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34화
“이럴 줄 알았으면 선택 과목에 렐타어 넣을걸. 생각보다 재미있다.”
“더 알려 드릴까요?”
“그래 줄 수 있어?”
“그럼요.”
에드워드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흠……. 그럼 ‘가르시아 양, 어제 만찬에서 에드워드가 뭐라고 말했나요?’는 어때?”
제네비브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에드워드의 얼굴은 미안할 정도로 굳어 갔다.
“농담이야. 안 알려 줘도 괜찮아.”
곤란한 그의 모습을 보는 건 퍽 즐거웠지만, 그렇다고 에드워드가 불편해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기에 제네비브는 그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안 묻는다고 해서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 * *
제네비브는 라이스 푸딩을 전부 즐기고서야 일어났다. 그리고 에드워드는 그 순간만을 기다린 듯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벗어났다.
연회장을 나오자마자 거대한 신정 기둥들 사이로 밤하늘이 펼쳐졌다. 시원한 밤바람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내일은 뭐 해?”
제네비브는 바람에 따라 흩날리는 잔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
“스미스 감독님이 쉬라고 말씀하셨어요. 경기장 적응은 이튿날부터 해도 괜찮다고…….”
에드워드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일은 여유로운 거지?”
“네.”
“그럼 내가 마이언 아카데미 소개해 줄게. 이번엔 제대로!”
제네비브는 마지막 문장을 강조했다. 그랜드 익스프레스에서 도리어 본인이 소개 받은 게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아! 하지만, 시간 없으면 무리할 필요 없어! 돌아다니다 보면 길이 저절로 익혀지기도 하니까.”
쉬어야 하는데 괜히 무리하는 게 아닐까, 제네비브는 빠르게 덧붙였다.
“저 시간 많아요.”
에드워드가 즉시 대답했다.
“그럼 내일 아홉 시에 학생 층 로비 어때? 아침 먹고. 너무 빠를까?”
“저는 좋아요.”
이후 두 사람은 느린 발걸음으로 별관을 향해 걸어갔다.
본관 정문 부근을 거닐자, 신전 계단 아래로 마차가 줄지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화려한 마차는 누가 보더라도 명망 높은 가문의 것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마차가 많이 들어오네요.”
사교계 시즌 연회를 연상케 하는 경관을 본 에드워드가 말했다.
“다들 도착할 때가 됐지. 가족이라든가 후견인이라든가 말이야. 내일 하루 휴식 주는 것도 실은 손님맞이 때문에 그런 거거든. 오늘은 학생들을 위한 날이고, 내일은 진짜 손님들을 위한 날. 그때 학교 기부금이나 후원금 이야기도 오가니까. 지금쯤이면 별관도 북새통이겠다.”
제네비브는 과거에 겪은 행사들을 참고해 알려 줬다.
친선 대회에 반드시 오는 귀족들은 정해져 있었다. 자식이 대회에 출전하는 귀족, 자국에서 파인트리 서클 행사가 개최되는 귀족, 그리고 이 기회를 통해 영향력이나 인맥을 확대하려는 귀족.
추리고 추려도 그 수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 또한 자식이 출전하지 않는 이상, 다른 두 경우 초대장을 받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녀의 짐작대로 별관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긴 여행으로 지친 귀족들은 로비에 있는 아이보리색 소파에 앉아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담소를 나누었고, 이곳저곳 짐을 가득 실은 금색 수하물 카트가 대리석 바닥 위를 바쁘게 돌아다녔다.
입구 부근에 있는 귀족들은 담당 벨보이에게 코트를 건넸다. 보좌관들은 그들의 노동에 비해 지나치게 후한 팁을 건네주기도 했다.
로비와 다르게 여유로운 승강기를 보며 제네비브는 안심했다. 이 드레스와 신발을 신고 3층까지 올라가라는 건 내일 한 발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었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승강기가 토해 내듯 질서 없이 우르르 나왔다.
에드워드가 반대쪽으로 인파를 피하려고 하자, 제네비브는 그의 손목을 붙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에드워드는 제네비브가 당기는 대로 순순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승강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뒤늦게 올라탄 승객들이 어떻게든 끼어든 탓에 둘은 불가피하게 몸이 붙었다.
“…….”
머리 뒤로 탄탄한 감촉이 느껴졌다. 당황한 제네비브가 뒤를 돌아보자, 에드워드 역시 마찬가지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미안…….”
“괜찮아요.”
몇 주 전의 민망한 기억이 두 사람의 뇌리를 스쳤다. 둘은 동시에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언제 놓지?’
타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손 놓을 타이밍을 놓쳤다. 인제 와서 손을 놓자니 조금 전 일을 의식하는 것 같았다.
결국, 제네비브는 계속 에드워드의 손목을 잡은 상태로 3층까지 갔다.
“잠깐 지나갈게요.”
먼저 인파를 뚫은 제네비브가 다시금 에드워드를 당겼다.
‘하마터면 꼭대기 층까지 갈 뻔했네…….’
제네비브는 제때 나왔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긴장을 풀었다.
“…….”
그런데,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던 에드워드가 한 곳에서 멈췄다.
‘뭐지?’
