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33화
“아.”
제네비브는 뒤늦게 자신이 경망스럽게 웃은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또, 테이블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시작한 대화가 저와 테오도르에게만 적용된 듯해 뒤늦게 후회가 됐다.
제네비브는 주위를 쭉 훑었다. 아니나 다를까, 테이블의 분위기는 조금 전보다 더 내려앉았다.
소설에 묘사된 것처럼 마이페이스인 시온은 다른 사람이 대화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전채를 먹고 (시온은 브루스케타 위의 올리브를 전부 골라내 접시 한쪽으로 치웠다), 제네비브와 눈이 마주치자 한번 미소를 지어 줬다.
유일하게 언어가 통하는 에드워드와 대화를 시도하려다 실패한 훌리에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음료만 홀짝였다.
그리고 에드워드는 제네비브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랑 테오도르만 대화하면 안 되지.’
제네비브는 잡념을 없애고는 에드워드와 시선을 맞췄다. 눈이 마주치자 에드워드가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눈을 피했다.
그런 에드워드를 의아하게 여기며, 제네비브는 시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헤이븐 군. 이번 행사는 학생 대표로 참가한 건가요?”
테이블에서 대화할 일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현란하게 올리브를 가려내느라 바쁘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일반 학생 자격으로 참석했습니다.”
시온은 예의 바른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부가적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때 옆에서 테오도르가 설명을 거들었고, 훌리에타를 제외한 사람들은 그간 시온이 사냥 대회 위주로 출전했음을 알았다.
“자랑스럽게 여길 실력은 아닙니다. 순위권에 들어간 적도 없고요.”
입학 이후, 스포츠 대회만 참가해 온 제네비브와 테오도르가 흥미롭게 바라보자 시온이 급하게 덧붙였다.
‘저러니까 그동안 못 찾았지…….’
순위권에 들어 후광을 얻을 확률이 비교적 높은 스포츠 대회와 다르게 사냥 대회는 어지간히 잘하는 게 아닌 이상 순위 안에 들기 힘들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귀족들도 참가하기 때문이다.
“가르시아 양. 여기 앉은 두 사람이 학생 대표라는 걸 알고 있나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정보를 얻은 제네비브는 대화가 시작되는 데 가장 큰 장벽이 되는 훌리에타에게 말을 걸었다.
문장에서 제 성만큼은 알아들은 훌리에타가 제네비브를 봤다.
「……——.」
잠시 망설이던 에드워드는 그 말을 눈치껏 통역해 줬다. 문장이 끝나자, 훌리에타는 전혀 몰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헤이븐 군은 그럼 다음 학기 가을 사냥 대회를 기대하면 되겠어요. 에드워드와 테오도르는 둘 다 학교 펜싱 대표예요. 제 후배라서 그러는 건 아니지만, 특히 에드워드의 실력이 굉장하답니다. 입부하는 동시에 주전으로 발탁되었거든요!”
본인 칭찬을 들은 에드워드는 귀가 빨개진 상태로 그 말 역시 통역했다. 훌리에타는 아는 주제가 나온 듯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위로 형제 다섯 명이 있는데, 전부 렐타 사관 학교 학생 대표라고 해요. 렐타 사관 학교는 2학년부터 스포츠 클럽 가입이 가능한데…… 가르시아 씨는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그럼, 카를로스 가르시아가 당신의 형제라는 건가요?”
테오도르가 상기되어 물었다. 훌리에타가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그렇다’라고 대답하자, 테오도르가 열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그’ 가르시아를 만날 줄은! 내가 펜싱을 시작한 이유도 카를로스의 경기를 보고 나서거든. 어렸을 때 한 번 본 경기가 전부지만, 가슴에 깊이 남은 시합이었어.”
에드워드는 문장을 조금 간추려서 말했다.
중간에 껴서 고생하는 그를 보자니 미안하고 고마웠다. 에드워드 덕분에 다른 테이블만큼 잡담을 나눌 수 있었으나, 저 때문에 쉬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해졌다.
“힘들진 않아?”
메인디시가 나오기 시작한 무렵, 제네비브가 물었다.
“괜찮아요.”
에드워드가 무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가 빈말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아는 제네비브는 그제야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역시나 원작의 정보가 틀리진 않았는지, 직원은 에드워드 앞에 그가 주문한 송아지 요리를 놓았다.
음식이 나오며 대화가 잠시 사그라진 틈을 타, 에드워드가 훌리에타에게 무언가 말을 했다. 짧은 자기소개 이후, 에드워드는 통역이 아닌 목적으로 제네비브를 제외한 타인에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친구를 만들어 가는 거지!’
초면인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에드워드는 흡사 걸음마를 떼는 아기를 보는 것처럼 뿌듯함을 불러일으켰다.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차, 에드워드가 말을 끝내자 훌리에타가 제네비브를 보고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무슨 말 했어?”
상황을 보아하니 저에 대한 게 분명했다. 내용은 당연히 궁금했다.
“별거 아니에요.”
에드워드는 말을 아꼈지만, 어쩐지 별것 같지 않았다. 에드워드의 말을 들은 훌리에타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제네비브를 바라보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제네비브가 더 캐묻기도 전에 대화는 다시금 재개되었다. 직원이 메인디시를 나르는 걸 시작으로 테이블에서 단편적인 렐타어가 튀어나왔다.
