 가방을 들고 제임스의 뒤를 쫓아갔다.
그 떠들썩한 소리는 공기 중에 맴돌던 긴장감을 사라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에드워드가 헤매길래.”
학생들을 비집고 계단을 두 개씩 뛰어 올라온 제임스가 말했다.
“이럴 때 쓰라고 선배가 있는 거 아니겠어?”
오웬이 에드워드의 어깨를 친근하게 치며 말했다. 또래 간 접촉이 어색한지 에드워드는 피하려는 것처럼 어깨를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신전 위로 완전히 올라온 그들을 기다린 건 마이언 아카데미의 교장이었다. 푸근한 인상의 교장은 마이언이 사람이 된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백금색 머리카락을 멋들어지게 넘긴 교장이 푸른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마이언 아카데미의 교장, 다비드 리옹입니다. 부디 계시는 동안 집처럼 편하게 지내시길 바라요. 그리고 오늘 저녁에 만찬이 있으니…….」
리옹 교장은 깔끔한 목소리와 완벽한 공용어로 학생들을 맞이했다. 그에게서 인간적인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좋으신 분 같아요.”
그 친절한 인사말을 들은 에드워드가 말했다.
“괜찮은 분이지.”
하지만, 제네비브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옹 교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날 떨어트린 학교…….”
제네비브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네?”
“응? 아, 별거 아니야. 들어가자.”
마이언 아카데미에 온 제네비브의 감상평은 언제나 이러했다.
세인트 존 칼리지에 적응한 지금에야 마이언 아카데미가 와 달라고 빌어도 갈 생각이 없지만, 자신을 거절한 곳이라는 기억이 남아 유치해지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제네비브가 마이언 아카데미에게 품은 악감정과 별개로 리옹 교장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직접 학생들이 일주일간 머물 별관으로 안내했다.
사실 말이 별관이지, 생긴 거나 규모로나 봐도 호텔에 가까웠다.
절제된 본관과 다르게 별관은 사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천장화는 성전의 한 부분을 그대로 재현했다. 벽은 조각이 안 된 면을 찾기 어려웠고, 여러 유명 예술가의 작품이 곳곳에 즐비했다.
“에드워드 님. 가방을 옮겨 드리겠습니다.”
미리 학생들의 얼굴을 익힌 직원이 다가와 에드워드의 가방을 받아 갔다.
‘작년보다 더 많아진 것 같은데?’
그리고 제네비브는 두 배로 늘어난 예술품을 보며 원작 속 에드워드가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는 걸 떠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에드워드는 다소 들뜬 표정으로 눈을 바쁘게 굴렸다. 느긋하게 관람하고 싶은 마음과 사람들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충돌한 듯 걸음을 옮기면서도 눈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거대한 대리석 계단을 오르다 보면(승강기도 있긴 하지만, 줄이 긴 터라 계단을 이용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방이 나왔다.
3층 로비를 기준으로 오른쪽 복도는 남자 숙소였고, 왼쪽 복도는 여자 숙소였다.
같은 층이라 하더라도 품위를 중시하는 귀족 학생들이 소위 말하는 ‘부적절한 짓’을 하면 꼬리표처럼 쫓아다닐 테니, 알아서 몸을 사릴 거라는 생각이 들어간 배치였다.
“만찬 때 보자.”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에게 가볍게 인사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숙소는 1인실이었다. 방에서도 손님들에게 최고만을 대접하겠다는 마이언 아카데미의 의지가 돋보였다.
타교 학생뿐만 아니라 대륙 곳곳에서 온 귀족들이 머무는 곳이기도 했으므로, 방은 제한된 선에서 최대한의 화려함을 지녔다.
응접실 한가운데에는 미리 도착한 시종 한 명과 하녀 세 명, 그리고 수십 개에 달하는 선물 상자가 있었다. 보낸 이는 역시나 보아르네 가문이었다.
“헤르멜!”
“달링 아가씨, 오랜만입니다.”
헤르멜이 마이언 발음이 살짝 섞인 제국어로 제네비브를 반겼다.
“그동안 잘 지냈어?”
제네비브가 미소를 띠며 물었다.
헤르멜은 보아르네 가문의 사용인으로, 제네비브가 마이언 제국에 방문할 때마다 그녀의 편의를 봐줬다.
“물론이죠. 아가씨께선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헤르멜은 왜 이렇게 그대로야. 아, 피에르는 어때?”
피에르는 작년에 태어난 헤르멜의 손자였다.
헤르멜은 손자 소식을 전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뿌듯한 목소리로 손자가 걸음마를 뗐다고 이야기했다.
“이 노인네가 나이가 들면서 말이 많아졌어요. 여기, 공작 부인께서 보낸 편지입니다.”
“고마워.”
제네비브는 헤르멜이 건넨 크림색 종이를 펼쳐 읽었다.
「마이언 아카데미에 온 걸 환영한다.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간단한 문장 아래로 보아르네 공작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제네비브는 산처럼 쌓인 선물 상자들을 봤다.
“쉬신 후에 천천히 열어 보시겠습니까?”
그 순간, 제네비브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헤르멜이 제안했다.
제네비브는 그의 권유를 거절하지 않았다. 장기간 여행, 그것도 열차 소음이 동반된 기찻길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세 시간 뒤에 깨워 주면 고맙겠어.”
하녀에게 부탁한 다음, 제네비브는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어나, 진저! 「헤르멜, 얘 몇 시간 잤어?」 진저!”
몸이 흔들리고, 몽롱한 의식 사이로 흥분한 블랑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잠에 취한 제네비브가 신경질적인 소리를 냈다.
“너, 지금 잘 때가 아니야! 얼굴 붓는다고! 눈떠!”
그런데 평소 같았다면 물러났을 블랑카가 계속 고집을 부렸다.
“일어났어…….”
결국, 제네비브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야 했다.
“테오가 있다고! 테오도르 우드빌이!”
“걔가 다니는 학교인데, 당연히 있겠지……. 그게 문제였어? 나 다시 잘게…….”
익숙한 이름에 잠깐 흠칫했지만, 테오도르가 마이언 아카데미에 다니는 거야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잘 피해 다니면 되는데.
제네비브는 다시 눈을 감고, 블랑카가 걷어 버린 이불을 찾고자 팔을 휘적거렸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지기라도 한 건지 이불이 잡히지 않았다. 제네비브는 결국 손을 뻗어 베개를 얼굴 위에 덮었다.
“만찬에서 너랑 테오가 같은 테이블이란 말이야!”
블랑카가 베개를 뺏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