자칫하면 에드워드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까먹을 정도로 고분고분 따라왔기에, 제네비브는 돌연 굳은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학생 층 로비에 마련된 소파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에드워드 군.”
“……밀포드 씨.”
남자를 ‘밀포드 씨’라고 부른 에드워드의 목소리에서 긴장이 배어났다.
충격, 당혹감, 두려움.
복잡한 감정이 읽혔다. 제네비브 또한 에드워드 못지않게 당황하여 밀포드를 보았다.
옆머리가 하얗게 센 노년의 남자는 여느 귀족처럼 몸에 딱 맞는 검은색 고급 맞춤 양복을 갖춰 입고, 흰 장갑을 낀 손은 신기하게 생긴 지팡이를 짚었다. 은으로 된 지팡이 손잡이 부분은 새의 머리 모양이었고, 새의 눈에는 손톱만 한 루비가 박혀 있었다.
지팡이로 몸을 지탱한 남자가 왼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굴러갔다. 차분한 눈이 강압적으로 제네비브에게 잡힌 에드워드의 손목을 조용히, 그리고 뚫어져라 쳐다봤다.
주름진 얼굴은 시체처럼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앙상한 손가락이 지팡이 끝을 규칙적으로 두들겼다. 무음에서 오는 응축된 압박감은 그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려 줬다.
에드워드는 황급히 제네비브에게서 제 손목을 빼냈다.
“에드워드 군의…… 친구분이신가 봅니다.”
밀포드는 그제야 입을 뗐다. 느릿하게 말하는 차가운 목소리를 듣자니 오한이 들었다.
“……제네비브 달링입니다. 세인트 존 칼리지 3학년이에요.”
간신히 정신을 차린 제네비브가 대답했다.
“달링이라면…… 카르디르 왕국의?”
그가 낮은 목소리가 물었다. 추궁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네. 달링 후작 가문의 제네비브 달링입니다.”
“그래요, 달링 양.”
밀포드가 두 눈을 좁혔다. 왜인지 악의가 느껴졌다.
“누군가 신분을 물어보면 학교 이름이 아닌, 가문 이름을 대도록 하세요. 학교가 당신을 정의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가 부드럽게 다그쳤다.
“……죄송합니다.”
미안할 상황이 아닌 것과 별개로 제네비브는 직감적으로 지금은 사과하는 것이 가장 편한 길임을 알았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습니다. 가 보시죠.”
그가 이만 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그리고 에드워드 군. 저와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제네비브는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밀포드의 모습은 그리 이상적인 지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원작에 이런 사람이 있었나?’
안타깝게도 원작이 철저하게 여자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얼마 없었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의 과거와 관련된 정보를 원작에서 얻는 걸 진작 포기했기에 밀포드를 관찰했다.
제네비브가 밀포드를 본 건 지금이 처음이었지만, 그가 오만한 남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건 쉬웠다. 오히려 깨닫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자연스럽게 권위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건 물론이고, 깊게 파고들지 않는 이상 그가 하는 말이 옳다고 느끼게 만드는 능력이 범상치 않았다.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밀포드가 아직도 떠나지 않는 제네비브를 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귀족 같은 우아한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이 주름진 얇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평범한 문장이라 하더라도 말하는 이에 따라 정중한 질문이 되기도, 암묵적인 명령이 되기도 한다.
그의 완벽한 발음을 감상하는 것도 잠시, 제네비브는 그럴듯한 문장이 후자에 속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할 말 없는 거 아니까 빨리 가라’. 점잖게 포장된 말을 해석하자면 이랬다.
제 감정 하나 못 숨기는 어수룩한 학생들 사이에서 지낸 시간이 길었던 걸까? 이토록 싫은 티를 절제하는 사람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더 기분 나쁜 건 이쪽이지.’
초점 없는 검은색 눈을 보니 불길한 감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무 이유 없이 기분 나빠지는 눈이었다.
무엇보다 에드워드는 밀포드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토록 적대심이 느껴지는 건 대체 왜일까?
“에드워…….”
“선배,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이름을 미처 다 부르기도 전에 에드워드가 먼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그러고는 바로 밀포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제네비브는 재빨리 에드워드의 손목을 붙잡았다. 연갈색 눈과 마주치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밀포드 쪽을 향해 눈짓했다.
“가 주세요.”
에드워드는 고개를 저었다. 담담한 목소리와 달리, 그의 눈은 애원하고 있었다. 제멋대로 행동하면 에드워드가 난처해질 것 같았다.
‘하라는 대로 하는 게 맞는 걸까?’
자신과 밀포드는 초면이고, 그를 잘 아는 사람의 말대로 행동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했다간 에드워드에게 어떤 불이익이 올지 모르니까.
“……그럼, 내일 보자.”
제네비브는 결국 한발 물러났다.
에드워드의 어깨 뒤로 희미한 미소를 짓는 밀포드가 눈에 들어왔다. 작게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그의 눈은 그리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생기 없는 눈으로 제네비브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차가운 시선이 닿는 곳마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착한 분이시라면 죄송하네요.’
제네비브는 본인이 떠올린 생각이면서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예법을 향한 밀포드의 집착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간파한 제네비브는, 그가 만족할 정도로 ‘귀족적인’ 인사를 하고서야 로비를 벗어났다.