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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31화 (31/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31화

“…….”

눈이 번쩍 떠졌다.

뭐? 누가…… 누구랑 같은 테이블이라고?

제네비브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언제 잠기운에 빠져 있었냐는 양 기숙사 방보다 넓은 침실을 초조한 발걸음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뇌가 엉망진창이었다.

그간 흑역사는 눈에 안 보이게 피하고, 생각하지 않는 걸 미덕으로 삼았건만. 같은 테이블이면 반드시 얼굴을 보고 함께 있어야 한다.

제네비브는 침실을 몇 바퀴나 걷고서야 다시 침대 끄트머리에 힘없이 앉았다. 그러곤 허무한 목소리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왜?”

“그거야 나도 모르지.”

블랑카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무작위로 정하는 자리를 누가 알겠는가.

블랑카가 구해 온 좌석 배치표를 보여 줬다.

[에드워드(St.JC) 훌리에타 가르시아(RMA) 시온 헤이븐(WC) 제네비브 달링(St.JC) 테오도르 우드빌(MA)]

테이블로 보이는 동그라미 주변에 학생 이름과 소속 학교가 적혔다.

“이게 무슨…….”

심지어 제네비브는 테오도르의 옆자리였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인가……?”

블랑카가 에드워드의 이름을 보며 긍정적인 시각을 제시해 줬다.

“이렇게 늘어질 시간 없어. 빨리 준비하자.”

맥 빠진 제네비브가 답답했던지, 블랑카는 손수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제네비브가 일어난 걸 확인한 하녀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방을 나갔다.

응접실은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드레스룸으로 바뀌었다. 드레스와 구두, 그리고 장신구가 계속 들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본인이 직접 꾸며 줄 생각인지, 블랑카가 팔짱을 끼고는 들어오는 드레스를 하나하나 살폈다.

“이건 가든파티용 드레스잖아. 아까도 그렇고, 왜 다들 구분을 못 하지?”

블랑카가 가벼운 주황색 드레스를 보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블랑카, 넌 준비 안 해?”

제네비브는 질문하는 동시에 블랑카가 옷만 입으면 끝나는 상태인 걸 깨달았다.

“너를 위해서라면 이 모습으로 가 줄게.”

블랑카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문전 박대당하겠는데.”

마이언 아카데미의 만찬 연회에는 암묵적인 드레스 코드가 존재했다.

여자의 경우, 흰색을 제외한 밝은 드레스가 금지되었다. 그렇다고 검은색을 입어선 안 됐다. 가슴이 너무 파여도 안 되었고, 치마 밑단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바닥을 끌어도 안 되었다.

또한 크리놀린 폭이 너무 넓어도 안 되었으며, 2캐럿 이상의 보석은 되도록 지양해야 했다. 한마디로 데뷔탕트처럼 화려하게 입는 건 눈치 없는 사람이나 하는 짓이었다.

남자의 경우, 턱시도를 입어야 하는데 여자와 다르게 꼭 검은색이어야 했다. 그게 싫다면 교복을 입는 것도 선택지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귀족이 연회에서 자발적으로 교복을 입는 건 ‘우리 가문이 파산했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설 속 여자 주인공도 괴롭히던 무리에게 속아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가는 망신스러운 실수를 저질렀었다.

‘그래서 에드워드가 외투를 벗어서 가려 줬던가.’

제네비브는 짧게 원작을 회상하며 하녀의 손길을 받았다.

치장은 몇 시간 동안 이어졌다.

지친 제네비브는 차라리 훌리에타와 시온의 자리에 원작 속 남주와 여주가 앉아, 자신이 구 약혼자를 포함하여 주인공들을 상대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했다.

“오~ 힘 좀 썼는데?”

오웬이 제네비브와 블랑카를 보자마자 엄지를 척 올렸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만난 임을 위해서라면…….”

그사이 테오도르와 같은 테이블에 앉는다는 걸 전해 들은 듯 오웬이 극적인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문장을 끝내지 못했다.

“입 좀.”

제네비브가 오웬의 정강이를 걷어찼기 때문이다.

“너무하다. 아……. 뼈에 금 간 것 같아. 누가 의사 좀 불러 줘.”

제네비브는 과장되게 앓는 소리를 내는 오웬을 한심하게 보기만 했다.

“진짜야. 정말 평소보단 나아 보여.”

다시 말해 평소엔 별로라는 뜻이었다.

“오, 왕자님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내 역작한테 왜 그래! 그런 말 들으려고 꾸민 거 아니거든?”

블랑카가 손을 내저으며 오웬과 제임스를 뒤로 밀어냈다.

들들 볶는 두 사람이 장난친다는 걸 알 정도로 지금 제네비브는 눈부셨다.