「그릇.」
훌리에타가 농어 요리가 담긴 제 그릇을 가리키며 그리 말했다.
“렐타에선 그렇게 부르는구나. 우리말로 ‘조리법’이랑 발음이 비슷하네. 제국어로는 ‘그릇’이라고 불러요.”
돌연 기초 렐타어 강의가 시작되었다.
테오도르는 이참에 렐타어 공부를 끝낼 기세로 훌리에타의 설명을 들었다. 제네비브는 훌리에타가 몇 번이고 반복하던 ‘네’와 ‘아니요’, 그리고 지금 주고받는 ‘그릇’이란 단어는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젠 통역을 넘어서 아예 렐타어 공부 모임을 연 테오도르와 훌리에타 덕분에 에드워드는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무슨 얘기 했는지 안 알려 줄 거야?”
제네비브가 서운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게…….”
에드워드의 얼굴에서 갈등이 드러났다.
“……비밀이에요.”
고민 끝에 알려 주지 않기로 결심했는지, 그는 말을 아꼈다.
“그래도 험담은 안 했어요. 믿어 주세요.”
에드워드가 호소하듯 말했다. 기실 내용이 칭찬인 건 진작 알아차렸지만, 믿어 달라고 이야기하는 보자니 조금은 귀여웠다.
어느덧 만찬은 점점 끝이 보였다.
뻣뻣하던 시작과 다르게, 끝에 도달할수록 분위기는 말랑말랑하게 풀어졌다.
‘걱정한 것보다 괜찮았어.’
제네비브는 라이스 푸딩을 한 입 떠먹으며 생각했다.
남자 주인공과 흑막이 같은 공간에 마주치면 못해도 연회장 기둥 하나 정도는 뽑혀 나갈 줄 알았건만.
처음부터 앙숙인 사람은 없는 건지, 시온은 아이스크림을 순식간에 흡입하곤 정중하게 ‘통역해 줘서 감사합니다.’라며 에드워드에게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안심했는지.
‘이대로 둘이 친해져서 결말이 훈훈하게 바뀐다면 참 좋겠다.’
제네비브는 잠깐 행복 회로를 돌렸다.
어떤 끔찍한 사연으로 시온이 세인트 존 칼리지에 오게 되는지는 몰라도, 제네비브는 시온이 이대로 우드 칼리지의 커리큘럼을 밟기만을 간절하게 바랐다.
반면, 테오도르는 자신처럼 펜싱을 하는 에드워드에게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말하든 에드워드가 다섯 단어 이하로만 대답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대화를 잇진 못했다.
“…….”
그 와중에 제네비브는 에드워드가 훌리에타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포기하지 못했다. 가능하다면 ‘아까 에드워드가 뭐라고 말했나요?’와 훌리에타가 답하는 문장을 배우고 싶었지만, 그건 지금보다 먼 훗날 이루어질 바람이었다.
「——!」
그때였다.
연회장 한쪽에서 제복을 입은 중년 여자가 렐타어로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연회장 끝까지 닿자, 군청색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테이블에서 일어나 각을 맞춘 것처럼 일제히 줄을 섰다.
그 모습을 본 훌리에타는 접시에 조금 남은 티라미수를 허겁지겁 먹었다. 입에 묻은 카카오 가루를 대충 털어 낸 후, 에드워드에게 무어라 말하고는 사관생도들을 따라갔다.
사관 학생들이 줄을 맞춰 연회장을 떠나는 걸 시작으로 학생들은 서서히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시합 때 잘해 보자.”
자리에서 일어난 테오도르는 끝까지 대화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에드워드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응원의 말을 건넸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기대할게. 제네비브가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건 오랜만이거든.”
“네.”
에드워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어서 시온마저 의자에서 일어났고, 이제 테이블에 남은 건 제네비브와 에드워드였다.
“음식은 입에 맞았어?”
“……네, 맛있었어요.”
“중간에서 통역하느라 고생했어. 진심이야. 네가 없었으면 오늘 저녁은…… 상상하기도 싫다.”
제네비브는 닭살이 돋은 팔뚝을 몇 번 쓸었다.
“근데, 렐타어는 어디서 배운 거야?”
제네비브는 연회 내내 궁금한 걸 물었다.
“……어렸을 때 읽고 싶던 책이 있었는데, 렐타어로만 출판되었어요. 제목이 <고블린 여행기>였는데, 키워 주신 분이 렐타인이라 가르쳐 주셨거든요. 근데 다 배우고 나니까 번역본이 출판되어서……. 그래도 이왕 배웠으니 더 배워 봤어요. 이후로는 독학이라 ‘르’ 발음은 아직도 어렵지만…….”
악명 높은 언어 체계로 유명한 렐타어에서 어렵다는 게 고작 ‘르’ 발음이라니.
제네비브가 일상적으로 자주 쓸 수 있는 문장을 알려 달라고 부탁하자, 에드워드는 지체 없이 바로 알려 줬다.
“——. 음식이 훌륭하다는 뜻이에요.”
「음싁이 홀룡해요.」
그가 발음한 문장을 따라 읊는 건 전혀 다른 일이지만 말이다.
제네비브의 어수룩한 발음을 들은 에드워드가 작은 웃음을 흘렸다.
“……나도 웃긴 거 알아.”
제네비브는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연습하다 보면 차차 나아질 거예요. 원래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에드워드는 부드럽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