한 시간 가까이 입힐 옷을 고민하던 블랑카는 제네비브에게 밋밋할 정도로 심심한 흰색 드레스를 입혔다. 까다로운 드레스 코드를 어기지 않는 완벽한 드레스였다.

하지만 블랑카는 대다수 가문이 그러듯 꼼수를 썼는데, 바로 규정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만 포인트를 주는 거였다.

흰색 드레스 소매와 밑단에 작은 다이아몬드와 진주가 붙었다. 작은 날개 모양 머리 장식과 귀걸이도 같은 디자인으로 맞췄다.

제네비브는 흘러 내려가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인파를 따라 연회장으로 향했다.

연회장 안은 볼거리로 가득했다.

원형 테이블 위엔 몇 세기 전 수도사들이 만든 고급 촛대와 도자기 그릇이 놓여 있었다. 샹들리에 빛을 받은 은식기는 반짝거렸다. 또, 연회장 한 곳에선 악기를 조율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연회장 안쪽, 가장 앞엔 긴 테이블이 있었다. 파인트리 서클 다섯 교장이 앉는 자리로, 연회장을 한눈에 담을 수 있도록 높은 단상 위에 있었다.

제네비브는 제임스가 자리에 앉자마자 대륙 각지에서 온 여학생들이 그의 주변을 맴도는 신비한 장면을 목격했다.

“쟤도 대단하다.”

“칼리지 왕자 맞다니까? 그런데, 그렇게 기사 쓰면 내리라고 해.”

단 한 번도 제임스의 요청에 기사를 내린 적 없던 블랑카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멀리서 보이는 제네비브의 테이블엔 미리 도착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진저, 나는 네가 누구를 골라도 지지해.”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본 블랑카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우, 이젠 너까지.”

제네비브는 질색했다.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제네비브는 천천히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여학생들만 있는 곳을 지나칠 때, 그들이 공용어로 「마지막 날 연회에서 카터의 파트너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꿈꾸듯이 말하는 걸 들었다).

테이블엔 에드워드를 제외한 사람들이 이미 앉아 있었다.

렐타 사관 학교 출신인 훌리에타는 타 사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드레스 대신 교복, 더 정확히는 만찬용 군복을 입고 있었다. 군청색 교복은 언제 한번 입어 보고 싶을 정도로 멋있었다.

일 년 만에 만나는 테오도르는 기억보다 더 성숙해졌다. 키가 조금 큰 것 같은 그는 제네비브를 보자 담백하기 그지없는 인사를 건넸다. 제네비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의 인사를 받아 줬다.

테오도르를 볼 때마다 창피함이 밀물처럼 밀려들었지만, 제네비브는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아 준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며 테이블에 앉은 우드 칼리지 학생을 보았다.

“…….”

그 순간, 제네비브는 말문이 막혔다.

우드 칼리지 학생은…… 그러니까, ‘시온 헤이븐’은 ‘제네비브’와 초면이지만, 제네비브는 그와 초면이 아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

표지에서 본, 그 얼굴.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자신이 2년 동안 찾아다니던 남자 주인공이 다른 학교 학생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다. 에드워드를 봤을 때보다 심장이 매섭게 뛰었다.

“여기에 앉으면 돼.”

제네비브가 자리를 못 찾는다고 이해한 건지 테오도르가 고맙게도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가 아니었다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제네비브는 본인 이름이 적힌 카드가 놓인 자리에 엉거주춤 앉았다.

“오랜만이다. 작년 건국제 때 볼 줄 알았는데.”

“……그땐 세텐에 있어서.”

제네비브는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최대한 시온에게 시선을 안 주고자 안간힘을 썼다.

“여름에 세텐이라, 새로운데.”

테오도르가 비꼬는 투 없이 감탄했다.

그의 말대로 겨울 전경으로 유명한 세텐을 여름에 가는 사람은 잘 없었다. 하지만 건국제 때 그가 참석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급하게 출국한 거라고 어떻게 말하는가.

“달링 후작님과 후작부인께선 잘 계시지?”

“덕분에. 대공님은 어떻게 지내?”

제네비브는 짧게 대답하며 스푼에 비친 보라색 눈을 봤다.

‘……대체 왜 남자 주인공이 여기에 있는 거지?’

얼굴이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도, 저만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을 리가. 설령 있더라도 백만 분의 일의 확률이었다.

실은 남색 눈인데 자신이 보라색으로 잘못 본 거길 바랐지만, 다시 봐도 진한 보라색 눈이 맞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시온 헤이븐이라는 이름을 소설에서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다들 세인트 존 칼리지에 다니는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우드 칼리지 학생이 된 건데?’

시온 헤이븐의 등장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제네비브는 자신이 테오도르를 상대하고 있다는 것도 잊었고, 지금 그와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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